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65화
내부의 경계만큼은 대륙 최강이라는 프리스톤 가문. 하지만 나에게는 그냥 비어 있는 벌판과도 같다. 아니, 오히려 경계 마법을 역이용 할 수 있으니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라고 할까?
“뿌우야, 자세히 이야기 안 해도 알지? 구석구석 싹 흩으면 돼.”
“알았당. 창고나 화장실까지 다 살펴볼 테니 염려 마랑.”
“어차피 시력공유에 텔레파시까지 쓸 거니 염려 할 거도 없어. 그럼 어서 가라.”
“마탑 안에서 텔레파시까지 쓸 수 있다닝, 프리스톤 마탑이 너한테 완전히 호구 잡혔구낭.”
“제자의 마탑은 내 마탑이나 같은 거지. 뭐. 가주라면 엘시아의 진명을 받았을 테니 나와 동급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조작하는 걸 그자가 알 리는 없어. 내 상위는 아니니까.”
오히려 내가 현 가주보다 더 유리하다. 난 이 안에 쳐진 장치 대부분을 보기만 해도 이해하지만 가주는 서클의 한계 상 그냥 지식으로 조작법만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내가 마법진의 내용을 조금만 바꿔도 현 가주는 바보가 될 수 있다. 이치를 모르니 명령어를 알아도 어떻게 변화를 시켜야 할지 모르는 거다.
물론 그런 장난까지 칠 생각은 없다. 마족의 계약자만 찾으면 조용히 그자만 처리하면 된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면 뿌우가 이동하면서 보는 것을 같이 보았다. 그런데 조금 이동하다보니 마법으로 숨겨진 비밀문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비밀문을 숨긴 마법진이 보였다.
이것은 존재 자체가 숨겨진 거라서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면 말리온 경이라고 해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숨겨진 방식 자체가 내가 엘시아에게 가르쳐 준 것이기에 쉽게 특징을 잡아낼 수 있었다.
“어, 그거 뭐지? 한 번 열어봐라.”
“알았당.”
내가 말하자 뿌우는 주변을 살짝 살핀 후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문이 이 초 정도 사라졌다 나타났고 그 사이 뿌우는 안으로 들어갔다.
“우왕, 이거 웬 보물창고냥.”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뿌우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로 숨겨진 방 안에는 적지 않은 보물과 마법무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상하네. 이런 걸 놔둘 위치는 아닌데. 원래 보물창고는 지하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긴 3층 정도라 경계하기도 애매한데 말이야.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차피 마법으로 보호되는 비밀방이라 아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오기는커녕 방이라는 인식조차 못 한다. 위치는 상관없는 것이다.
“어! 잠깐만.”
나는 뿌우의 시선으로 방안의 물건들을 살피다가 놀라서 외쳤다.
“뭐냥?”
“그거 뒤집어 봐.”
내가 지목한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문장이 그려진 둥근 판인데,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다. 뿌우가 판을 뒤집자 뒤쪽은 거울이었다. 그러니까 손거울을 뒤집어서 놓은 것이다.
“틀림없네. 리플렉트 밀러.”
어떤 마법이든 튕겨내는 최강의 마법방어구 중 하나다. 내가 전생에 가지고 있던 물건인데 이걸 여기서 보게 되네.
“앗! 잠깐.”
“왱, 이것도 아는 거냥?”
“그래, 그건 문서제작의 펜이야. 자동으로 하급 스크롤을 제작해주는 건데. 그러고 보니 다른 것들도…….”
깨달았다. 이 방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전생에 내가 쓰던 것들이다. 보물들만 해도 내가 마음에 드는 것만 따로 모았던 게 그대로 있다.
“허 참, 그럼 이건 내 기념관 같은 건가?”
뿌우는 다시 주변을 살폈고, 한쪽 구석에서 한 권의 책자를 찾아냈다.
-초대 대마법사 로엔 프로시안의 유물들, 제자 엘시아 프리스톤이 스승에 대한 존경을 담아 영구히 보관하기로 한다.-
“과연, 엘시아가 만들어 둔 것이군.”
나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방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그녀도 나에 대한 생각을 했고, 사후에 예의를 지킨 것 같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게 유물을 보관한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 죽은 지 오래 된 사람 생각해서 뭐 하냐. 그냥 묵은 원한은 잊어버리자.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지만 나는 그냥 마음을 풀기로 했다. 물론 그녀가 살아 있다면 이런 식으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원망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떻게 할깡?”
뿌우가 묻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다 챙기자. 어차피 내거고, 이대로 놔두어도 프리스톤 가문에서는 못 찾아. 그거 8서클은 되어야 찾을 수 있으니까.”
“알았당. 그럼 다시 돌아간당.”
보물의 양이 많아도 아공간 주머니가 있으면 큰 문제가 안 된다. 뿌우는 내 방으로 와서 아공간 주머니를 들고 갔다. 그리고 나에게 물품을 하나하나 확인시키며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아공간 주머니부터 하나 더 구해야겠네. 좀 더 좋은 걸로.”
“그래랑. 이거 거의 다 차는 분위기당.”
“그래, 참! 혹시 다른 방 있는지 찾아 봐. 내 기념관이 있다면 엘시아 본인의 기념관도 있을 거야.”
“알았당. 잘 뒤져본당. 내가 또 보물찾기는 잘 한당.”
뿌우는 트레져 헌터의 눈빛을 하고 열심히 복도와 방안을 돌아다녔다.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장치들은 내가 가르쳐 준 엘시아의 진명으로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무리 찾아도 엘시아의 유품을 보관한 방은 없었다. 그녀는 그냥 죽어서 차대 가주에게 모든 것을 남긴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내 엘시아의 성격을 잘 아는데, 내 기념관을 만들었다면 그녀 자신이 것도 같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다른 층도 찾아봐.”
“알았당. 그런데 우리 원래 탐색 목적이 마족의 후계자 찾는 거 아니냥?”
“겸사겸사지. 그럼 보물이 보이는데 그냥 지나칠 거냐? 정령인 네가?”
“아니당, 보물은 있으면 가져야 한당. 그게 대기 정령의 본분이당.”
“그래야 포트라 일족이지. 빨리 찾아 봐.”
“일족 아니당. 그냥 노예, 아니 사원이당.”
뿌우는 포트라의 이름만 나와도 몸을 살짝 떤다. 아주 공포심이 뿌리 깊게 심어져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뿌우는 열심히 사방을 뒤지며 나아갔다. 중간에 몇몇 마법사들이 지키고 있는 구역이 있는데 그들은 뿌우가 지나갈 때 무엇인가 느낀 듯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시각적인 확인이 안 되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았다.
쯔쯔,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시각에만 의존하면 안 되는데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감각적 신호를 무시하다니. 이 안에서 별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마음의 방심이 있겠지만 그걸로 한심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프리스톤 가문은 전체적으로 기강이 풀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면 전대에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가 있었다고 해도 오래 가지 못한다.
엘시아가 정령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더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쪽으로는 별로 공부를 안 했다. 내가 환생 마법진 연구에 몰두하느라 가르침을 좀 덜 베푼 경향이 있는데, 그때는 엘시아가 7서클도 안 된 상황이라 꼭 가르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후손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고 가지 못했다. 그녀의 강함은 오직 일대로 끝난 셈이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뿌우는 결국 가주인 말리온 프리스톤의 집무실까지 갔다.
그런데 밤이 늦은 시간인데도 말리온 프리스톤은 여전히 집무실에 있었다.
뿌우는 기척을 지운 채 말리온의 바로 뒤쪽까지 갔다.
“얘는 정령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당. 이정도면 마법적 재능도 영 아니라는 소리넹.”
뿌우가 혀를 쯔쯔 하고 차며 말했다.
그 말대로 아무리 투명화 된 상태이고 대기의 정령이라 무게감이 전혀 없다고 해도 바로 뒤까지 다가갔는데 아무것도 못 느낀다면 마나에 의한 기감 자체가 약하다는 소리다.
나는 엘시아가 이런 둔재를 6서클까지 끌어올리려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이 갔기에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뿌우의 시선으로 보니 말리온은 무슨 편지를 읽고 있었다. 화려한 문장이 새겨진 편지지. 본 기억이 있다.
덴판 제국의 황실 편지지다.
-(전략)유명하신 프리스톤 가문의 수장께서 방문하여 주신다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정된 좌석은 28번이오니 꼭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후략)-
새 황제가 즉위하는 즉위식 초대장이구나. 드디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나보네. 갑자가 황제가 죽어서 정변이라도 날까 했는데 다행히 황태자가 무사히 황위를 이었나보네.
그런데 28번이라…내가 한숨을 내쉬려는데 먼저 말리온 경이 발작을 했다.
“28번이라고! 이런 미친!”
쾅
말리온 프리스톤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주먹으로 초대장을 구기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황제와 직계가족, 그리고 공작의 수를 계산할 때 10대 가문의 말석은 23번이다. 그런데 28번이라면 덴판 제국의 황실에서는 이제 프리스톤 가문을 10대 가문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현 대륙 최강의 군사대국인 덴판 제국의 황제인 콜레스 2세는 이런 면에서 냉정하기로 유명했다. 대륙의 파워밸런스에 따라 좌석을 정해주고, 못 받아들이면 오지 말라는 식이다. 비록 그자가 죽었지만 파워밸런스를 분석하는 부서는 그대로 남아있으니 이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문제는 콜레스 2세의 60세 생일에 안 가면 그 손해는 고스란히 프리스톤 가문에 돌아온다는 점이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안 갈수는 없다.
어쨌든 이번 즉위식이 끝나면 프리스톤 가문은 더 이상 10대 마도가문이 아니게 된다. 좌석 순으로 계산하면 15위가 되는 거다.
이렇게 되면 아마 영향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그에 따라 수입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감소할 것이다.
무엇보다 프리스톤 가문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고 원수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10대 가문에서 밀리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몰락할 가능성이 크다.
“으으, 이런 수모를 참아야 하는 건가.”
말리온은 이를 갈면서 손으로 뒷목을 잡았다.
억울해 해도 소용없지. 실제로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금 이 가문의 힘은 그 정도니까. 그렇게 억울해 하기 전에 먼저 힘을 쓰던가 아니면 다른 재능 있는 마법사에게 가주를 넘기던가 해야지.
내가 알기로 분가에 7서클 마법사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말리온 경은 질투심 때문인지 완전히 무시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까지 10대 가문에 남아 있었다는 게 오히려 희한할 정도가 아니겠는가.
마도에 몸을 담은 자가 재능이 아닌 혈연으로 후계를 정하는 시점에서 이미 몰락은 정해진 수순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말리온 경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10대 마도가문은 하나같이 쟁쟁하여 그들이 속한 왕국의 왕보다 더 한 권력을 휘두른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세 가문 중 하나였던 프리스톤 가는 초대 가주인 엘시아 프리스톤 때만 해도 최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엘시아 프리스톤이야말로 그녀의 스승인 나 로엔 프로시안이 만든 마나뱅크를 세상에 퍼뜨린 대마법사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10대 가문에서도 밀려나게 생겼으니 말리온 경은 그야말로 몰락의 비애를 제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는 안 돼.”
말리온은 결단을 내린 듯 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등불을 하나 든 채 방을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