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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64화 (64/250)

로엔의 마나뱅크 64화

5장 프리스톤

드디어 이번 순회 방문의 진정한 목적지인 프리스톤 가문의 차례가 되었다. 그 사이 얼떨결에 찾아낸 덴판 제국의 황제를 사고사 시킨 것은 의외의 큰 수확이었다.

그 사이 이반 경은 틈만 나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고 질문을 해 댔다. 그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당연히 나는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니,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지금 포트라와 좀 얽힌 게 있다고 해도 그녀석이 저지른 비리를 다른 마법사에게 말해줄 수는 없잖아.

“나중에 9서클 뚫으면 아마 저절로 알게 될 거에요.”

모든 진실은 9서클 너머에 있다. 나는 엄숙한 어조로 말했고, 이반 경은 거의 입속에 맴도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놈의 9서클…….”

더럽고 치사하지? 억울하면 뚫으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맨날 약 올리기만 하면 안 되겠지? 이제 슬슬 또 한 가지 숙제를 낼 때가 된 것 같네.

“마리야. 이리 와.”

“예, 렌 경.”

언제나 내 뒤쪽에 묵묵히 서서 나를 보호하는 마리포즈는 나의 부름에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와 이반 경 앞에 섰다.

“이반 경, 얘가 인간이 아닌 건 알죠?”

“인공자아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지금부터 마리에게 백마법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세요. 그러니까 마나뱅크에 마나를 넣는다는 느낌으로요.”

“그녀도 뱅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미리 말해두는데 마리에게 주입한 마나는 이반 경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에요. 그대로 마리 본인의 힘으로 변해 버릴 테니까요.”

“그런, 알겠습니다.”

애써 모은 마나를 저축도 안 하고 그냥 남한테 밀어주라는데 좋아할 마법사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반 경은 잠깐 멈칫했을 뿐 순순히 승낙을 했다.

왜냐고 질문도 하지 않았다.

한 번 승복하고 스승으로 모시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거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는 8서클 마도사다.

백마법 전문인 자라서 그런지 꼬인 구석이 없다.

“마리야.”

“예. 말씀하세요.”

“넌 이반 경이 주입하는 백마법의 기운을 검에 주입해. 그럼 아마 마기를 분쇄하는 데 특화되는 신성검의 효과가 나타날 거야.”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너의 인격 코드에도 백마법의 기운을 조금 반영하도록 해. 아마 성격이 더 부드러워 질 거야.”

“인격 코드를 개방하면 위험합니다만.”

마리포즈는 싫은 표정을 지었다. 자아에 영향을 끼치는 기운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아가 붕괴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성격이 바뀌면 기존의 자아와는 다른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리포즈가 나를 만난 후 처음으로 노골적으로 반항하는 거다. 나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조금 상세하게 설명했다.

“솔직히 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아. 그냥 말하는 인형으로 보이지. 그 이유는 널 만든 네 아버지가 인간이 아닌 같은 인공자아이기 때문이야.”

“......”

“백마법의 기운은 인격의 변화시키는 힘이 있지만 그렇다고 급격히 바꾸지는 않아. 아마 네 자아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를 믿고 백마법으로 자아의 개선을 하렴.”

“예.”

마리포즈는 짧게 승낙의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절대명령을 안 내리고 저를 설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넌 내 딸과 같아. 그렇다고 해서 네 책임과 의무를 해제할 생각은 없지만 넌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야.”

“명심하겠습니다.”

마리포즈의 표정이 조금 풍부해졌다. 역시 이렇게 계속 대화를 나누며 감정 교류를 해야 학습을 하는 구나.

백마법의 기운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확실하게 감성 형성 교육을 해야겠다.

내가 그렇게 결심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이반 경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리 경은 언제 봐도 대단한 인공자아로군요. 그녀의 능력은 그렇다 치고 감정이 이 정도로 인간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백마법을 주입하면서 이반 경은 마리와 많은 대화를 나누세요. 그 후에는 간단한 인공자아 제조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이것은 9서클의 길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영역이지만 알고 보면 아주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8서클로는 대단한 자아는 못 만들 테지만 이반 경은 지금까지 이쪽 부분에 대한 공부가 너무 안 되어 있어서 제대로 교육과 실습을 시켜줄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반 경은 마리포즈에게 백마법의 기운을 학습비로 내고 인공자아에 대한 관찰 기회를 얻은 거다.

“그런데 프리스톤 가문에서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반 경이 화제를 바꿔 물었다.

그곳이 마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99%다. 그렇다면 그 증거를 어떻게 찾아낼 것이며 그걸로 무슨 일을 벌일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프리스톤 가문이 아직 10대 마도가문에 끼는 거죠?”

“올해까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3년 안으로 밀릴 거라는 게 거의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예측하는 부분입니다.”

“3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군요. 10대 마도가문이 마족의 계약자라고 하면 일이 커질 거에요.”

“저도 동의합니다.”

세상이 참 묘한 게 1등과 2등이 그렇듯 10등과 11등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10대 마도가문에 들면 대륙 경영 회의에 참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0등과 11등은 순위가 바뀌기 힘든 법인데, 이처럼 프리스톤 가문이 밀릴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상황이라면 밀리는 순간 11등이 아니라 15등 이하로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는 가문 전체를 날려도 그러려니 할 거다. 새로운 마족의 계약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어쨌든 프리스톤 가문이 큰 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은 프리스톤 가문을 지키면서 일을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든 따로 신경을 쓰지 않고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엘시아의 가문. 엘시아가 죽은 후 급속도로 몰락하는 이유는 현 가주가 엘시아의 손자이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엘시아는 세 번 결혼을 했고, 그 사이에 아이를 여럿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아이들은 모두 제대로 성장하기 전에 죽었고 유일한 손자가 후대를 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 또 다른 암울한 소문이 있다.

원래 엘시아의 아이들은 단 한명도 마법사의 재능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엘시아는 아이들을 모두 일찍 결혼 시켰는데 이번에는 아예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고, 딱 한 명 얻은 손자 역시 마법사의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부자가 모두 마법사의 재능을 가지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문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아니면 양자를 들이던가.

그러나 엘시아는 꼭 친아들이나 친손자가 이대 가주가 되기를 원했고 결국 그녀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인위적으로 마법적 재능을 깨우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그 실험에 견디지 못하고 아들딸이 모두 죽고, 마지막으로 손자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현 가주는 어렸을 때 마법사의 재능이 없다가 갑자기 발현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고 있다.

헛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나는 마법사의 재능이 없어도 마법사를 만드는 방법을 안다.

환생을 했을 때 재능이 없어도 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미리 연구를 끝낸 것이다.

다행히도 재능이 있어서 쉽게 오늘의 내가 되었지만 프리스톤 가문에서는 그런 행운이 없었고, 결국 비인간적인 큰 희생의 결과로 현재 가주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마법사의 재능을 얻고, 그 위에 엄청난 집중 투자로 교육을 시켰다고 해도 엘시아의 손자는 6서클에서 머물렀다. 원래 대부분 인위적으로 오를 수 있는 한계는 5서클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엘시아는 나름 한계를 돌파한 것이다.

그러나 7서클은 무리였고, 결국 프리스톤 가문은 10대 가문 중 유일하게 6서클이 가주를 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현 가주가 새로운 계약자일까? 엘시아의 손자라…….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스승을 죽이고 마족과 계약해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악녀. 그러나 이상하게 엘시아는 아직까지 내 마음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애증의 대상이다. 어쩌면 미련일지도 모르지.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어서 이반 경에게 말했다.

“가서 보면 알겠죠. 만약 가문 전체에 마기가 퍼져 있으면 어쩔 수 없고, 그렇지 않으면 가능한 한 조용히 계약자만 정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봐요.”

“알겠습니다. 암살도 꼭 나쁜 행위라고는 볼 수 없지요.”

황제도 제거했는데 10대 가문 말석의 가주 정도야 뭐.

우리는 새삼 의지를 다지며 마차를 몰았다.

*

드디어 프리스톤 가문에 도착하니 가주인 말리온 프리스톤이 직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말리온 프리스톤에게서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행이네. 가문 전체가 흔들릴 일은 없겠구나.’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생각하니 가능하면 그녀의 가문을 부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말리온 가주의 안내로 마탑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탑 내부에도 마기는 전혀 없었다.

‘설마 잘 못 집은 걸까? 아니야 전후 사정을 보면 틀림없이 이곳에 마족의 계약자가 있어.’

나는 일단 주변에 쳐진 경계 마법들을 체크했다. 프리스톤 가문의 경계 마법들은 체프코트 가문이 그것에 비해 오히려 대단한 수준이었는데 아마 엘시아가 생전에 설치한 것이리라.

잘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 엘시아가 설치한 경계 마법은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고? 난 엘시아의 스승이기 때문에 그녀의 진명을 알 수 있거든.

진명을 알면 경계 마법을 발동시키지 않고 통과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심지어는 경계 마법의 발동 조건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다.

‘오늘 밤에 뿌우를 시켜 탑 내부를 샅샅이 뒤지게 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는 지금은 마음 편하게 구경만 하기로 했다. 중요한 회담은 이반 경이 직접 알아서 진행할 것인데, 말리온 프리스톤은 8서클인 이반 경 앞에 정신적으로 압도당해 거의 주눅이 든 상태로 보였다.

그래도 10대 마도가문의 가주인데 정도 이상으로 주눅이 드는 것을 보니 좀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다.

어쩔 수 없지. 서클의 한계는 명확한 거니까.

나는 신경을 끊고 조용히 앉아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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