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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67화 (67/250)

로엔의 마나뱅크 67화

6장 열리기 직전의 문

엘시아가 죽고 그 후계자가 마족과 계약한 거라면 증거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리거나 그냥 조용히 장본인만 처리하고 묻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엘시아가 살아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실 내가 죽음에서 다시 돌아와 새로운 생명을 얻을 때 다른 세계가 아닌 이곳 물질계로 정확하게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엘시아에 대한 인과의 끈 때문이다.

나는 대마법사로써 죽을 때에 복수를 맹세했고, 그것을 이용해 환생한 것이다.

“어쩔 수 없나.”

하루를 꼬박 고민한 후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미련이 나를 강하게 가로막았지만 결국 냉정하게 복수를 실행하기로 했다.

한 번 마음먹으면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차분하게 계획을 세운 후 이반 경을 불렀다.

“네? 엘시아 경이 아직 살아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육체 성분의 태반을 석화시킨 후 보존의 마법진으로 붕괴를 막은 채 버티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적어도 마법진 밖으로 나올 수는 없겠군요.”

이반 경은 내 설명을 듣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8서클이지만 엘시아라는 이름이 가지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닌 듯 했다.

내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반 경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 채고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변명하듯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엘시아 경은 최강의 마법사라 불리었고, 어릴 때부터 그녀의 업적에 대해 배우며 자랐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눌릴 수밖에요.”

이성은 둘째 치고 본능이 그냥 굽히게 된다는 소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러면 만약 싸우게 될 경우 평소 실력의 반도 내지 못할 것이다.

심하면 아예 엘시아를 상대로 마법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다. 고위 마도사로 갈수록 이런 기의 눌림이 마법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설마 최고의 무투파 마도사로 알려진 이반 경이 이런 심리적 함정에 빠질 줄은 몰랐다.

이반 경 자신도 그런 점이 부끄러운 지 다시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가 뭐래도 엘시아 경은 그 로엔 프로시안 경의 유일한 제자 아닙니까. 대마법사의 진전을 이은 여자란 말입니다.”

그래, 갸가 무섭긴 무섭지. 근데 알고 보면 너도 로엔 프로시안의 제자거든.

다른 건 몰라도 전투적인 면만 따지면 큰 차이가 안 난다고.

가슴이 조금 답답했다.

8서클이나 되어서 뭘 믿고 이렇게 순진한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했다.

이반 경은 마탑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한 마법사가 아니다. 그는 그야말로 독학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낸 천재다.

그러나 독학이라는 부분이 가지는 구조적인 한계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불안감이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좁은 길을 열고 8서클까지 올랐지만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마탑에서 성장한 마도사에 비해 지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남아 있다. 자신이 완벽한 8서클 마법사가 아닌 편협한, 그러니까 약간 비정상적인 8서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인해 오히려 자존심을 세우며 누구에게라도 쉽게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 테지만, 이런 식으로 마음속으로 승복할 수밖에 없는 상대를 만나면 불안감이 현실화 되어 버린다.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것이다.

그가 나를 스승으로 대하는 태도만 봐도 거의 확실하다.

아무리 내가 9서클의 경지를 보여주긴 했어도 현실적으로는 6서클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 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이반 경은 나에게 감복한 후,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궁금한 것도 많을 텐데 한 번도 나의 정체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생각을 하려는 느낌도 없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반 경에게 말했다.

“날 믿어요. 엘시아 경이 마법진에서 나올 수 있어도 이반 경을 압도할만한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경험이나 지식의 폭이 싸움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육체와 정신의 상태는 더욱 중요해요. 경은 아직 젊고, 그녀는 거의 죽기 직전이라 집중력부터 큰 차이가 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로엔 프로시안은 사상 최고의 마법사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제자까지 최고는 아닌 겁니다. 전투에 있어서라면 이반 경을 넘어설 마법사는 지금 이 물질계에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비슷한 수준은 있지.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엘시아도 만만한 애는 아니다.

어쨌든 내가 재차 말하자 이반 경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당황했던 눈빛이 호수 밑바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스승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제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힘을 쓸 수 있도록 수련하지요.”

아 놔, 이 사람이.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요. 그냥 렌 경이라고 부르라고요.

하지만 이반 경이 진지하게 날 대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스승이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였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예,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 제 계획대로라면 엘시아 경과 싸울 사람은 이반 경이 아니니까요.”

“그럼 누가 그녀와 대적한다는 겁니까?”

“이 바닥에 이반 경 빼고는 한 명 뿐이지 않을까요?”

“아론 체프코트 경 말씀이시군요. 그자가 엘시아 경과 싸우려 할까요?”

“해야죠. 십대마도가문이 뭡니까? 대륙의 평화는 그들이 지켜야 합니다.”

“그럼 우리 데빌 베인은…….”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마족의 계약자들을 막 처리하고 다니면 희생도 나올 거고, 영광보다는 질투를 많이 받을 거 같아요. 십대마도가문은 데빌 베인이 그들 위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에요.”

“그거야 그렇겠지요.”

“급한 상황이 아니면 우리는 탐색과 조사에 주력하고 처분은 십대마도가문에 맡기는 게 좋겠어요. 그 정도라면 오히려 환영과 협조를 받을 거예요.”

마족의 계약자들이 대륙의 패권을 원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십대마도가문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마족의 계약자들과 싸우는 것에 동의했지만 그게 새로운 권력자를 만드는 결과가 된다면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새롭게 하나가 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는 범위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우리가 크게 튀지만 않으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다는 소리다.

너무 소극적 아니냐고? 대마법사답게 한방에 확 휘어잡으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나 아직 9서클 아니야. 그리고 천하를 잡아도 별로 좋은 거 없어.

원래 세상은 군림하는 거지 지배하는 게 아니야. 암.

“그리고 엘시아 경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니 우리가 아무리 일을 꾸며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가능성이 커요. 그런 만큼 우리는 모든 계획에서 빠져 유사시를 대비해야 합니다.”

원래 사냥을 할 때에는 적의 퇴로를 먼저 지켜야 하는 법. 퇴로가 어딘지 정확하게 모르니 일단 대기하고 있는 팀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다.

“어쨌든 이제부터 증거를 만들어 아론 경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로 해요. 그자가 만사를 제치고 이곳으로 달려올 수밖에 없는 증거를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런 게 있습니까?”

“있어요. 엘시아 경이 지금 노리는 것은 마나 뱅크의 독점이에요.”

“그런! 말도 안 됩니다.”

“될 거 같아요. 엘시아 경은 로엔 프로시안 경의 마나코드를 해석해 내려 하는 중인데, 이제 거의 다 풀고 딱 하나 남았다고 했어요.”

“으으, 그럼 정말 큰일이군요. 당장 알리도록 하지요.”

“기다려요. 아직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나는 이반 경에게 프리스톤 가문이 다른 가문에게 전쟁을 걸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시간을 끌기 위해 전쟁마저 불사하려 하는 프리스톤 가문의 각오는 진심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자칫 잘못해서 엘시아 경이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서 잠적해 버리면 쉽게 찾기 어려울 거예요. 우리들은 먼저 엘시아 경이 도망갈 수 없는 함정을 파고 빈틈을 노려야 해요.”

내 설명을 들은 이반 경은 곧 이해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프리스톤 가문이 전쟁을 일으키는 순간을 노려 단숨에 빈집을 털듯 아론 경을 비롯해 엘시아와의 싸움에 도움이 될 만한 정예들을 침투시켜 그녀를 처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그때에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일단 다른 십대 가문도 모두 들러야 하니 그 사이 일을 진행하죠. 우리는 어디까지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집어 업는 겁니다.”

“예,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이제 운명의 시계추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시아에 대한 대응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엘시아는 대륙 전체의 이목을 잡아 끌 수 있는 명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엘시아를 이용해서 우리 조직이 확고부동한 힘을 얻을 수 있게 일을 꾸몄다.

동시에 내 개인적 복수도 달성해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내가 직접 손을 쓰고 싶지만, 난 그저 그녀의 죽음을 이 두 눈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복수는 덧없는 것이지만 풀기 전까지는 사람의 두 눈과 귀를 막은 장막처럼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쯤에서 과거와의 인과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경지를 향해 정진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는 것이다.

며칠 후, 우리는 프리스톤 가문을 나와 예정대로 남은 십대마도가문을 차례로 방문했다.

다행히도 프리스톤 가문 이외에는 마족과의 관계를 맺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기존의 십대마도가문을 여럿 건드리면 아무래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프리스톤 가문이 대표로 정리되고, 다른 가문들은 결백성을 인정받아 당분간은 대륙의 수호자로 행세하는 게 좋다.

“승부는 덴판 제국의 황제 즉위식에서 냅니다.”

나는 이반 경에게 선언했다. 이반 경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정식으로 초대장을 받고 다시 덴판 제국의 수도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작정을 하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했다.

황제의 즉위식에 참가하러 가는 것이니 아무리 인원을 많이 데리고 가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영지 내에 있던 기사들 대부분이 동행을 했고, 볼스테아 왕국 쪽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합류를 했다.

놀랍게도 볼스테아 왕국으로 간 초대장의 좌석서열보다 우리 데빌 베인측이 더 높았는데 볼스테아의 사신으로 가는 쿤쿤 후작은 그 점이 약간 불만인 듯싶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성질을 내지는 않았다.

덴판 제국의 수도를 향해 가는 도중, 나는 정보원으로부터 이미 주시하고 있던 프리스톤 가문의 국경분쟁 사건이 발발했음을 들었다.

역시 그들도 큰 사건 속에 작은 사건을 덮어서 자연스럽게 불이 번질 시간을 번 것이다. 아마 즉위식이 끝나면 이미 일은 커질 대로 커져서 전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겠지.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엘시아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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