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7화
나와 이반 경이 탄 마차는 관도를 따라 10대 마도 가문의 하나인 모벨룸 가문의 마탑을 향해 가고 있었다.
호위 병사들 십여 명과 일꾼들 십여 명이 세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이동하는데 이정도면 최대한 거품을 빼고 간단하게 여행을 하는 셈이다. 원래 마탑의 수장이 다른 마탑을 방문할 때에는 백 명이 넘는 수행원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다.
나는 이반 경과 함께 중앙에 있는 마차에 탔고, 마리포즈가 마부석에서 직접 말을 몰았다. 마차 옆쪽에는 렉스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렉스 때문에 말이 흥분해서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마법을 걸어야 했다.
이반 경은 틈만 나면 명상을 하면서 내면 수련을 하기 때문에 난 그 사이 뿌우 스승님의 강의를 정리한 연애 기초 메뉴얼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의 메뉴얼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부분은 당연해서 쉽게 넘어가지지만 그러다가도 또 전혀 알 수 없는 곳이 나오면 흐름이 막혀 버린다.
“9서클 마법 주문보다 어렵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반 경이 눈을 살짝 뜨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9서클 마법보다 어렵습니까?”
이크, 이 자 앞에서 마법보다 어렵다는 표현을 쓰다니. 나는 뜨끔 해서 얼른 말했다.
“아, 아니에요. 절대적인 의미로 어렵다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마법사가 검술을 익히는 것처럼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그 정도 어렵게 느껴질 학문이라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보여 달라고? 싫어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부분입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메뉴얼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나 이반 경은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 전에는 잠을 못 자는 성격이다. 그는 나에게 다시 질문을 하거나 보여 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명상을 하지 않고 내가 메뉴얼을 집어넣은 품속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반 경의 시선을 외면하고 모른 척 했지만 그것도 한두 시간이지, 반나절이 넘어도 그의 뜨거운 시선은 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반 경에게 물었다.
“이반 경은 카이스난 님과 꿈속에서 만났다고 하셨는데, 그럼 현실에서 연애를 한 경험은 없나요?”
“거의 못 했습니다. 마탑의 수련이 워낙 힘들었고, 그 뒤에는 전쟁터에 끌려 나가 워메이지 생활을 해야 했으니까요.”
이 사람도 나와 거의 동급이구나! 이반 경의 대답에 나는 동지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역시 고위 마법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어쨌든 이반 경이라면 내 고민을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에 나는 품속에 손을 넣어 메뉴얼을 꺼내 건네주려 했다.
그런데 그때, 이반 경이 창문 밖으로 살짝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기껏해야 열 번? 그 중 대부분이 젊은 때의 풋사랑이고 진정한 사랑을 느꼈던 적은 두어 번 정도군요. 영혼까지 사랑한 사람은 카이스난이 유일합니다만.”
이 인간이! 열 번이면 완전 많이 한 거잖아! 뭐가 거의 안 했다는 거야.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 연애를 열 번이나 한 사람이 어딜 감히 대마법사가 되겠다는 건지. 내가 이런 배신자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건가?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고통 받으며 대마법사가 되었던 것인가. 처음이기 때문에, 가장 힘든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던 건가?
나는 또 다시 인생의 깊은 회의를 느끼며 메뉴얼을 다시 품속에 넣었다. 나의 고민은 나만의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다.
뿌우는 나와 계약한 정령이니 사실 상 비밀을 공유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이반 경이 어디를 보든 신경을 끊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벨룸 가문에 마탑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하며 쓸데없는 심력을 낭비했다.
*
역시 이반 경의 명성이 좋긴 좋구나!
모벨룸 가문에서는 가주를 비롯해 장로급 여섯 명이 나와 우리를 환대했다. 그들은 이반 경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나의 기세에 움찔 하면서도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태연하게 웃었고, 이반 경 역시 억지로 상대를 위압할 생각이 아닌지라 최대한 기세를 부드럽게 했다.
우리가 혼담을 거절하러 온 것은 이미 정식으로 전갈을 한 상태지만 모벨룸 가문에서는 일단 상대가 되는 여자를 데리고 나왔다. 장로 중 한 명의 딸이라고 했다.
이름은 멜린스. 올해 16세가 되는데 13세에 청혼을 넣은 뒤 3년간 아직 다른 혼담을 진행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동안의 조사에 의하면 10대 가문에서 혼담을 건 여자 중 7군데는 이미 시집을 갔거나 다른 혼담을 진행 중이다. 그쪽은 조금 마음 편하게 방문을 하면 되는데 이렇게 기다린 쪽은 조금 미안한 감도 없지 않다.
디옴 모벨룸, 그러니까 가문의 가주는 이반 경과 함께 식사를 하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아직 결정된 곳이 없다면 이대로 다시 진행을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아직 미련을 못 버렸구나. 나는 장로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셨다. 하지만 멜린스 양의 시선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멜린스 양은 상당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 듯 자신의 혼담이 거론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에 대해 호기심이 이는 듯 가끔씩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는 했다.
나 역시 멜린스 양에게 반쯤은 의도적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눈이 마주쳤고, 멜린스 양은 화들짝 놀라 더욱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이반 경은 디옴 경과 같이 밀담에 들어가고, 나는 그 사이 멜린스 양과 산책을 하기로 했다. 주변에서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분위기다.
그러나 나는 멜린스 양에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단 아직 어린 아가씨는 애기로 보이고, 뿌우의 말대로 상대측에서 밀면 나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다.
그래도 거절을 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는 멜린스 양이 안내하는 대로 마탑의 뒤쪽 정원에 들어섰다. 원래 외부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이라고 했다.
“특이한 식물이 많군요.”
내가 주변의 풀과 나무들을 보며 말하자 멜린스 양은 그때서야 고개를 들고 말했다.
“식물에 대해서 잘 아세요?”
“예, 스승님께 약제술을 조금 배웠습니다. 저기 있는 삼엽목 같은 것은 잎에 독이 있지만 독성만 제거하면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지요.”
“약제술을 공부하셨군요. 저도 약제술 쪽에 흥미가 있어요.”
얘가 화초를 좋아하는군. 다행이다. 이쪽이라면 같이 대화할 만 하지. 나이 어린 여자애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거든.
나는 대화의 가닥을 잡고 근처에 눈에 뜨이는 식물의 특성과 약제술에 사용되는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멜린스 양도 어느새 긴장이 풀렸는지 자신이 공부한 약제술에 대해 말했다.
상당한 지식이다. 마법보다는 약제술, 특히 식물에 특화된 부분은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그러고 보니 모벨룸 가문은 대지와 동식물에 관련된 마법을 많이 개발한다고 들었다. 마녀나 드루이드들과의 교류도 있다는 소문이다.
“그런데 렌 경께서는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얘가 처음으로 나에게 뭔가를 묻네. 역시 정령은 모든 마법사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상인가. 아니면 여자애의 호기심일까.
“예, 정령공유라는 수법으로 미스틱 엑스 경의 정령을 제가 데리고 다니는 중입니다.”
“데리고 다닌다고요?”
“정령계에서 소환하는 게 아니라 정령에게 집을 주어 그것을 제가 들고 다니는 거지요.”
“정령도 집이 있어요? 처음 알았네요.”
이 정도 지식도 모두 사라진 것을 보면 지난 100년간 정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령술에 대한 지식을 말살시킨 게 틀림없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 지팡이를 살짝 들어보였다.
“대기의 정령 뿌우는 지금 제 지팡이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 보이는 보석이 바로 그의 집이지요.”
“와아, 저, 저기.”
“보여드리죠. 뿌우 소환.”
그냥 불러도 되지만 뭔가 있어 보여야 하기에 나는 지팡이를 휙 뒤집어 마정석 부분을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그러자 지팡이 끝으로부터 뿌우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나타났다.
“뿌우!”
솜사탕처럼 펑퍼짐하게 부푼 뿌우의 몸은 무게감이 전혀 없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게 조금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바람이 뭉쳐 만들어진 모습이랄까?
“불렀냥? 주인.”
“어머, 말을 하네요.”
“말도 하고 생각도 합니다. 좋은 대화 상대이지만 부르고 있으면 마나가 소모되지요.”
내가 설명을 하는 사이 멜린스는 뿌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뿌우는 멜린스를 보며 말했다.
“네 애인이냐? 예쁘넹.”
“에엣, 아, 아니에요.”
멜린스는 당황해서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겨우 풀어졌던 얼굴이 다시 붉어지면서 고개를 푹 숙인다.
뿌우 이 자식, 지팡이 안에서 다 듣고 있었으면서 전혀 몰랐다는 듯 애를 놀리네.
뿌우는 멜린스 주변을 둥둥 떠서 돌아다니며 앞뒤 모습을 모두 관찰하듯 보았다.
“애 괜찮넹. 잘 사겨봐랑. 그럼 뿌우.”
슉
이놈이 가란 말도 안 했는데 들어가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라고.
남겨진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나중에 뿌우를 두들겨 패 주기로 결심하고는 멜린스에게 말했다.
“정령이라 조금 성격이 뜬금없네요. 하하하.”
“......”
정말 이 분위기 어쩔 거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싸가지 없는 정령보다 제 친구인 렉스를 보러 가실래요?”
“렉스라면 같이 온 개 말씀하시는 건가요?”
역시 동물도 좋아하는군. 나는 얼른 걸음을 옮겼고 멜린스는 묵묵히 따라왔다.
위기를 넘기고 다시 렉스의 목털을 쓰다듬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데 성공한 나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을 건네며 지금 마족의 계약자들과의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하며 정중하게 혼담을 거절했다.
그러자 멜린스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괜찮다고 이렇게 직접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대충 이 정도면 잘 수습한 거겠지?
그날 밤, 나는 결심한 대로 뿌우를 소환한 후 지팡이로 냅다 팼다. 그러니까 뿌우는 자기 집으로 두들겨 맞는 셈이다.
“뿌우, 진정해랑. 다 너를 위해 한 일이당.”
“헛소리 말앗. 다음에도 그런 식으로 하면 철상자에 가둬 버릴 테다.”
“그건 안 좋당. 내 몸에 쇠냄새 베면 곤란하당.”
“쇠냄새에 쩔게 만들어줄 테다.”
“알았당. 다음번에는 잘 할 테니 진정해랑. 그나저나 오늘은 잘 했당. 스승으로써 기뻤당.”
나는 지팡이질을 멈췄다. 아무리 화가 나도 스승을 팰 수는 없는 거지.
“괜찮았어?”
“잘 해주려는 티가 나더랑. 그리고 여자애가 뭘 좋아하는 지 찾아서 그쪽으로 화제를 몰아가는 것도 좋았당.”
“역시 그렇지? 그래도 멜린스 양은 식물과 동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서 대화하기 편하더라. 난 화장품이나 의상, 보석 얘기는 전혀 모르니까 말이야.”
“그것도 공부해랑. 연애 하려면 공부가 필요한 거 모르냥? 네가 노력한 만큼 되는 거당.”
“으, 그쪽 공부를 해야 하는 건가.”
“뭐 거기까지 안 해도 큰 문제는 없당. 단지 그것만큼은 명심해랑. 네가 그런 화제를 싫어하듯 여자도 남자만의 화제는 싫어한당.”
“알겠어.”
“이대로 계속 해랑. 내가 보기에 넌 보기보다 머리가 좋아서 여자와 자주 대화만 해도 확 좋아질 것 같당.”
“보기보다 머리가 좋다고? 난 유사이래 최고의 천재 소리 듣던 몸이거든.”
“마법 머리 말고, 연애 머리는 따로 있는 거당.”
“그런가…….”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게 슬프지만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첫 번째 가문에서의 일은 끝났으니 다음번에는 더 잘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