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66화
“어떻게 할깡?”
“뭔가 숨겨진 한 수가 있나 본데? 따라가 봐라.”
그래도 여기는 엘시아의 가문이니 뭔가 있긴 있겠지. 숨겨진 한 수가 마족의 계약자만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리온의 뒤를 몰래 따라가는 뿌우를 지켜보았다.
말리온은 시종도 없이 혼자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마법 실험실이었는데, 그 중 가장 안쪽에 들어가 거울에 손을 데니 다시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벽에는 여러 가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고 그 힘이 범상치 않았다.
“뿌우야. 조심해.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내가 멈추라 그러면 바로 멈춰.”
“알았당. 여기가 위험한 건 나도 알겠당.”
긴장이 된다. 위쪽에 쳐져 있는 마법진도 엘시아의 솜씨인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지하는 또 달랐다. 엘시아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 느낌이랄까?
마법진으로 강화된 9서클 마법이 겹겹이 쳐져 있다. 마나의 흐름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나조차 쉽게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있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안에 잠입하려면 군대가 와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마 탑 위쪽 전체보다 지하실에 들어간 자금이 몇 배는 더 될 거 같았다.
무엇을 숨겨 놓았기에 이정도 방비를 했을까?
어찌되었든 이게 엘시아의 진명으로 설치된 것은 변함이 없다. 말리온 프리스톤 경에게는 미안하지만 뿌우는 전혀 기척을 남기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가니 나는 드디어 느낄 수 있었다.
찾고 있지만 보고 싶지 않았던 것. 바로 마기!
“역시 비장의 한 수라는 게 마족의 후계자와 연관된 거였나? 프리스톤 가문은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네.”
엘시아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가주가 마족의 계약을 이어받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이었다는 소리고, 그 자가 이 아래에 있다면 틀림없이 가문 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터.
적어도 말리온 경이 마족의 일을 알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가문 전체가 마족과 관련이 있는 것과 같다.
아마 이 일이 밝혀지면 프리스톤 가문은 물질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문에 속한 마법사들은 모두 죽을 때까지 갇혀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자신들은 관계없다고 부정해도 흑마법은 사용하지 않으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특히 이미 몇 번이나 마족의 계약자로 인해 큰 사건이 일어났고, 덴판 제국의 황제도 마족의 계약자의 음모에 의해 죽었다고 소문이 도는 상황이니 지금 터지면 정말 크게 터질 수밖에 없다.
말리온 경이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꽤 넓은 방이 나왔다. 그곳의 바닥과 천정에 그려진 마법진으로부터는 마나가 형상화 되어 마치 빛의 커튼처럼 쳐져 있었고, 중앙에 한 노파가 앉아 뭐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호호호호,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스승님, 곧 그대의 코드를 알아낼 거예요.”
나는 화들짝 놀라 뿌우에게 외쳤다.
“멈춰! 뒤로 물러나.”
“말 하지 않아도 물러날 거당. 무섭당.”
눈치 하나는 9서클인 뿌우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몸을 숨겼다. 마치 자신이 투명한 상태가 아닌 듯 벽 뒤에 숨어서 조심스럽게 눈만 살짝 드러냈다.
말리온은 잠시 기다렸다가 작게 헛기침을 하고 정중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 저 말리온입니다.”
“기다려라. 지금 중요한 부분이니까.”
“네.”
천하의 프리스톤 가문의 가주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하고 몇 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말리온은 조금도 불만을 가지는 표정이 아니었다.
불만을 가질 엄두가 안 나겠지. 나는 알 수 있다.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보는 순간 알았다. 눈앞에 있는 노파야말로 말리온 경의 친조모이자 내 제자인 엘시아 프리스톤이다.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그녀가 살아있을 수 있지?
9서클이 되어 육체의 노화를 정지시킬 정도가 되지 않으면 인간이 100년 이상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엘시아는 내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는 것이다.
혹시 마족과의 계약에 장수의 조항이 들어 있었나? 하지만 그런 조항을 넣으면 결국 엘시아의 영혼은 마족에게 저당 잡히고 살아있는 시체가 될 뿐인데.
그동안 나는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족에 대해 연구를 계속 했다. 특히 몇 년 전 얻은 흑마법서가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마족과의 계약에 대해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알게 되었고, 그릇된 요구가 어떤 부작용을 부르는지도 알게 되었다.
불노불사는 가장 무모한 요구이다. 그거야말로 마족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통째로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 요구다.
그러나 나는 곧 엘시아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알 수 있었다.
“석화의 마법진. 맙소사. 엘시아는 몸의 태반을 석화시켜 노화를 막았구나.”
그녀가 서 있는 곳 주변에 몇 겹으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은 바로 살아있는 생명체를 돌로 만드는 석화의 마법진이다.
내가 보기에 엘시아는 자신의 육체 성분 중 50% 정도를 돌로 만들고 나머지 부분을 마나로 유지하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지독한 방법이지만 8서클 정도의 마도사라면 충분히 해 볼만 한 생명연장 방법이다. 단, 이럴 경우 마법진 밖으로는 아예 나오지 못한다. 나오는 순간 석화가 깨어지며 원상태로 돌아온 몸이 급격하게 노화되니 10분도 못 견디고 죽어버리게 된다.
내가 마법진을 분석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다.
말리온 경이 조용히 서서 한참을 기다리니 갑자기 마법진에 쳐진 빛의 커튼이 눈부실 정도로 빛나기 시작했다.
파앗
“호호호호호, 또 하나 뚫었다. 이제 하나 남았어. 하나만 더 뚫으면 모든 것이 내 손에 들어 올 거야.”
“할머니, 축하드립니다!”
엘시아는 거의 미친 듯이 웃었고, 말리온 역시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가문의 숙원이 이제 곧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에 조금 전까지 나빴던 기분이 확 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왜 온 거냐? 여긴 함부로 오면 안 된다고 말했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할머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흥, 잘못해서 그들이 나의 생존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 힘을 얻기 전까지 난 죽은 걸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들이 감히 우리 가문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무시하지 마라. 그들이 그들의 계약자로부터 받은 힘은 결코 작지 않다. 내 이미 100년이란 기한을 넘겨 발데스의 힘을 잃은 이상, 아무래도 불리할 수밖에 없다.”
엘시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30년 전, 마나뱅크의 해킹에 걸리는 시간이 마왕 발데스와의 계약기간을 넘길 거라는 예상을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나뿐 아니라 우리 가문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할머니의 마법은 무적이라 저 체프코트나 헬비스트도 상대가 안 되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헛소리 마라. 내 이미 늙어 기력이 없으니 실전에서는 그들을 당할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코드를 알아내서 마나뱅크의 마나를 독점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야.”
“할머니라면 꼭 해내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 남았으니 다 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말리온은 열심히 아부를 했지만 엘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이 할 말만 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회상이었다.
“흥, 100년이라는 세월을 모두 바쳐도 스승의 마스터 코드를 알아내는 데에는 부족했다. 그 사이 나는 가문의 정보력을 이용해 경쟁자 중 세 명의 존재를 알아냈는데, 누구 하나도 만만한 자가 없었다. 역시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계약을 한 자들다웠다.”
이대로라면 망한다. 마왕에게 얻은 힘을 경쟁자들의 표적이 되어 소멸될 것이다.
그래서 엘시아는 죽음을 기획했다. 경쟁자들이 자신을 찾을 생각도 못 하게 만든 것이다. 그녀가 죽음과 동시에 다른 곳에서 새로운 경쟁자를 탄생시켜 이목을 흐리려 했다.
그래서 지금 엘시아는 마법진 안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녀를 죽은 것으로 위장시키는 마법진이다. 마왕조차도 속일 수 있는 궁극마법의 결계.
물론 그것은 힘을 얻기 전의 일이다. 일단 힘을 얻으면 발데스가 물질계에 현신이라도 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느냐?”
“예, 가문의 힘이 갈수록 약해져 이번에 있는 덴판 제국의 황제 즉위식에 10대 가문에서도 밀려난 자리를 배정 받았습니다.”
“쯔쯔, 네 녀석의 힘이 부족한 게 내 위험을 가증시키는구나.”
“…….”
말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 탓만을 할 수만은 없구나. 가문의 수익 중 대부분을 내 마법진 유지에 사용했으니…….”
엘시아도 더 이상 책임 추궁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10대가문에서 밀리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10대가문의 협약에 의해 누리고 있던 이익의 상당수가 사라지니 더 이상 마법진을 유지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필요이상으로 무리해서 재료를 모아 의심을 살까 봐 조심하는 형국이라…….”
말리온의 조심스러운 푸념에 엘시아는 손을 들어 그의 말문을 막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엘시아는 냉정한 어투로 말리온에게 말했다.
“얼마 안 있으면 모든 게 끝난다. 그 사이만 버텨라.”
“아슬아슬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10대 가문의 후보와 전쟁을 벌여라. 전쟁 때 무리하는 것은 당연하니 내 마법진 유지를 위한 재료를 모아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과연 명안이십니다.”
말리온은 감탄했다. 나도 감탄했다.
전쟁을 벌이면 양측 다 무지막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어쩌면 프리스톤 가문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10년간은 버틸 수 있으리라. 그 사이 어떤 피해가 나도 엘시아가 계획에 성공하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말리온은 기뻐하며 물러섰다. 이제는 전쟁을 벌일 수 있는 적당한 대의명분을 생각할 것이다.
혼자 남은 엘시아는 다시 집중을 하여 마나뱅크에 접속을 했다.
“마나뱅크를 독점하는 데 성공하면 발데스와의 계약은 성공한 것이 되지. 그러면 나는 마나를 이용해 발데스의 힘을 얼마든지 끌어다 쓸 수 있다. 단순한 궁극마법이 아닌 마왕의 힘을 직접 쓰는 것이다.”
엘시아의 집념에 가득 찬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를 대가로 마왕의 힘을 끌어다 쓴다고? 그게 네 계약의 조건이었구나.
“성공만 하면 일단 내 육체를 20대로 되돌려야지. 그리고 경쟁자들을 모두 찾아내 영혼을 속박하고 노예로 부려 주겠다. 두고 봐라. 나의 100년의 집념이 어떤지 보여주마. 호호호호.”
마왕의 힘이 네 젊음을 되찾아 줄까? 네가 아직 궁극마법을 못 써서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이 세계의 법칙은 시간을 거꾸로 못 돌리듯이 한번 노화하면 다시는 젊어지지 못한단다. 다른 세계라면 몰라도 여기서는 안 돼.
내가 왜 환생마법에 모든 것을 걸었는데.
슬프다. 원한을 잊기로 결심한 날에 엘시아가 살아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늙고 추악해진 그녀가 아직도 집념을 못 버리고 심지어는 다시 젊음을 되찾겠다는 망상까지 가져 버렸다.
이제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복수는 해야겠지. 복수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음모가 그대로 진행되게 놔둘 수는 없고.”
입맛이 쓰다. 그토록 이를 갈았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통쾌함보다 씁쓸함이 강한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