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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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된 나는 뿌우를 불러냈다. 내 침실 안에는 어떤 감지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한 후다. 과연 황제, 매너는 있단 말이야.
“불렀냥.”
“포트라한테 좀 다녀와라.”
“사장님 면담은 좀 힘든뎅, 그 양반 누가 오면 일단 한 대 치고 시작한당.”
“나도 갸 성격 잘 알아. 근데 이건 어쩔 수 없어.”
“알았당. 가야 한다면 가야징. 가서 뭐라 할깡.”
“지금 우리 좌표 근처에 있는 아공간 주머니의 인식번호 좀 알려달라고 해. 하급 말고 특상급만.”
“알았당.”
슉
뿌우는 연기가 사라지듯 꺼져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한쪽 눈이 시퍼렇게 변해서 다시 나타났다.
“사장님 지금 기분 안 좋당.”
“에고, 포트라한테 뭔 일 있데?”
“너무 아무 일도 없어서 심심하다고 기분 나쁘단당. 제깅, 세상에서 제일 흉포한 건 심심한 정령왕이당.”
“크큿, 반론의 여지가 없네. 그래서 알아는 왔어?”
“모두 열 개당. 인식번호는 ......”
정령어로 이루어진 인식번호는 보통 사람이 들으면 돌고래 우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나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나는 열개나 되는 특상급 아공간 주머니의 인식코드를 모두 외웠다. 인간인 나는 상급 정령어를 문자로 쓸 수 없지만 이렇게 기억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정령왕의 계약자였기 때문에 기억 체계 자체가 인간의 한계를 어느 정도 뛰어넘은 것이다.
“다 외웠어. 수고했다. 근데 그 눈에 멍든 거 안 없어지냐?”
원래 멍이라는 게 피가 흐르는 동물에게만 생기는 건데 정령인 뿌우가 저러고 있으니 불쌍하다기 보다는 좀 웃긴다.
“못 없앤당. 사장님 심심해지면 정령왕의 권능을 이상한 데 쓰는데, 그때 주먹으로 맞으면 한참동안 이렇게 된당.”
“진짜 미안, 그거 내가 옛날에 포트라랑 싸울 때 궁극 마법으로 쓴 수법이야.”
“그게 뭔 소리냥?”
“그러니까 포트라 눈에 궁극 마법으로 멍자국을 만들었거든. 내 전생에 가장 쓸데없이 궁극 마법진을 소모한 사건이지.”
“단지 눈에 파란 자국을 남기기 위해 궁극 마법진을 썼다공!”
“응, 포트라가 자기는 절대 상처도 안 입고 멍도 안 든다고 장담하길래 오기가 나서 한 번 해 봤어. 그때 내가 연구하다 실수로 폭발을 일으켜서 얼굴 전체가 뒤집어 졌었거든.”
정령왕이 세긴 센 게 궁극 마법으로 얼굴에 낙서를 했는데 딱 3일 만에 그걸 풀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나와 20년 동안 말을 안 했었다.
사실 그게 단순히 멍으로 볼 게 아니라 궁극마법으로는 정령왕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 9서클 마법사의 위대함을 증명한 사건이라 우길 만 하다.
어쨌든 그 뒤로 포트라는 내 앞에서는 정령이 인간 같은 생물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는 펴지 않았으니 아주 쓸데없는 궁극마법 사용은 아니었다.
“역시 대마법사란 놈들은 다 미친놈이당.”
“미친 건 나도 동감이야. 그래도 지적으로 미쳐서 꽤 할만 해.”
“소환 계약에 응한 내가 호구당.”
“에이, 지난 몇 년 사이 너 마력이 엄청 세졌는데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냐.”
“하깅, 노 리스크 노 게인이당.”
문자 쓰고 있네. 이놈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인텔리 의식이 있다. 정령왕이 바로 밑에 부릴 정도로 능력 있는 정령이니 당연한 건가?
나는 대충 정리를 하고 다음 날을 위해 잠을 청했다. 그 뒤로 우리는 연회의 마지막 날까지 조신하게 즐겼다.
드디어 연회의 마지막 날이 되고, 황제가 직접 연회 시작을 알리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귀족들이 황제를 보고 있었고, 최고 등급의 근위기사 백여 명과 아론 경이 가려 뽑은 마법사 열 명이 지키고 있는 상황이라 암살 같은 것은 시도할 엄두도 못 낼 분위기였다.
나는 황제와 주변 사람들과의 거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은 근위 기사 네 명, 그들은 마법의 전신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그 이외에는 모든 귀족들이 황제를 볼 수 있도록 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딱 내가 예상한 거리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나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주문을 시전했다.
마법 감지 장치가 쳐져 있는 연회장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시동어다. 마법을 모르는 사람도 발동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단지 시동어가 정령어라 원래는 인간의 성대기관으로는 발음 자체가 안 된다.
“아공간의 관리자 로엔 프로시안의 이름으로 명한다. 아공간 주머니여. 네가 담고 있는 모든 물품을 반환하라.”
반환 청구 주문! 이 주문만 알고 있다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간 물건이 뭔지 몰라도 모두 꺼낼 수 있다.
정령계의 공정거래 규약에 따라 모든 아공간 주머니에 설치된 일종의 소비자 보호 장치지만 사악한 포트라는 주문을 정령어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걸 관리하고 보호하는 마법진은 내가 새겼는데 그 부분도 9서클 현혹 마법으로 조작이 되어 있어 9서클이 되기 전에는 읽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당연히 읽을 수 있고, 지금 황제가 차고 있는 모든 아공간 주머니에 대고 동시에 반환 청구 주문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 순간 황제의 망토로부터 화악 하고 붉은 불길이 일어났다.
“앗! 폐하!”
근위 기사와 마법사가 놀라 소리쳤다. 황제는 간단하게 연회 개시 선언을 하려다 갑자기 망토 안쪽으로부터 불길이 일어나자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암살 음모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황제의 옷은 결계로브 정도는 아니라도 웬만한 마법이나 물리 공격은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방어 마법이 겹겹이 쳐져 있다.
결계 로브가 마법사만 입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황제가 입었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거의 근접한 수준의 방어력이 있을 거다.
황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놈이 이렇게 기척도 없이 마법을 걸었는지 감탄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황제는 더할 나위 없이 당황했다.
“내 주머니! 주머니가 탄다!”
그렇다. 아공간 주머니가 일제히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아공간 주머니가 큰 손상을 입으면 그 안에 들어간 것은 아공간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황제의 눈에 핏발이 가득 섰다. 이게 어떻게 모은 것들인데! 하는 눈빛이었다.
“어서 불을 꺼라!”
황제는 목청이 찢어져라 외치며 아공간 주머니를 떼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한계에 달한 아공간 주머니가 퍽 하고 터졌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안에 든 물품들이 사라지지 않고 나타났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창고 수십 개 분량의 아티팩트가 일제히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공간의 일그러짐이 일어나며 주머니 사이즈로부터 창고 사이즈로 순식간에 퍼져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확장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강력한 힘으로 외부로 밀어내는데, 이건 공성추에 두들겨 맞는 것보다 수십 배 더 강력한 힘이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밀려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부딪쳐서 파괴되어 버린다.
지금 그 현상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황제는 몸 주변에 열개나 되는 아공간 주머니를 차고 있었고, 그것들이 일제히 터지며 내용물을 토해내는 바람에 공간 폭발 현상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형태가 되었다.
그야말로 한 가운데에 끼어버려 튕기려 해도 튕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진짜 많다. 아직도 부풀어 오르네. 아티팩트 중 내구력이 약한 것들은 위에 쌓인 물품들의 무게로 인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다.
황제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황제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라고 봐야 한다. 드래곤도 힘들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이보다 더 강한 파괴력을 내는 폭발은 아마 없을 것 같은데.
한 마디로 황제는 아티팩트에 깔려 죽은 셈이다. 깔려 죽기 전에 찌부러져 죽은 거지만.
대전 안이 아티팩트로 가득 찼다. 가까이에 있던 기둥 몇 개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고, 천장이 무너지다가 쌓여 있는 아티팩트에 걸려 붕괴를 멈췄다.
이걸 진짜 평생 들고 다녔다는 건가? 이 정도면 제국을 통째로 사도되겠다.
나는 난생 처음 보는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러다가 자신의 주변까지 아티팩트의 파도가 밀려오면 화들짝 놀라서 피하는 것이다.
“으아, 어서 피해!”
바로 앞 사람까지 비명을 지르며 연회장 입구를 향해 달리자 나도 이반 경과 함께 그자의 뒤를 따랐다. 입구는 서로 먼저 나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막혀 있었는데 이반 경이 손을 한 번 휘젓자 모두들 미꾸라지처럼 입구에 걸리지 않고 막 밀려 나가게 되었다.
“오, 그리스 마법을 이럴 때 쓰니 좋군요.”
역시 마법은 응용력이다. 마찰 계수를 0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그리스 마법을 범위로 사람들 몸에 걸어주니 서로 부딪쳐도 그냥 미끄러질 뿐, 뒤에서 미는 압력에 의해 물이 흐르듯 입구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빠져나와 황궁의 외곽에서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이것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일대 재난이라 귀족들은 그저 한숨만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구구구궁
연회장이 있는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티팩트에 밀려 파괴된 기둥이 너무 많았나보다.
우리는 건물의 잔해와 함께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보물을 구경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누구도 그걸 주우러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론 경은 하늘로 날아 피했는지 허공에 떠 있다가 겨우 사태가 진정되자 서서히 밑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일단 모두 귀가하여 대기해 주시오.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근일 내로 진상조사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상조사고 뭐고, 상황 끝났거든.
나는 순순히 위병들이 인도하는 대로 마차에 타고 인근에 있는 다른 숙소로 옮겼다.
그리고 며칠 후, 드디어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황제는 너무나도 많은 아티팩트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두었고, 그 결과 한계 상황을 버티지 못한 아공간 주머니 중 하나가 내부 붕괴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들 역시 근처의 아공간이 붕괴하는 파동에 연쇄반응을 보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체프코트 가문의 마법사들이 아공간 주머니의 조각들을 분석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나의 감상평은 간단하다.
“소설 쓰고 있네.”
애들이 모르면 모른다고 하지.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아는 척을 해요. 간주된다가 뭐냐. 그냥 상상된다라고 하지.
어쨌든 그 뒤에 있는 피해 보고를 보며 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 서거. 시체를 완전 분해되어 찾지 못했지만 마법사들이 아티팩트에 묻은 피를 분석한 결과 황제의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암살이 아닌 사고사다. 황제의 소유욕이 화를 불렀다.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
“그래, 자기가 평생 모은 재물에 낑겨 죽었으니 여한은 없을 거야.”
난 적에게 동정하는 취미는 없다. 어쨌든 깔끔하게 임무를 완수했으니 제국에 닥쳐 올 후폭풍은 가볍게 무시하고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애초의 계획과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세리아 공주가 우리와 같이 떠나지 못한 것이다. 부친상을 당했으니 데빌 베인 활동이나 혼약 문제를 거론할 때가 아닌 것이다.
나중에 인연이 있으면 다시 보겠지. 사실 안 만나는 게 나을 거 같다. 아무래도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할 거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