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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59화 (59/250)

로엔의 마나뱅크 59화

체프코트, 졸탄, 덴판

체프코트 가문에서 나한테 혼담을 건 대상은 사라히스라는 이름이었는데, 내가 사라진 직후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왕국으로 갔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졸탄 경의 안내를 받으며 체프코트 가문에 들어서니 이반 경과 거의 비슷한 마나를 소유한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척 보기만 해도 체프코트 가문의 가주인 8서클 마도사 아론 체프코트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세다.

‘과연, 현재 최강의 마법사라 할 만 하네.’

납득이 간다. 이반 경만해도 대단히 훌륭하지만 아론 경에게는 조금 다른 힘이 느껴진다. 품격의 포스랄까? 최고의 가문을 대표하는 자의 위엄이 전신에서 은은히 퍼져 나오는데, 이게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 물리력처럼 구체화 된 힘으로 작용한다.

의지가 물리력을 발하는 수준이라면 거의 9서클의 문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반 경도 그 힘을 느끼는지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졸탄 경과 아론 경 옆에 서 있는 몇몇의 마도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그들에 맞추어 숨을 멈추고 얼굴에 핏기를 지우며 말했다.

“두 분이 힘쓰실 거면 저는 밖에 있어도 될까요?”

그러자 아론 경은 나를 보며 큰 소리로 웃었고 웃음소리와 함께 기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푸하하하, 네가 렌이냐? 과연 맹랑한 꼬마군.”

저기, 내가 좀 어리긴 해도 꼬마라 불릴 나이는 아니거든. 당신네가 혼담을 넣은 게 3년 전이라고.

속으로는 좀 투덜댔지만 나는 예의를 지켜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콘돌스핀 가문의 마법사 렌 브로스마이어입니다.”

“내가 바로 아론 체프코트다. 이반 경, 20년 만이군. 우리 가문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고 잠적하더니 마족을 찾아다니고 있었나?”

이 인간, 모든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습관이 있군. 하긴, 생각해보면 내가 전생에 그랬지. 10대 마도가문의 대표면 현존하는 최강의 존재이자 실질적인 대륙의 주인인 셈이니까.

표면적으로 대륙에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존재라면 덴판 제국의 황제일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는 눈앞에 이 아론 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이반 경이 실력으로 유일하게 아론 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이고.

이반 경은 살짝 손을 들어 동급 마도사끼리의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정령에 대한 지식을 한 가문이 독점하는 것을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경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겁이 없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혼자 정령의 지식을 찾아내고 8서클에 오른 그대의 재능과 집념을 존중하겠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찾아온 이유는 뭔가? 어차피 이 꼬마의 혼담은 구실일 테니 말이야.”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좋네. 원래 외부 마법사에게는 탑 내부를 보여주지 않지만 이미 경지에 오른 자네라면 상관없겠지.”

아항, 마탑 내부에는 정령에 대한 정보가 있나 보군. 이반 경과 같이 안 왔으면 탑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할 뻔 했네.

나와 이반 경은 아론 경 일행을 따라 체프코트 가문의 마탑에 들어갔다. 과연 탑의 내부 곳곳에는 정령에 관련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보통 마법사는 봐도 내용을 알 수 없게 숨겨져 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탑의 내부는 후끈할 정도의 열기로 가득치 있었다.

화염의 정령력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환경에서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하면 나중에 정령에 대한 교육을 할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령에 민감한 재질을 가진 마법사라면 저절로 정령력에 눈을 뜨게 될 거고.

하지만 문제는 전체적인 정령력을 강화한 게 아니라 불의 정령력만 활성화 시켰다는 데 있다.

‘이러면 마지막 관문을 뚫기가 열 배는 어려워 질 건데, 후훗.’

나는 속으로 아론 경을 비롯한 체프코트 가문을 비웃었다. 네 예상하건데 체프코트 가문은 거의 매 세대 8서클 마도사를 배출해 낼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9서클 대마법사는 나오기 힘들다. 이런 식으로 특정 정령력만 강화해서 8서클에 오르면 반대되는 정령력, 즉 이 경우는 물의 정령력이 거의 고갈되어 버린다.

이러면 건강에도 문제가 와서 거의 단명을 하게 되고, 9서클을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가령 내가 이런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수련을 했다면 8서클을 뚫은 시점에서 절망을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마나홀을 깨뜨리고 새로 수련을 시작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온 것과 같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포기하는 대신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를 두 배 빠르게 올라온 셈이랄까? 다시 시작하려면 봉우리를 걸어서 내려가야 하는데, 원래 산행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 몸에 무리가 많이 오는 법이다. 그렇게 내려간 상태에서 9서클이라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봉우리를 오를 수는 없다.

나는 아론 체프코트 경의 얼굴을 보았다. 불의 정령력이 몸 안에 가득 차 피부가 말가죽처럼 말라붙어 있었고, 색깔도 짙은 갈색이 되어 있었다. 근엄한 표정이지만 내심에 쌓여 있는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이자는 한계에 달해 절망을 느끼고 있다.

뛰어난 자다. 정말 이런 환경이 아니었다면 언젠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9서클을 뚫었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의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9서클이 될 수 없고, 본인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있다.

‘약간 체념을 한 느낌도 나는군. 그냥 체념한 채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나는 아무도 모를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어 좌절한 현 최강의 마법사 후배에게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아론 경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 한 명의 여성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이는 17, 8세 정도. 아직 어리기는 한데 진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예쁘다. 마법으로 얼굴을 고쳐서 조각상같은 미녀를 만들 수 있다면 저런 얼굴이 나올 것 같다.

크고 시원스러운 눈매는 비취색으로 빛나는데 눈동자 안쪽에는 심연처럼 깊은 느낌이 났다. 머리카락은 약간 짙은 금발이었는데 은색의 티아라를 끼고 있어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그리고 피부는 거의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얀 색이었는데 반면 촉촉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미소 짓는 듯 조용히 다물어진 입술 또한 크지도 작지도 않은데, 핑크색 립스틱을 발라서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느낌이 공존했는데, 드레스 또한 옅은 핑크색이라 전체적으로 화사한 봄의 분위기였다.

아론 경은 나를 보더니 말했다.

“3년 전 혼담은 끝났지만 이번에 새로 혼담이 들어와서 이참에 진행을 해 볼까 한다네. 어떤가? 저 아가씨는?”

“체프코트 가문의 아가씨인가요?”

나는 여성의 눈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아론 경은 내가 그 여성의 미모에 어느 정도 넘어갔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도 자존심이 있지 한 번 깨진 혼담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고 싶지는 않네. 저분은 세리아 공주, 바로 콜레스 2세 폐하의 셋째 자녀분 되시네.”

“덴판 제국의 공주라고요?”

“그렇지. 자네의 재능은 이미 폐하의 귀에 들어갔고, 이반 경과 미스틱 엑스라는 고위 마도사가 만든 조직에 대해서도 깊은 흥미를 보이셨네. 세이라 공주와의 혼담은 데빌 베인 조직에 대한 덴판 제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대한 증표가 될 것이네.”

아 놔, 거절 자체를 못 한다는 소리냐?

제국의 황제가 직접 데빌 베인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면서 그 징표로 친딸까지 내린 것이니 이건 피할 방도가 없다.

아론 경의 눈을 보니 거의 엿 먹어라 하는 눈빛이었다. 아마 이미 내가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선언했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앞쪽 가문과의 회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분석을 했겠지. 그 정도 수완은 당연히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 미친 마법사가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정략적인 혼담을 추진한 것이다.

어떻게 할까?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세리아 공주를 보았다.

세리아 공주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며 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먼저 소개를 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세리아 공주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저는 렌 브로스마이어 자작입니다.”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분이라 들었어요.”

살짝 미소를 짓는데 이건 정말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

‘응? 비인간적으로?’

순간 나는 움찔했다. 내 본능은 전생으로부터 쌓여온 깊은 경험에 기인한다. 사실 내가 아름다운 여성을 못 본 것도 아니고, 전생과 후생을 합해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하필이면 내 정략결혼 상대라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적당한 미녀라면 모를까. 소설도 아니고 하필이면 황제의 딸이 대륙최고의 미녀일 수가 있을까?

‘조작인가!’

그러고 보니 마법으로 얼굴을 고치려 하면 못 고칠 것도 없다. 만약 체프코트 가문이 오랜 시간동안 그 부분을 연구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 이 여자의 미모는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관없다. 어차피 미모는 결과니까.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름답다면 그건 아름다운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앞의 세리아 공주에게 무엇인가 강력한 위화감과 위험을 느꼈다.

뭘까? 나는 잡념을 지우고 냉정한 눈으로 세리아 공주를 보았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그녀를 보려 했다. 그리고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마기다! 세리아 공주의 뱃속에서 마기가 느껴진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일단 체프코트 가문 안으로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 안심을 한 게 이곳에서는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륙 최강의 가문이 마족과 계약을 했다면 일이 힘들어질 것이기에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마기를 발견했다. 10대 마도가문 순회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발견을 한 것이다.

뱃속에 숨겨진 작은 마기는 그냥 눈으로 봐서는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마기는 마기, 아무리 작아도 무시할 수 없다.

나는 다시 세리아 공주의 표정과 눈빛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했다.

세리아 공주 자체는 그다지 사악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세리아 공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기가 심어진 것이다.

그리고 저 위치라면 짐작하는 게 있다. 아마 저 마기는 세리아 공주에게는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임신을 해서 아이를 가진다면 마기는 아이의 몸속에 침투해 들어갈 것이다. 마기가 존재하는 위치가 그렇다.

그럴 경우 세리아 공주가 낳는 아이는 사람이 아닌 반마족과 비슷한 존재가 된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평범한 인간이겠지만 이미 몸 내부는 마기에 젖어 더불어 성장하는 마인이라 할까?

그러면 결국 그 아이는 마기를 심은 자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누구지? 나를 강제로 결혼시켜 내 아이를 마인으로 만들려는 자는!

나는 지금까지 마족과의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 하는 내용을 혼담을 거절하는 도구로 썼다. 그런데 지금 그 위험 중 하나가 현실로 내 앞에 나타났다.

‘그래,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온다는 거군.’

걸어온 싸움은 받아쳐야 한다.

나는 세리아 공주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했다.

“세리아 공주님, 저와 혼약을 하려면 우선 데빌 베인에 가입을 하셔야 합니다. 그럴 경우 마족과의 싸움을 공주님의 조국인 제국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맹세를 하셔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세리아 공주는 그 말을 나의 청혼으로 들었는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이미 들었어요. 저 세리아 폰 콜레스 덴판은 데빌 베인의 숭고한 목적을 조국 덴판과 제 친인들의 이익보다 우선할 것을 맹세해요.”

미리 준비를 단단히 했군. 나는 아론 경과 이반 경을 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황제 폐하와 세리아 공주의 호의는 거절할 수가 없군요. 이 혼담을 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하지만 결혼은 데빌 베인의 활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본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따로 회담을 할 필요가 없게 됐군. 둘이 맺어지기로 했으니 우리 체프코트 가문에서도 덴판 제국과 더불어 데빌 베인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겠네.”

아론 경은 자신의 뜻대로 된 것이 기쁜 듯 크게 웃었다. 이반 경은 내가 결정했으니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으로 나 렌 브로스마이어는 정식으로 혼약을 해 버렸다. 꿈 많은 청춘이여. 진짜 너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두고 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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