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3화
나는 일단 실비아 공주와 그 일행을 저택 외곽에 있는 귀빈용 숙소로 보냈다. 그리고 전갈을 받고 달려온 파우스 스승님과 상의를 했다.
“실비아 공주가 가입을 하겠다면 아도리아 왕국이 데빌 베인을 적극 지지하겠다는 의미가 되겠구나.”
“아도리아 왕국이 데빌 베인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데빌 베인이 아도리아 왕국을 보살펴 줘야 하는 형국이 되지 않을까요?”
“꼭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아도리아 왕국이 마법사 수준은 조금 떨어져도 기사들은 꽤 강하다. 명분만 얻으면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만한 힘은 있다고 본다.”
파우스 스승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확실히 쉽게 무너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주변 왕국들의 압박을 어느 정도만 막아주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거겠지?
“좋아요. 그럼 실비아 공주를 미스틱 엑스 경이나 이반 경께 소개시키겠어요. 결정은 두 분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래라. 그런데 너 실비아 공주에게 마음이 있기는 있는 거니?”
“예? 아니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호오, 아직은 이라면 일단 아닌 것은 아니라는 소리구나.”
“그러니까…그런데 왜 그렇게 기쁜 얼굴을 하세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그러더라. 귀족가의 영양들 수십 명이 노골적으로 유혹하는데 넌 상당히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고 말이야. 그래서 난 네가 혹시 여성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허걱, 파우스 스승님께 그런 보고가 들어갔었어? 하긴, 난 귀족가의 후계자니 스승님 입장으로는 내가 관심 가지는 여성들의 신분이나 성품을 보려 하겠지. 그러다가 괜찮으면 은근슬쩍 혼담도 넣고.
아아, 후계자라는 게 은근히 귀찮은 거구나. 그냥 확 난봉꾼이나 할까? 그럼 어느 순간 관심을 끊으실 지도.
에고, 그만두자. 그건 내 취향이 아니지.
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반성을 했다. 나름 정중하게 대한다고 했는데 얼굴 표정에 싫은 티가 났나보다. 내가 산 세월이 얼만데 감정이 얼굴 밖으로 표출 되나.
나에게 관심 가졌던 십대 소녀들이여. 미안해요. 고의는 아니었어요.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파우스 스승님께 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실비아 공주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 보죠.”
“그래라, 하지만 너무 마법에 심취해서 청춘을 낭비하면 안 된다. 마법만 파다보면 나중에는 고독해 지는 거다. 넌 마법사이기 전에 한 명의 남자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아니거든요! 마법보다는 청춘이 우선이거든요. 당연하잖아요!
으, 내가 어쩌다가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된 거지?
그래, 결심했다. 당분간은 진짜로 연예에 집중한다. 어차피 조직이 완비될 때까지는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
나는 굳게 결심하고는 스승님과 헤어져 침실로 향했다.
*
다음 날, 나는 실비아 공주와 아침 식사를 하며 그녀에게 데빌 베인의 가입을 허락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이반 경을 만나게 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비아 공주님은 지금 우리 왕국에 비공식 입국을 한 것이니 계속 이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기다려 주시면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요.”
“미안하지만 돌아갈 수 없어요. 조직에 가입이 되었으니 전 이제 당분간 아도리아 왕국과 무관한 몸, 이 댁에서 신세질 수 없다면 이 근처에 적당한 주택을 구입해서 머물겠어요.”
아 놔, 독하네.
“그럼 주택을 하나 수배해 드리죠. 그때까지는 저희 집에서 묶으시면 됩니다.”
“경의 호의에 감사드려요.”
호의라기보다는 반강제적인 거잖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정중하게 웃어 주었다. 그래도 나랑 결혼하겠다고 온 여자니 잘 해 주자.
나는 식사가 끝난 후 하인에게 근처에 매물로 나온 주택을 알아보라고 시킨 후 마탑에 가려 했다. 그런데 외출을 하려고 막 현관문을 나오는 순간, 정문 쪽에서 경비병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고, 거의 전력으로 달려오는 게 특별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요?”
“그게, 헉, 헉, 공주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공주님? 실비아 공주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소피아, 소피아 제3 공주님이십니다.”
아, 이런.
난 불길한 예감에 손으로 이마를 살짝 집었다. 소피아 공주 역시 나에게 혼담을 넣었던 적이 있다. 나의 조국인 볼스테아 왕국의 공주인만큼 실비아 공주보다 오히려 더 곤란한 상대다.
나는 즉시 정문쪽으로 향했다. 이미 소피아 공주가 탄 마차는 정문을 통과해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오다가 내 앞에서 멈췄다.
마차의 차양이 들춰지며 안에서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소녀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의상만 봐도 의심할 여지없이 공주다. 머리에 보석이 박힌 티아라를 낄 수 있는 것은 공주와 왕비밖에는 없으니까.
“혹시 렌 경이신가요?”
나는 한쪽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하며 말했다.
“예, 소피아 공주님을 뵙습니다.”
“처음 뵈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차 한 잔 하고 가도 될까요?”
차는 집에서 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왕궁 테라스가 그리 예쁘고 경치도 좋다는데 굳이 우리 집에 와서 마시지 않아도 되잖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정중히 소피아 공주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로 향했다.
소피아 공주는 짙은 블루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색도 약간 푸른 기운을 띠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었다. 얼굴은 상당히 어려 보여 십대 중반으로 보였고 키 역시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입술이 굉장히 붉은 색이고 눈매도 순진해 보이지 않았다.
조신한 척 하지만 한 성깔 할 거 같은 느낌?
소피아 공주에 대한 나의 예상은 거실에 들어온 순간 정확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렌 경, 여기 아도리아 왕국의 실비아 경이 와 있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그녀를 만나고 싶어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녀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려는 거지요. 딴 나라의 공주가 어딜 남의 나라에 와서 행세를 하려는 건지.”
그러니까 이곳 볼스테아 왕국은 네 구역이라 이거지? 아이구야. 내 살다보니 공주가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을 다 보네.
“죄송합니다만 실비아 공주께서는 데빌 베인에 가입하려고 방문을 하셨고, 이미 가입 허가가 나서 그냥 되돌려 보낼 수는 없습니다.”
“뭐라고요? 어떻게 그녀를 가입시킬 수 있죠?”
“미스틱 엑스 경이 가입시키라고 했으니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스틱 엑스의 이름이 나오자 소피아 공주는 약간 움찔 하며 말을 멈췄다. 그러나 곧 두 주먹을 꼭 쥐고 힘주어 말했다.
“믿기 어려워요. 저를 미스틱 엑스 경과 만나게 해 줘요. 제가 직접 그분께 확인해 봐야겠어요.”
얘가 미쳤나. 어딜 와서 헛소리를 하는 거지?
“죄송합니다만 그분께서는 마족의 계약자들과 맞서기로 한 뒤로 함부로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흥, 내가 마족의 계약자와 연관이 있을 리 없잖아요.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건가요?”
이건 완전 어린애네. 얘 좀 어떻게 빨리 돌려보낼 수 없나.
나는 상당히 화가 났다. 지가 공주면 공주지 나한테 명령을 하거나 억지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면 일단 돌아가 주시면 제가 미스틱 엑스 경께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연락해 보세요.”
“그러지요. 뿌우.”
“뿌우 여기 있당. 뭐냥?”
“미스틱 엑스 경께 가서 소피아 공주님께서 면담을 요청하셨다고 전해줘.”
“알았당.”
눈치 빠른 뿌우는 별 말 안하고 창문으로 사라졌다. 난 다시 정중한 목소리로 소피아 공주에게 말했다.
“대기의 정령인 뿌우는 미스틱 엑스 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그게 하루가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모릅니다. 돌아가 계시면 답변을 받아오는 대로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저게 대기의 정령이군요. 전 처음 봤어요.”
얘가 왜 갑자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난리야. 그럼 대기의 정령을 처음 보지 두 번째 보겠어? 지금 대륙에 대기의 정령을 소환한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말이야.
빨리 가라. 내일 쯤 내가 미스틱 엑스가 친히 쓴 정중하게 거절하는 편지를 전해 줄 테니까.
그러나 소피아 공주는 내 바람과는 달리 쉽게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럼 일단 실비아 공주를 만나야겠어요. 그래도 일국의 공주가 자국을 방문했는데 이쪽에서 그냥 무시할 수는 없어요.”
이렇게 나오면 거절하기도 애매하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하인을 보내 실비아 공주에게 면담을 했다.
다행히도 실비아 공주가 허락을 했기에 나는 소피아 공주와 함께 실비아 공주의 거처로 향했다. 이미 실비아 공주는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고 차와 다과까지 준비한 상태였다.
“그대가 실비아 공주군요.”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소피아 공주님. 5년 전 국왕폐하의 생신 때에는 언니이신 두 분 공주님만 뵈었었지요.”
“그 때는 제가 나이가 안 되었거든요. 왕국의 정식 연회는 13세 이후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났다. 소피아 공주의 나이가 올해로 18세구나. 3년 전에 15세로 나에게 혼약 신청을 했었지. 가만, 그러면 실비아 공주는 21세인가? 맞아. 3년 전에 18세였어.
그런데 이 여자 둘 다 아직 시집을 안 간 건가?
보통 귀족의 영양은 16세에서 18세 사이에 시집을 간다. 그런데 소피아 공주는 그렇다 치고 실비아 공주는 21세가 될 때까지 아직 혼자인 것이다.
아무래도 왕국에 큰 일이 닥쳐서 시집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테지.
내가 생각을 하는 사이 두 공주님은 서로 은밀히 불꽃을 튀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말투는 점잖지만 은근히 비꼬는 것이 서로 나 너 싫어. 저리가 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래도 실비아 공주는 남의 나라라고 조금 조심하는 부분이 있지만 소피아 공주는 정말 거의 노골적으로 공격을 한다.
에효, 이대로 놔두면 서로 싸움 나겠다.
“저, 제가 지금 마탑에 가야 하는데, 소피아 공주께서는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저는 실비아 공주님과 있을 테니 다녀오세요.”
“죄송합니다만 집주인 된 도리로써 공주님께서 계시면 외출할 수가 없습니다. 실비아 공주님은 이미 데빌 베인에 소속되셨으니 상관없습니다만.”
순간 소피아 공주의 안색이 굳었다. 내가 실비아 공주의 편을 들었다고 생각한 건가?
“좋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저도 데빌 베인에 가입하겠어요. 어바마마의 허락을 받은 후 바로 통지할 테니 기다리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점도 미스틱 엑스 경께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하다. 넌 절대 가입 안 시킬 거야. 너랑 있으면 내가 스트레스를 팍팍 받을 거 같거든.
난 이 제멋대로인 공주를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끝까지 정중하게 그녀를 대하면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소피아 공주의 면담요청과 가입을 거절하는 편지를 써서 왕궁에 보냈다. 소피아 공주는 다시 찾아와서 거의 행패에 가깝게 화를 내며 항의했지만 난 무시했다. 그리고 냉정한 말투로 국왕 폐하가 보장해 준 데빌 베인의 업무 협조 조항을 들어 더 이상 공주가 내 집에 방문하지 못하게 했다.
이미 정식으로 거절한 이상 직접 찾아와 항의를 하는 것은 업무 방해 행위인 것이다.
소피아 공주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돌아갔고, 난 실비아 공주에게 새 주택을 마련해주고 이반 경이 오는 시기에 맞추어 면담 일정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