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6화
*
밤이 되었다. 나는 뿌우를 소환하고 잘 준비를 했다.
뿌우가 밤에 산책을 하는 덕분에 혹시 있을 지 모를 암살자로부터 보호받는 셈이다. 이 녀석 말고도 서피와 렉스, 마리포즈가 건물 외곽과 방 안에서 항상 나를 보호하지만 일차 관문인 뿌우가 지닌 정령으로써의 감지능력은 마법과 상극인 부분이 있기에 좋다.
“오늘도 부탁한다.”
나는 뿌우에게 취침 전 인사를 하고 침대로 들어가 누우려 했다. 그런데 여느 때 같으면 소환되자마자 신난다 하고 창문 밖으로 날아갈 녀석이 그냥 서서 나를 지긋이 본다.
“할 말 있어?”
“너 모태솔로징?”
“한 밤중에 뭔 헛소리야!”
나는 짜증이 왈칵 올라와서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오늘 낮에 실비아 공주 몰아붙이는 거 보니 넌 여자를 대하는 기본적 자세가 글러먹은 놈이당.”
“아 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건데?”
“너하고 혼인하겠다고 온 여자를 뜯어먹으려 했잖냥. 그것도 상대 사정 안 봐주고 몰아붙이기로 말이당.”
“공은 공이고 사는 사거든. 아도리아 왕국이 우리 데빌 베인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네 행동이 틀리다는 게 아니당. 단지 그러면 여자를 못 사귄다는 소리징. 그러니까 넌 공사가 분명한 모태솔로당.”
“으.”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난 이 녀석 말대로 전생에도 현생에도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여제자가 유혹하는 거에 넘어가 암살을 당한 게 다다.
헛되이 보낸 청춘을 되찾겠다는 집념으로 9서클을 뚫고 연구실에 환생의 마법진을 설치할 때만 해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하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어떻게 연애를 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법 같은 것은 생각도 한 적이 없다.
막연히 하고 싶다는 느낌뿐, 방법을 모른다. 당연하다 경험이 없으니까.
그러니까...인정하기 싫지만...나 모태솔로 맞다.
백년도 넘은 대륙 최강의 모태솔로. 젠장.
“흐읍.”
나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화를 가라앉히고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마법사다.
그래, 이 뿌우란 놈은 체프코트 가문이 소환한 불의 정령을 유혹한 실력자다. 인정하자. 이쪽 방면으로는 이놈이 나보다 고수다. 아니, 나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 그냥 고수라 생각하자.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뿌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팔로 땅을 집고 고개를 숙였다.
“뿌우 스승님, 저에게 연애를 가르쳐 주십시오.”
“뿌욱! 너 갑자기 왜 이러냥.”
“진지하게 부탁하는 중이다. 내 꿈이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건데, 생각해보니 방법을 전혀 모르겠어. 겸허하게 네 조언을 받아들일 테니 여자 유혹하고 사귀는 법 좀 가르쳐 주라.”
내 평생 남에게 가르침을 요청한 적이 있었던가? 전생에도 어렸을 때 스승님이 그냥 내 재능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셨고, 현생의 스승인 파우스 경도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서 애가 타는 분이다.
그러니까 난 남의 가르침을 거부하거나 싫어한 적은 있어도 이토록 간절하게 원한 적은 없다.
그래, 나 지금 절실히 원한다. 모르면 배워서라도 연애를 해 봐야겠다.
뿌우는 잠시 당황해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진지한 표정을 보고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앞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원래 모태솔로가 연애를 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뎅, 네 갈망이 그토록 크니 한 번 해볼 만 하겠당.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 해주는 것을 잘 들어봐랑.”
“넵, 스승님.”
“우선 가치관을 정확히 해야 한당. 넌 많은 여자랑 놀고 싶은 거냥? 아니면 사랑을 하고 싶은 거냥. 그러니까 플레이보이인지 정상적인 일대일 연애인지부터 정해야 한당.”
“그게 좀 애매하네.”
기본적으로는 플레이보이가 되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다. 하지만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안 되는 거당. 속성을 정확히 해야 대상도 정해지는 법. 딱 정해랑. 참고로 지금 네 신분과 능력이면 플레이보이가 더 쉬울 수 있당.”
“알았어. 일대일 연애로 할게.”
“그럴 줄 알았당. 플레이보이가 되려면 나름 재능과 의욕이 있어야 하는데 넌 어림도 없당.”
“으, 너 이제 보니 상당히 독설가구나.”
“너 정도는 아니당. 그 다음 정해야 하는 것은 선호도당.”
“선호도? 그냥 착하고 어느 정도 예쁘면 되는데...그리고 나이가 좀 많아야 해. 십대 애들은 나에게는 무리야.”
“그런 게 아니당. 감정적으로 넌 너를 좋아하는 여자에 끌리냥? 아니면 너에게 관심 없는 여자에게 끌리냥. 수비관리형 연애와 저격공략형 연애는 내용이 전혀 다르당.”
“미치겠네. 그건 또 뭐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낭. 누가 너를 좋아하면 그것만으로도 감동해서 상대를 좋아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아무런 가치를 못 느껴서 무관심해지는 성격도 있당. 자기가 노려서 상대를 유혹해야 가치가 있다고 느낀달깡.”
“그건 그럴 수 있겠네. 근데 난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안 해봤으니 모르징. 내가 보기에 넌 후자당. 연회에서도 그렇고, 실비아 공주를 대하는 것만 봐도 거의 확실하당. 골치 아픈 성격이징.”
“골치 아플 것까지 있나?”
“네 성격 상 너한테 청혼한 여자는 모두 다 아웃 시킬 거라는 얘기당.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좋아하는 여자는 너의 사랑을 받지 못하겠징. 반대로 너에게 관심이 없는 여자가 네 마음을 차지할테공.”
“듣고 보니 확실히 문제가 좀 있네.”
“그리고 지금 네 신분과 재능, 명성을 볼 때 너에게 무관심한 여자는 거의 없을 거당. 얼굴도 꽤 잘 생긴 편이라 말이징. 그런데도 너한테 무관심할 수 있는 여자는, 아마 선수일 거당.”
“선수?”
“네 성격을 꿰뚫어 보고 역으로 이용해 무관심으로 유혹하는 거당. 그런 고수한테 걸리면 넌 완전히 영혼까지 털릴 거당.”
“젠장, 영혼까지는 안 털렸거든.”
그냥 목숨만 털렸지. 그리고도 이렇게 잊지 못하고 있고.
뿌우의 말투는 기분이 조금 나빴지만 말속에 담긴 진리는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난 깊은 한숨을 쉬고는 다시 뿌우에게 물었다.
“그럼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스승님.”
“먼저 매너를 배워랑. 네 마음이 결정 나기 전에 여자가 먼저 너한테 정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매너가 필수당. 그 다음에는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떨어진 느낌이 안 들게 감정교류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당.”
“그게 가능해?”
“전문용어로 어장관리라고 하는뎅, 애인이 있는데 어장관리하면 플레이보이고 없는데 어장관리하면 정상이당. 없는데 어장관리를 안 하면 그게 바로 모태솔로당.”
“아하, 그렇군.”
뿌우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경험과 지식은 아직 나에게는 없다. 지금은 무조건 배우고 따를 뿐. 몇 번 실전을 경험하면서 실패를 통해 나만의 방식을 만들 때까지는 믿고 가는 거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뎅.”
“뭔데?”“네 나이에 맞는 여자를 사겨랑. 전생의 늙다리 관념 때문에 나이든 여자 좋아하는 게 말이 되냥? 현생의 네가 아깝당.”
“윽, 그게 말이지...”
할 말이 없다. 이건 정말 나도 고쳐야 한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눈길이 안 가는데 어떻게 하리? 진지하게 고민 좀 해봐야겠다.
뿌우는 그 뒤로도 끊임없이 강의를 했다. 나의 평소 행동의 문제점을 일일이 지적하고 내가 실비아 공주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같은 말을 해도 상대가 받아들이는 게 전혀 다르다는 부분을 남여 사이의 이해관계로 풀어서 설명을 들으니 이건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일이다.
거기에 나 자신의 감정을 일단 배제하고 경험을 위한 연애를 해 보라는 말에 나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방문할 십대 가문의 내 청혼녀들에게 매너 실습을 하라는 거지?”
“그랭, 그래야 네 평판이 좋게 퍼진당. 하지만 반대로 그녀들이 완전히 너에게 반하면 안 된당. 그는 좋은 남자당 정도가 딱 좋당. 그는 애늙은이 같은 성격의 괴팍한 마법사당 이라는 평가만큼은 안 받았으면 좋겠당.”
“하아, 알았어.”
기나 긴 강의가 끝나고 열 명의 여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오라는 큰 숙제가 주어졌다. 할말을 마친 뿌우는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는 표정으로 밤 산책을 나갔고, 나는 뿌우의 스트레스를 세 배로 뻥튀기해서 받은 느낌이 되어 힘없이 침대에 누웠다.
“마리야.”
“네, 렌 경.”
“지금 뿌우가 말한 거 뿌우 말투 빼고 메뉴얼화 해서 책으로 만들어 줘.”
“예, 새벽까지 준비해 놓겠습니다.”
마리포즈는 들은 것은 모두 기억하는 기능이 있다. 그녀는 책상으로 가서 내가 명한대로 연애기초 매뉴얼을 쓰기 시작했고, 난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불이 꺼져도 마리포즈는 쓰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기에 어둠속에서 사각사각 하는 종이에 펜 긁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잠에 빠져 들었다.
그래, 메뉴얼로 배운 연애라고 해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마법, 마족, 영지, 가문. 다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나에게 가장 급한 건 탈 솔로다.
이제부터 실전이다.
*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한 하니 실비아 공주가 찾아왔다. 실비아 공주는 내가 요구한 것에 대한 회답을 가지고 왔는데 내 예상대로 아도리아 왕국측에서 순순히 지원을 해 준다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좋아요. 역시 실비아 공주님은 믿을 만 한 분이군요.”
“예? 아 칭찬 감사합니다.”
뿌우가 칭찬하래. 질책은 빼먹어도 칭찬은 빼먹으면 안 된다네. 사실 나도 그게 좋다는 건 알지만 실천을 하는 게 쉽지는 않아.
“이건 사사로운 부탁이지만 제가 떠난 사이 영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이곳 영지민들은 원래 아도리아 왕국의 사람들이었으니 공주님께서 계신다면 아마 다들 좋아할 겁니다.”
“그건 시키지 않으셔도 당연히 해야지요.”
역시 내가 부드럽게 나가니 실비아 공주도 약간은 굳었던 안색이 풀어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실비아 공주가 싫은 건 아니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아도리아 왕국에서 우리 데빌 베인에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신 것에 대해 미스틱 엑스 경께서 정식으로 감사의 서신을 발송하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조직 설립 초기에 가장 먼저 지원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후일 결코 섭섭지 않게 보답해 드릴 테니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호의에 감사드려요.”
드디어 실비아 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의 부담이 확 줄었으리라.
그 뒤 나는 재차 영지와 기사들의 관리를 부탁했고 실비아 공주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맡겨달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몇 가지 한담을 나누면서 공주의 반응을 살피니 긴장했다가 풀어진 영향인지 상당한 피로를 느끼는 듯 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것을 꺼내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약제술로 만든 크림인데 피로를 회복하고 피부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영지를 부탁드리는 마당에 마땅히 드린 것은 없고 그냥 작은 성의지만 받아주시죠.”
“아, 고마와요. 꼭 써 볼게요.”
역시 반응이 다르네.
칭찬과 부탁, 대화와 선물.
그래, 앞으로 이 패턴으로 가자. 앞으로 이걸 열 번 더 하면 되는 거잖아.
첫 시도가 약간의 성과를 얻은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10대 마도가문 순회방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