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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62화 (62/250)

로엔의 마나뱅크 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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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먼저 퇴장했던 황제는 나와 세리아 공주를 후궁 쪽으로 불렀다. 이반 경은 빼 놓고 우리 둘 만 오라는 걸 보면 아까 공주가 말한 아티팩트 문제인 것 같다.

나는 후궁 쪽으로 들어가 일단 주변을 살폈다.

역시 후궁 쪽에는 곳곳에 마기의 흔적이 있는데 후궁의 몇몇 사람은 이미 마기에 오염되어 있는 듯 가라앉은 눈동자 안쪽으로 광기의 감정이 느껴졌다. 강력한 세뇌에 의해 사이비 종교의 광신도처럼 황제의 충성심이 극에 달하도록 조작된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게 후궁 전체가 마기에 물들지는 않았다는 거다. 이걸 보면 콜레스 2세는 마족과 계약한 것을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숨겨왔을 가능성이 크다.

‘다행이네.’

적어도 황제가 대놓고 암흑제국을 선포하거나 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방은 평소 집무실로 쓰는 방인 듯 벽에 장식된 책장에 실무에 관계된 자료가 잔뜩 꽂혀 있었다. 황제가 적어도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라 아직까지 열정적으로 친히 정무를 보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왔는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사적인 자리이니 어렵게 생각할 거 없네. 이리 오게.”

“예.”

나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콜레스 2세에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그의 몸속에 마기가 나를 삼킬 듯이 꿈틀 거리는 게 보여서 당장이라도 지팡이의 창날을 뽑아 냅다 찌르고 싶지만 겉으로는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게 참았다.

마기가 위협적으로 꿈틀 거리는 것은 황제가 나를 경계한다는 증거이리라. 나는 마족의 계약자를 제거하겠다는 데빌 베인이니 그가 적의를 품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리고 혹시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아티팩트를 핑계로 나를 부른 거군.’

이반 경 정도라면 어쩌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나를 불러 허실을 탐색하려 하는 거다.

이반 경 정도라면 남이 속마음을 읽어내기 어렵지만 아직 어린 나라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정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미안하다 황제. 차라리 이반 경을 불렀으면 만의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있겠지만 내 속마음을 읽어내기엔 자넨 너무 젊거든. 아직 100년도 못 산 사람이 전 후생 합쳐서 166년을 산 대마법사와 눈치싸움을 해서 이길 수는 없지 않겠어?

나는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고 오직 황송한 소년 마법사의 태도를 완벽하게 해 냈다. 연기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내 마음속 정보의 일부분을 제거한 체 행동하는 것이다.

어차피 지금 내가 황제의 진면목을 아는 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니까 기억 제어라는 마인드 콘트롤 수법을 썼다.

황제는 내 태도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름 날카로운 안목으로 괜찮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세리아가 말을 했겠지만 딸을 부탁하는 짐의 마음을 받아주기 바라네. 세리아와 같이 쓸 수 있는 아티팩트를 원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폐하.”

“흠, 그렇다면 이게 좋겠군.”

황제는 한 손을 자신의 망토 안으로 넣어 하나의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라기보다는 거의 배낭에 가까운 크기였는데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주머니였다.

아공간 주머니!

틀림없다. 저것은 나와 포트라가 제작한 아공간 주머니 중 하나로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성능이 좋은 몇 개 중 하나다. 허용량이 거대한 창고 두세 개에 맞먹는 특상급 아공간 주머니.

‘아끼는 아티팩트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항상 들고 다니는 건가?’

눈치를 보니 그런 것 같다. 황제는 주머니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냈다. 한 쌍의 반지, 한 쌍의 팔찌, 한 쌍의 단검. 그러다가 한 쌍의 귀걸이를 꺼내더니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하지. 둘이 한 개씩 끼도록 해라.”

이 인간이! 줄 게 없어서 귀걸이를 한 짝씩 끼라고 주는 거야?

이 귀걸이가 앞에 나온 것보다 특별히 좋은 거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날카로운 안목으로 판단하건데 이건 황제가 꺼낸 물건 중에서도 가장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훌륭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다른 것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황제가 앞에 다른 물건들을 꺼낼 때의 표정에서 엿볼 수 있는 감정은 바로 아까움이었다.

‘이 좀생이 같은 영감탱이가!’

황제는 구두쇠였다.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지만 확실하다. 세상에 사윗감에게 주는 선물을 아깝다고 격을 낮추다니. 처음 꺼낸 반지를 그냥 쿨 하게 주는 게 맞잖아. 아니면 화끈하게 세 번째 꺼낸 단검을 주던가. 저게 제일 좋아 보이는데.

“이걸 한 짝씩 끼면 상대의 감정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는 효과가 있지. 남녀가 서로 같이 지내다보면 서로 겉과는 다른 감정이 생길 수 있으니 알아서 잘 배려하라는 의미다.”

어떻게 보면 나름 적절한 선물인 것 같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감사히 받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욕을 했다.

무엇보다 황제가 내린 거라 앞으로 당분간은 한쪽 귀에 이걸 끼고 다녀야 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귀걸이에는 별다른 수작을 걸지 않았다. 그냥 즉흥적으로 준 거다.

세리아 공주는 마음에 드는 든 귀걸이를 받아 왼쪽 귀 위쪽 골에 끼웠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지는 게 아니라 위쪽에 끼우는 모양이라 크게 티 안 나는 종류인 것은 마음에 들었다.

일단 귀걸이를 끼자 귀걸이가 은은히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 진동은 기분이 좋다는 소린가? 나는 즉시 알 수 있었다. 감정을 전달하는 진동이라. 특이하긴 하군.

나는 마나를 제어해 귀걸이에 세리아 공주가 보낸 것과 비슷한 진동을 일으켰다. 아무리 아티팩트라도 나는 조작을 할 수 있다. 감정을 속이는 것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쉽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럼 이만 가 보게. 나는 좀 쉬어야겠군.”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정중히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오려 했다. 그런데 내가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가는 사이 황제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뒤쪽에 있는 침대 쪽으로 가서 누웠다. 옷과 망토를 걸친 채였는데 그 상태로 누워 쉬려는 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문제는 그런 황제의 망토 사이로 언뜻 몇 개의 아공간 주머니가 더 보였다는 거다.

‘잉? 아공간 주머니가 하나가 아니었어?’

무슨 인간이 품속에 아공간 주머니를 몇 개씩 끼고 있는 거지? 하나면 충분하잖아. 그러고 보니 황제의 몸매가 이상했다. 깡마른 체격의 황제가 허리춤 부분은 비만인 것처럼 두툼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망토 안에 매달려 있는 아공간 주머니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럼 도대체 황제는 아공간 주머니를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왜 그렇게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 걸까?

보통 수준도 아니고 최고급 아공간 주머니인데 말이야. 혹시 아공간 주머니 수집이 취미인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연회 첫날이 끝난 밤에 숙소에서 이반 경에게 혹시 이점에 대해 아냐고 물었다.

정말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은 건데 오히려 이반 경은 의외라는 듯이 대답을 해 주었다.

“아하, 아직 모르셨습니까? 덴판 제국의 황궁에는 황궁보물창고가 없이 모든 보물을 황제가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서 잘 때도 끼고 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황궁 보물 전체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요?”

“그렇습니다. 원래는 보물창고가 따로 있었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콜레스 2세가 즉위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그거였답니다. 당시에는 말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합니다.”

“대단하네요. 왕국도 아니고 제국의 황궁보물이라면 질도 양도 장난이 아닐 텐데.”

“보통 제국도 아니고 콜레스 2세의 치하입니다. 세상 보물의 절반 이상이 그자의 품속에 있다는 소문이 있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많을까요?”

“콜레스 2세는 보물이나 마법무구에 대해 대단한 집착을 보여서 그것을 위해 전쟁도 몇 번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주변 왕국에서는 아예 황제가 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아서 진상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륙에서 희귀하다는 물건들은 대부분 황제에게 갔다고 합니다. 나머지 중 대부분은 10대 마도가문이 차지했다고 합니다만.”

“흠, 그런가요? 그렇다면 진짜로 상상을 초월한 양이겠군요.”

특상급 아공간 주머니라면 수레 수십 대분의 양이 들어간다. 무게는 따지지도 않고 말이다. 그걸 몇 개씩이나 써야 할 정도라면 정말 드래곤의 레어 열 개쯤 합친 것만큼 보물이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럴 겁니다. 그나저나 황제가 좀 째째하군요. 기껏 예물로 아티팩트를 준다면서 별 거 아닌 귀걸이 한 짝만 주다니. 그 정도 수준의 아티팩트는 저도 꽤 가지고 있습니다.”

“말도 마세요. 좀 좋은 거 꺼냈다가 아깝다는 표정으로 옆으로 치우는 데 기가 차더라고요. 마족의 계약자 망신은 황제가 다 시키는 거 같아요.”

이반 경이 먼저 말을 꺼내자 나는 같이 황제의 흉을 보았다. 역시 높은 사람 뒷담화는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다. 더군다나 상대가 나쁜 놈이라고 확정이 된 상황이니 전혀 거리낄 것도 없이 욕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아!”

한참 욕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이거 괜찮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황제를 조용히 제거할 방법이 생각났어요.”

“조용히 말입니까?”

“아니다. 조용히는 아닌데 적어도 우리는 의심 받지 않고 처리할 수 있을 거 같네요.”

“그것 다행이군요. 솔직히 렌 경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상당히 곤란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반 경은 솔직하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동감이다.

말이 황제 암살이지. 이거 까딱 잘못하면 데빌 베인이고 뭐고 끝장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대충 지금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황제는 우리를 이용해 자신의 경쟁자들을 찾아서 제거할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우리에게 어떤 누명을 씌워서라도 마무리를 하려고 하겠지.

그 후에는 제국의 힘으로 대륙 전체를 정복함으로써 내기에 승리자가 될 속셈일 거다. 내가 황제라면 그렇게 일을 처리할 테니 거의 틀림없다.

그런데 우린 이런 예측을 해도 황제를 상대로 손을 쓰기가 참 어렵다.

대놓고 나쁜 놈으로 몰아도 안 되고, 암살도 힘들고.

그러나 이제는 방법이 생겼다. 아주 확실하고 쉬운 방법이.

“좋아요. 연회 마지막 날 황제를 제거하기로 해요.”

“사전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렉스와 서피를 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냥 계셔도 되요. 이번에는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요. 혹시라도 뜬금없이 의심받지 않도록 평소 언행에 주의를 기울이며 연회를 즐기면 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기대되는군요.”

“탐욕의 무게라고 할까요? 내가 손을 쓰기는 하지만 황제는 자기 욕심 때문에 죽을 겁니다.”

나는 의미심장한 말로 이반 경의 호기심을 더욱 키워놓고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알아서 궁리해 보시고 혹시 좋은 생각이 나면 나한테 물어보라고요. 그렇게 자꾸 방법을 생각하는 습관이 들어야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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