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5화
보고서에 의하면 텔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프리스톤 가문의 지원을 받아왔다. 짐작이지만 텔문 가문 자체가 프리스톤 가문의 숨겨진 분가일 가능성이 높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프리스톤 가문은 10대 마도 가문 중에서도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고, 엘시아 프리스톤의 명성은 제국의 황제보다 위에 있었다.
그런 만큼 비밀리에 분가를 세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마왕 발데스와 계약을 한 엘시아는 이미 죽었는데 텔문 가문이 흑마법사의 행사를 묵인하고 있었다고 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녀는 후계자를 두었던 것일까? 고위마족과의 계약을 이어받은 존재가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일단 보고서를 덥고 이반 경에게 말했다.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준비를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하지요.”
실비아 공주가 옆에 있기에 말을 거꾸로 한 셈이다. 이반 경이 준비를 하고 언제든지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다.
이반 경은 내 말뜻을 알아듣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이반 경과 실비아 공주의 만남은 끝났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내 방으로 온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현재 프리스톤 가문은 해가 다르게 힘이 약해져 올해는 가까스로 10대 마도가문에 들었지만 내년에는 다수파 가문에 밀릴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가주가 6서클이라 10대 가문 회담에서도 거의 발언권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니 아마 소문이 사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프리스톤 가문에 고위마족의 계약자가 있다? 계약이 끊겨서 몰락하는 거라면 이해가 되지만 계약자가 있다면 발전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흑마법사들이 고위 마족을 소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마족의 계약자라면 다른 라이벌들의 탄생을 원하지는 않을 터. 고위 마족을 소환하는 것을 방해하는 게 옳지 도와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애매하네. 마리야, 넌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옆에 서 있는 마리포즈에게 물었다. 인공 자아인 마리포즈는 생각을 하면서도 개인감정에 치우치는 법이 거의 없기에 냉정한 상황판단을 요구할 때 도움이 된다.
마리포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거의 확실한 것은 서피의 소환을 도운 게 프리스톤 가문일 거라는 점이에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애매한 것은 그들이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거죠.”
“맞아.”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프리스톤 가문 전체가 마족의 계약자와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그중 일부만 몰래 활동하는 것인가에요. 특히 현 가주인 말리온 프리스톤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렇지. 범죄동기 확인보다는 범인 확보가 더 급한 문제지.”
역시 마리포즈는 똑똑하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잘 만든 자아다.
자화자찬이라고? 아니야. 마리포즈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인 베리포즈의 작품이지. 그러니까 난 그녀의 할아버지뻘인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이반 경에게 갔다. 지금 상황이 멍하니 잠을 잘 수 있는 여유가 없다.
이반 경 역시 내가 올 것을 예상했는지 연구실에서 명상을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가자 일어나 미리 준비한 차를 따랐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대뜸 물어보는 이반 경에게 나는 말했다.
“말리온 프리스톤에게 흑마법의 기운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야겠어요. 현재 마족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반 경과 저 둘 뿐이니 같이 가 보조.”
“직접 가실 겁니까?”
“예, 가능하면 프리스톤 가문의 내부를 보고 싶어요.”
엘시아가 살아있을 때 세운 마탑을 보면 그녀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또한 그녀가 무엇인가를 숨겨 놓았다면 난 그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 공식적으로 방문을 해야겠군요.”
“예, 이렇게 하죠. 이반 경과 제가 혼담 문제에 정식으로 회답을 하기 위해 10대 가문을 방문하기로 해야. 이 참에 다른 가문에도 마족의 기운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요.”
“그거 괜찮은 생각입니다. 어차피 렌 경은 10대 가문 모두로부터 혼담이 들어왔으니 자연스럽게 살펴볼 수 있겠군요.”
“거절을 해도 이반 경께서 직접 방문하는 것이라 상대측 체면도 살려주는 셈이 되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보름 정도 영지의 일을 정리한 후 출발하는 것으로 할게요.”
이것으로 계획이 세워졌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재밌는 게 10대 가문이 모두 청혼을 해 왔을 때에는 정말 난감해서 속으로 무지 욕하면서 도망까지 갔는데, 지금 오니 이게 공식 방문을 할 구실이 된다.
전화위복이랄까?
대마법사인 나도 예측하기 어려운 게 미래다. 하지만 난 어떤 미래가 닥쳐오더라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
*
다음 날, 난 실비아 공주를 불러 데빌 베인의 본부 건설에 대해 말했다.
“나보고 본부 건설을 책임지라고요?”
“갑자기 일을 떠맡기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전 영지의 정리와 새로운 마탑의 건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데빌 베인의 본부는 실비아 공주께서 맡아주세요.”
사람을 받았으니 부려 먹여야지. 설마 공주라고 의자에 앉아 놀다가 연회에 참석해서 춤만 추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좋아요. 그럼 건물의 규모는 어떻게 하죠?”
“능력 되는 만큼 크게 지으시면 됩니다. 장소는 이 영지 내에 적당한 곳을 마음대로 고르시고요.”
“능력 되는 만큼이라뇨. 그럼 건설 자금을 알아서 조달하라는 건가요?”
눈치 챘군.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부 주춧돌에 아도리아 왕국 기증 이라고 새기셔도 됩니다.”
“지금 우리 왕국에는 자금이 없다고요.”
“없으면 없는 데로 작게 건설하시면 됩니다. 후훗.”
“후훗은 뭐에요? 후훗은!”
실비아 공주는 진심으로 화가 난 듯 정색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국의 자존심 상 작게 지을 수는 없다. 거의 작은 궁전 수준으로 지어야 할 거다. 무리를 해서라도 말이지.
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공주님은 데빌 베인의 회원이십니다. 그렇죠?”
“그래요.”
“모국보다 조직을 우선한다고 맹세하셨죠?”
“그래요. 그게 어땠다는 거죠?”
“데빌 베인을 위해 최대한 크고 화려한 본부를 건설해 줄 거라 기대하겠습니다.”
“이익!”
생각보다 다혈질이군. 놀리는 재미가 있네.
하지만 실비아 공주님. 진짜 성을 짓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여유가 없다고 해도 왕국의 예산으로 이정도 건물 하나 짓는 걸로 뭐라고 하시면 곤란하죠.
막말로 아도리아 왕국에 파병요청을 하면 보급문제까지 알아서 하라고 할 건데, 지금 이러면 그때는 입에 거품을 물겠네요.
망하려는 왕국이 살아나려면 많은 각오를 해야 한다.
나는 아도리아 왕국이 데빌 베인을 이용해서 과거의 과오를 씻어내고 재건의 기틀을 마련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합당한 요구를 하기로 했다.
뼛골까지 빼 먹힐 각오가 되지 않으면 아마 아도리아 왕국은 우리 데빌 베인에 투자하기로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뭔가를 얻으려면 그만큼 투자를 하라는 거다. 정략결혼 한 방으로 8서클 마법사를 비롯한 수 많은 인재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심보는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데리고 계신 기사들도 데빌 베인에 가입하는 거라고 하셨으니 따로 병사를 조금 더 모집하셔서 본부의 경비체계도 완성시켜 주세요. 전 내부 조직도를 짜야 하니 경비 쪽은 맡기겠습니다.”
“병사 고용비와 유지비용도 알아서 충당해야겠군요?”
“잘 아시는군요.”
나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실비아 공주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하는 눈을 했다. 나이 16세인 내가 이렇게 지독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겠지만 일에는 인정과 사정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오랜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아, 알겠어요. 왕국에 지원을 요청해 보죠.”
“협조 고맙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새로운 마탑의 건설과 가능하면 아도리아 왕국의 마법사들이 가입을 하기 원한다는 요청을 했다.
이건 공주측도 예측한 바 있는 요청이고 따지고 보면 오히려 그쪽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큰 문제없이 승낙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보름 후 저는 이반 경과 함께 10대 가문을 순회 방문하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으니 당분간 영지의 일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10대 가문을 순방한다고요?”
“예, 이번에 두 분 공주님의 일도 있고 아무래도 정식으로 직접 방문해서 혼담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데빌 베인에 대한 협조 요청도 해야 하고요.”
“그건…알겠어요.”
“주의할 점은 지금 우리 영지에는 기사가 없습니다. 경비대만 있을 뿐이죠. 하지만 공주님께서는 휘하 기사 분들이 작위와 출신을 앞세워 경비대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현 경비대장인 몰던은 제 양아버지입니다. 사소한 문제도 커질 수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그렇군요. 알겠어요. 기사들이 영지의 병사들을 존중하도록 주의를 시키죠.”
주의만 시켰다고 될까? 내가 며칠 동안 살펴봤는데 실비아 공주와 같이 온 기사들은 대부분 실력이 뛰어나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공주를 호위하는 프린세스 가드인 만큼 귀족 중에서도 순혈에 속하는 자들임에 틀림없다.
현 왕국법에 의하면 귀족이라도 평민을 마음대로 죽이거나 재산을 갈취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그게 정확하게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기사는 병사를 부리는 게 당연한 일이기에 아무리 실비아 공주가 주의를 주어도 기사들이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 같단 말이지.
상관없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를 대비한 것이지 일이 터지지 말라고 한 건 아니니까.
신분도 중요하지만 몰던은 내 양아버지고, 그가 지휘하는 경비단은 평민이라도 영지 내에서는 그 누구의 아래도 아니다. 그걸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려면 한 차례 일을 치루는 게 빠르다.
나는 실비아 공주와 헤어져 곧 바로 몰던에게 갔다.
“실비아 공주의 기사들이 무례하게 대하면 손을 쓰란 말이냐?”
“예, 그쪽에는 이미 말해 놨으니 뒷일은 신경 안 쓰셔도 되요. 참을 건 참아도 아닌 건 그냥 화를 내셔도 되요.”
“네 말뜻을 알겠다.”
몰던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기사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별 일 없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기사들은 그런 말 자체도 싫어할 지도 몰라요. 맞먹으려 든다고 생각하겠죠.
뭐, 잘 지내면 좋고요.
어차피 대비는 다 해놓았으니 일이 터지든 말든 이제는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