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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54화 (54/250)

로엔의 마나뱅크 54화

2장 영지와 가문

소피아 공주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국왕 폐하는 우리를 문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공주의 가입이 없어도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정식으로 나를 미스틱 엑스 경의 대리인으로 인정하고 미스틱 엑스 경의 영지를 관리하라고 했다. 원래는 소피아 공주와 결혼하면 맡기겠다고 제의했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혼약은 물 건너 간 것 같으니 국왕 폐하가 그냥 선심을 쓴 것이다.

미스틱 엑스 경의 영지는 원래 아도리아 왕국의 영토였던 페날턴 지역이다. 백작령에 걸맞은 크기에 훌륭한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는 일급 영지다.

“아무래도 실비아 공주가 있기 좋게 신경을 써 준 것 같다.”

파우스 스승님께서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볼스테아 왕국은 아도리아 왕국과 합병할 생각이 없다는 거군요.”

“아도리아의 남은 영토마저 병탄하면 북쪽의 대국 콜로디움과 직접 접하게 되니 득보다는 실이 많다는 판단이겠지.”

“스승님의 말씀이 맞아요.”

사실 합병을 했을 때 일장일단이 있는데, 장점보다는 단점을 우려해서 합병을 포기하는 것을 보면 우리 볼스테아 왕국의 국왕폐하는 큰 야망이 없는 것 같다. 다행이네. 괜히 국왕이 점령전쟁이라도 벌였다가는 귀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워메이지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잖아.

그런 일은 저번 전쟁 한번으로 족하다고.

어쨌든 그렇다면 아도리아 왕국이 망하지 않게 도와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어느 정도 마음속에 계획을 세운 후 스승님께 말했다.

“그러면 저는 일단 페날턴으로 갈게요. 스승님께서는 콘돌스핀 마탑에 계셔야 하니 또 당분간 떨어져 있겠네요.”

“페날턴하고 이곳하고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그리 아쉬워 할 것 없다. 그리고 내 생각인데, 페날턴에도 콘돌스핀의 마탑을 건설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예? 새로운 마탑을 세우자고요?”

“그래, 락티움 마탑에 있는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탑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니?”

“아하, 과연 그렇군요. 나쁘지 않네요.”

나는 그때서야 스승님의 의도를 이해했다. 락티움 마탑은 전 마탑주가 마족의 계약자들과 거래를 했기 때문에 사실 상 대외 활동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흑마법사의 혐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미 나이가 들어 락티움 마탑에서 나오지 않아도 되는 노마법사들은 몰라도 젊은 마법사들에게는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어둠과도 같은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마탑을 세운다면 콘돌스핀 가문의 규칙에 따라 기존의 마탑 사람들을 차출해서 지원을 해줄 수 있다.

그러니까 락티움 마탑의 젊은 마법사들을 새로운 마탑 소속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셈이다.

일종의 신분세탁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히 과거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내친김에 아도리아측 마법사들도 회유해야겠네요. 장래에는 아도리아의 영토에도 마탑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요.”

“그래, 그들도 협조할 거다.”

원래는 실비아 공주와의 혼약에 대한 대가로 지원받기로 한 아도리아의 마법사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이것은 서로가 도움이 되는 윈윈 형태의 일이기 때문에 굳이 대가로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일단 페날턴에 마탑을 세우면 원래 그 일대에 살던 마법사들은 자연스럽게 가입을 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아도리아 왕국이 그걸 막을 리는 거의 없고, 오히려 우리 콘돌스핀 가문이 볼스테아 왕국과 아도리아 왕국 양쪽을 모두 장악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럴 경우 적어도 볼스테아 왕국이 아도리아 왕국을 침공할 걱정은 사라지는 셈이니까.

“페날턴에 가면 우선 마탑 건설부터 시작할게요.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그래라. 페날턴 콘돌스핀 마탑이 완성되면 가문의 기반을 서서히 그쪽으로 옮겨서 장래에는 페날턴이 중앙 마탑이 되도록 하자꾸나. 물론 그때에는 네가 가주가 되어야 한다.”

“그건…아직 그 생각까지 하기에는 이르지만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을게요.”

나는 적당히 대답하며 대화를 멈췄다.

파우스 스승님은 정말로 권력욕이 없는 것일까? 자꾸 나한테 가주를 주려고 하니 말이다. 그냥 스승님께서 나이가 들어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가주를 했으면 좋겠다. 은퇴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끝이 났고, 나는 다음날부터 페날턴 영지로 떠날 준비를 했다. 몰던을 비롯한 헤지호그 용병단 또한 나와 함께 페날턴으로 떠나기로 했는데, 난 이쯤에서 헤지호그 용병단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를 느끼고 몰던과 상의를 했다.

“헤지호그 용병단을 정식 영지군으로 받아들이자는 거군.”

“예, 떠나실 분들은 떠나고요.”

“거의 대부분 남을 거다. 그런데 기사단은 어떻게 할 거냐? 백작령이면 기사단이 있어야 할 거다. 아니면 적어도 기사 열 명 정도는 모집하던가.”

“그 부분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몰던이 기사가 될 수는 없겠지요?”

“기사는 기본적으로 귀족 태생이어야 한다. 그리고 난 기사가 될 마음자체가 없다. 남이 죽으라고 명하면 도망가겠다고 맹세했으니까.”

“하하하, 저도 그럴 것 같아요.”

확실히 몰던이 기사를 하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 역시 기사 체질은 아니다.

기사는 융통성이 없는 딱딱한 정신구조의 귀족 전사다. 내 주변에는 그렇게 앞뒤 딱 막힌 사람이 거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막상 기사를 영입하면 영지군이 된 헤지호그 용병단 사람들은 기사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데, 난 그게 싫다. 몰던은 예외로 치더라도 다른 지휘관들이 생판 모르던 기사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사 문제는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볼게요. 일단은 병사들만으로 영지를 안정화 시켜 주세요. 전시가 아니니 상관없을 거예요.”

“그래라.”

몰던은 두 말하지 않고 승낙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한 것은 조금도 이견을 달지 않고 모두 들어주는 몰던이다.

아, 정말 이분을 아버지로 부르고 좀 더 편하게 모시고 싶은데 본인이 거부를 하니 황당하기도 하고 조금 그렇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내 심정을 사람들이 알까? 그냥 확 몰던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버지라 막 부를까? 에효, 그런데 막상 그러려고 해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뭐,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그런데 실비아 공주님과 결혼할 생각이냐?”

“예? 아니요.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요.”

“결혼할 거면 빨리 해라. 혼기 놓친 처녀를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 안 좋다.”

“예.”

몰던 말이 맞다. 21살이면 이미 다른 데 시집가기도 힘들 정도의 나이이니 더 이상 어영부영 시간을 끌며 남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내가 올해 안에는 결정을 내려서 거절하려면 확실하게 끊어 주는 게 맞다.

하지만 난 아직 결혼이라는 굴레에 묶이기는 싫다. 실비아 공주가 좋아졌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정도까지의 감정은 없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생각하자. 아직 올해가 끝나려면 반 년 이상 남았으니 그 안에 좋은 감정이 싹트면 좋고, 아니면 말기로 하자.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난 뿌우를 통해 이반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반 경은 약 보름 후에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우리가 페널턴에 떠날 때이기에 아예 그쪽으로 오라고 했다.

*

보름 후, 우리는 페널턴 영지에 도착했다.

우선 헤지호크 경비단이 지낼 숙소를 지정해주고 나는 영주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 관리인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지난 3년간 영지의 소출을 전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영지의 자금은 충분했고, 창고마다 아직 처리 못한 곡식이 꽉꽉 채워져 있다는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두 달 후면 또 다시 추수시기가 되니 지금 있는 곡식은 모두 처분해도 되는 것이다.

나는 마탑의 기본 구조도를 관리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비축된 식량을 모두 팔고, 기존에 있는 자금과 합쳐서 마탑을 건설할 재료를 구입하세요. 재료 구입을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적당한 가격에 구하면 됩니다.”

“옛, 그런데 몇몇 희귀 재료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만.”

“구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체크해서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 기회에 내 옛날 비밀연구실에 있는 마도제작시설을 재건해야지. 이반 경에게 인챈트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해야 하니까 전문적인 제작시설이 필요하거든.

백마법 기반으로 만든 마법무구라, 기대되는 걸? 하하하.

대충 정비가 끝나고 사람들이 저마다 맡은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 드디어 이반 경이 도착했다.

나는 실비아 공주에게 약속한 대로 그녀와 이반 경과의 대면을 주선했다. 단, 그녀의 수행원들은 모두 빠지고 오직 이반 경과 나, 그리고 실비아 공주 세 명만 영주관 가장 안쪽에 있는 밀실에서 만났다.

이반 경은 그동안 더욱 발전이 있었던 듯 전보다 기세가 훨씬 강했다. 실비아 공주처럼 마법을 모르는 사람도 위압감을 느낄 정도라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몸이 굳어 눈가도 살짝 떨고 있었다.

“렌 경과 혼약을 하고 싶다고 했나?”

이반 경은 처음부터 하대를 했지만 실비아 공주는 전혀 항의하지 못했다. 상대는 대륙에 둘이나 셋 밖에 없는 8서클 마법사로 웬만한 왕국의 국왕보다 더 존대를 받는 지위인 것이다.

“이미 브로스마이어 가문의 회신을 받았습니다만, 왕명에 의한 혼담이라 이반 경의 의견을 정확히 듣고 싶었습니다.”

“알겠네. 원한다면 대답해주지. 하지만 내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하네.”

“예? 말하지 않는 약속을요?”

실비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확인하듯 반문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는 혼담을 응하든가 거절하든가 국왕에게 보고를 하고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그걸 말하지 말라니. 그러면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이반 경은 이미 나에게서 편지를 받아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지 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실비아 공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실비아 공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내 대답은 이렇다네. 그냥 렌 경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걸세.”

“아!”

“렌 경은 정략결혼이 싫다고 하는군. 그래도 내가 모든 혼담의 압박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가 데빌 베인에 가입했네.”

실비아 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이반 경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나를 화난 표정으로 살짝 흘겨보는 게 약간은 원망하는 듯 한 느낌도 든다. 속았다는 느낌일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사이 이반 경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실비아 공주가 데빌 베인에 가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고, 나와 이 일에 대해 면담을 주선한 것을 보면 거절할 생각인 것은 아닌 듯 하군. 이제부터는 두 사람이 이야기해서 정해 보게.”

“알겠습니다. 렌 경.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실비아 공주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방금 전까지는 화가 난 듯 했지만 막상 나한테 직접 혼담에 대한 것을 물으려니 부끄러움을 느낀 듯 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원래 평민이었고, 가문의 결합이나 정치적인 연합을 위한 결혼은 생각해 본적도 없습니다. 얼굴도 한 번 못 본 여자하고 결혼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죠.”

“그렇다면…….”

“올해가 끝날 때까지 대답을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직 몇 번 대화도 나눠보지 못했는데 결정하라는 건 너무하잖아. 이쪽이 결정하는 형국이라 조금 미안한데 시간을 달라고.

실비아 공주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납득했다는 듯 표정을 풀며 말했다.

“적어도 소피아 공주가 데빌 베인에 가입을 못 한 이유는 알았네요. 알았어요. 기다리죠.”

휴, 이걸로 일단락 된 건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이반 경이 말했다.

“그럼 그 문제는 이걸로 마무리 짓기로 하고, 렌 경. 이것을 읽어보게.”

뭘까?

서류의 제목을 보니 텔문 가문에 대한 보고서다. 텔문 가문은 서피를 소환한 흑마법사들의 지역을 관장하던 마도가문. 이반 경에게 그쪽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보고서까지 만든 것을 보니 뭔가 나왔나 보다.

나는 천천히 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상당히 놀라서 이반 경에게 되물었다.

“텔문 가문이 프리스톤 가문과 연계가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프리스톤 가문, 바로 전생에 나를 죽인 내 제자 엘시아 프리스톤이 세운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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