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8화
모벨룸 가문에서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 인상만 봐도 나쁜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동식물에 대한 연구를 주력으로 하는 가문답게 조금 목가적인 느낌이랄까?
메린스 양도 어린 나이에 비해 침착한 성격이라 대하는 데 크게 부담이 안 되었고, 전체적으로 마음에 드는 가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갈 곳은 티팔 가문, 이곳은 10대 마도가문 중 전투력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워메이지 가문이다. 세 개의 왕국에 지속적으로 워메이지를 공급하는 가문으로 소속된 모든 마법사에게 의무적으로 군입대를 시키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주력 연구도 대량 살상과 단체 강화, 단체 회복 등 혼자서 싸우는 것보다 군대에 소속되었을 때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티팔 가문에서 나에게 혼담을 넣은 상대는 솔레리스라는 여성인데 올해로 22살이 된다. 이미 시집을 갔기에 혼담을 거절한다기 보다는 명확한 해답 없이 모습을 감춘 것에 대한 사과와 데빌 베인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게 대외적인 주요 목적이다.
티팔 가문에 도착하니 장로급 세 명과 함께 한 명의 여기사가 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여기사가 바로 솔레리스라고 했다.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이왕 오셨으니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솔레리스 양은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 뒤에 서 있는 마리포즈를 보고 크게 호기심이 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위기사이신 듯한데 여성분이군요. 저 말고 여기사를 보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눈빛이 야릇한 것이 뭔가 오해를 하는 거 같다. 보통 여기사는 공주를 호위하기 위해 특별히 교육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남자인 내가 데리고 다니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떻게 오해를 하든 큰 상관은 없지만 좀 노골적인 시선으로 보니 기분은 좋지 않네.
우리는 같이 티팔 가문 안으로 들어갔고, 전과 마찬가지로 이반 경은 티팔 가문의 가주를 비롯하여 주요 인물들과 회의에 들어갔다. 나는 간단한 인사만 하고 회의장 밖으로 나와 솔레리스 양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나에게 마탑 내부를 안내할 생각은 안 하고 그냥 복도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눈치를 보니 마탑 안에서 지낸 적이 없어 그녀자신도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솔레리스 양께서는 마도가문 소속이면서도 기사가 되셨군요.”
내가 먼저 이야기를 걸자 솔레리스 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 마법사의 재능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냥 집에 있다가 시키는 대로 시집을 가기는 싫었어요.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싶었죠.”
“그래도 기사의 길을 가시다니, 스스로 결정하신 건가요?”
“그래요. 아시다시피 우리 가문은 군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어렸을 때 자주 놀러가던 기사단의 아이들과 칼싸움을 했는데, 엔리케 기사단장님이 저를 보고 검에 재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련을 했지요.”
“힘들어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수련하는 보람이 있었겠네요.”
“맞아요. 부모님은 제가 마법사의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낙담하셨고, 전 그게 슬펐어요. 집에 아이는 저 혼자였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기사가 되어서 나름 부모님도 인정해 주시고 계셔요.”
미소를 짓는 솔레리스 양의 표정에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재의 자신감이 같이 드러나 있었다. 보기에 나쁘지 않다.
“사실 그래서 렌 경에게 흥미가 많이 갔어요. 3년 전 렌 경의 재능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대단했거든요. 나는 없는 마법사의 재능이 그토록 뛰어난 분이라면 시집을 가도 된다고 생각했었지요. 호호호.”
“저런, 말도 없이 도망가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한 게 그 당시 저는 사귀던 사람이 있었어요. 지금 남편인 울프 경이에요.”
“아!”
“물론 그때는 울프 경과 그렇게까지 진지한 사이는 아니었고 그냥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는데 렌 경이 사라지신 후 급속도로 가까워졌네요. 지금은 기사단 내에서 같이 연습하면서 지내는 데 이게 제가 원하는 생활인 것 같아요.”
“원하시던 삶을 찾으셨다니 잘 됐네요.”
“마법사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마법사는 천 명 중 한 명이 될까 말까 하는 거니까요. 기본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부분이고…….”
“그러게요. 반대로 저처럼 전혀 생각이 없었다가 우연히 스승님의 눈에 뜨여 되는 경우도 있고요.”
파우스 스승님의 눈에 안 뜨였어도 난 마법사가 되었겠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행운아 시골 양치기 소년이 바로 나다.
솔레리스는 내 말에 다시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은 뜻대로 안 되는 법이다. 특히 마법에 대한 재능은 정말 뜬금없는 경우라, 유전적 성질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고위마법사의 자식들이라도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마도 가문이 혈연보다는 사승관계로 이어지는 이유다.
일단 재능만 가지고 태어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교육을 시켜 5서클까지는 가능하고, 잘 하면 6서클도 될 수 있을 정도로 마도 교육이 발전하긴 했지만 안 되는 건 아예 안 된다.
어쨌든 솔레리스 양은 이미 남의 부인이라 대하기도 편했고, 나이도 22살이라 어린 애 느낌은 안 났다. 그리고 내가 창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자 크게 관심을 보여서 그녀가 수련한 세검술에 대해 말하면서 찌르는 공격법이 창술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토론을 했다.
여기서도 역시 여자가 잘 아는 전문 분야가 있었고, 나 역시 그 부분에 관심이 있어 공통된 화제가 형성된 셈이다.
조금 특이한 것은 남녀 사이의 대화이면서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거나 쇳가루가 풀풀 날리는 그런 딱딱한 무기와 군대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솔레리스와 대화하면서 배운 것은 세상에 여성들도 참 여러 가지 타입이 있다는 거다.
“오늘 즐거웠어요. 렌 경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시기를 기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솔레리스 양의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이건 약소하지만 사과의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나는 역시 마지막으로 선물을 건넸다. 솔레리스 양은 거절하지 않았고, 다음에 인연이 되면 남편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티팔 가문의 귀빈실에서 쉬게 된 나는 뿌우를 불러 복습을 했다.
“대화가 중요해. 자꾸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대충은 감이 오는 거 같더라.”
“뿌우, 아주 좋당. 앞으로 8명의 여자들을 더 만날 수 있으니 잘 해 봐랑. 그런데 아직도 네 나이대의 소녀가 애기로 보이는 거냥?”
“그건 아직 그래. 나도 노력해 보는데 쉽지 않네.”
“전에 보았던 메틸렌 양도 그랬냥?”
“응, 착하고 순수한 애로 보였지.”
“중증이당. 아주 심각하당.”
“그래도 이제 20대 초반까지는 괜찮을 것 같아.”
“예쁘고 정상적인 여자가 20대 초반까지 결혼도 안 하고 남아 있을 것 같냥? 차라리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심정으로 하나 골라랑.”
“어휴, 몇 년간 난 상대가 애로 보이는데 저쪽은 날 남자로 보는 관계를 유지하라고?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그냥 실비아 공주랑 해랑. 상황 상 실비아 공주보다 더 좋은 상대는 나오기 힘들당.”
“그런가?”
나는 뿌우의 조언에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아무리 왕국의 상황이 그랬다고 해도 공주 쯤 되는 여자가 20대까지 혼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 전에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어 팔리듯 가야 정상이다. 그런데 내가 애매하게 행방불명되면서 실비아 공주는 3년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대충 눈치를 보면 다른 혼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안 좋은 상대라 실비아 공주가 나를 방패삼아 버틴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실비아 공주는 평생 혼자 살 생각도 했던 것이다.
과연 실비아 공주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좋든 나쁘든 내가 오케이만 하면 그녀는 결혼을 추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녀의 진심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뿌우는 내가 하는 행동 상 실비아 공주가 호감을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심하긴 심했다.
“과거는 넘어가고 이번에 돌아가면 조금 더 잘 해줄 수 있겠지.”
“그래랑. 네 10대 소녀 거부증이 사라지기 전에는 실비아 공주가 유일한 해결책이당.”
“알았어.”
나는 더 이상 뿌우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침대로 들어가 불을 끄고 누웠다. 뿌우는 끌끌 하고 혀를 두어 번 차고는 산책을 나갔다.
*
아침이 되어 이반 경과 나는 티팔 가문을 나와 덴판 제국에 있는 체프코트 가문을 향해 떠났다. 그동안 미스틱 엑스로 뿌우를 통해 서신을 보낸 적은 있지만 직접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현 대륙 최고의 가문, 덴판 제국이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체프코트 가문은 지금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는데 이게 강압적인 수단이 아닌 자연스럽게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만큼 인망을 얻고 있다는 소리인데, 최고가 된 후에도 자만하지 않고 발전을 계속하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은 체프코트 가문의 시대가 계속 될 거라는 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의 예측이다.
그런데 지금 데빌 베인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고, 그 안에 8서클로 추정되는 마법사가 둘이나 있으니 몇몇 사람들은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 데빌 베인과 체프코트 가문의 양강 체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이반 경이 직접 방문을 한다고 하니 체프코트 가문에서는 상당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가 덴판 제국의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관문 앞에서부터 한 명의 마법사가 서 있다가 다가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반 경과 렌 경이시군요. 체프코트 가문의 1급 마법사 졸탄이라고 합니다.”
이반 경은 졸탄 경의 이름을 아는지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며 말했다.
“브릿지 건설자 졸탄 경이시군요. 마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별 말씀을 하십니다. 이반 경께 인정을 받으니 정말 영광이군요.”
브릿지 건설자라는 이명에 나도 기억이 났다. 이 사람은 사물에 마법을 부여하는 인챈터인데 그걸 보석이나 갑옷, 무기 등에 쓰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강이나 개울 등에 설치된 다리에 무상으로 인챈트를 했다고 한다.
졸탄 경의 마법이 부여된 다리는 매우 튼튼해서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거나 부서지지 않아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한다고 했다. 개인의 욕심이나 마도의 추구보다 사람들을 위해 마법을 베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 확실히 훌륭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명성 있는 마법사를 국경에서부터 우리의 인도자로 내세운 것을 보면 체프코트 가문의 성의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졸탄 경과 덴판 제국의 기사들이 이끄는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편안하게 체프코트 가문까지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