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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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바쁜 일정이 계속되었다. 나는 국왕까지 이름을 알고 있는 왕국의 영재이자 귀족가문의 후계자로 국가 권력의 한 축이 되는 콘돌스핀 마도가문의 차기 가주로 주목되는 마법사이다. 그런 만큼 내가 돌아왔다고 하자 각 가문에서 연회에 참가해 달라는 초대장이 거짓말 좀 보태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래도 다행히 이전처럼 혼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데빌 베인 조직에 소속되면서 혼인 문제는 두 조직 수장인 미스틱 엑스와 이반 경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마족의 후계자는 데빌 베인을 경계할 것이고, 드러난 존재인 나에게 무슨 수를 써서든 정보를 빼내려 할 터, 그들과 연관 있는 여자와 혼인을 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다.
미스틱 엑스는 나고, 내가 내 결혼을 결정하는 거다. 그리고 미스틱 엑스는 몰라도 이반 경의 명성에 10대 마도가문은 일단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그럼으로써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연예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즐거운 마음으로 집사가 엄선해준 연회에 참석했다.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한 것이다.
그리고 난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인기남이 되었다. 미남은 아니지만 워낙 능력이 좋아서 결혼 적령기의 아가씨들이 수십 명이나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엘렌디아 마를리노스에요. 엘렌이라 불러주세요.”
23번짼가 24번째 아가씨가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며 인사를 했다. 난 억지로 한숨을 삼키며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금발의 가발을 쓰고 연한 화장을 한, 녹색 드레스의 나름 미소녀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왜 한숨을 쉬는가? 나름 미녀가 아닌 나름 미소녀라는 게 문제다.
“엘렌디아 양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어머, 초면에 숙녀의 나이를 묻다니! 적극적인 성격이시군요. 전 올해 4월에 14세가 됐어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넌 13, 4세로 보여. 그러니까 애기로 보인다고.
아아, 큰일이다. 난 렌인데, 16살의 소년인데, 어째 여자를 보는 눈은 전생의 로엔 그대로인 거야!
철저하게 모든 감성을 현재의 나이에 맞게 살자고 결심하고 노력해왔다. 말투와 행동, 사고방식까지 머리보다는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소리에 따랐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바뀌어도 이상하게 여자를 보는 시선만큼은 예전 그대로다. 그러니까 어린 여자애들한테는 전혀 이성으로써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 인사를 한 여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상대는 18세인 카트리나 카를리오 백작 영애다. 그녀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나를 대했다. 자기가 나이가 많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면 바로 물러날 생각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카트리나 양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다.
문제는 카트리나조차 나에게는 애기로 보인다는 거다.
‘으으, 저기 보이는 모렐로 자작부인, 나이가 29세라고 했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아무나 한 사람을 골라 연애를 하라고 하면 저 여자를 고를 텐데. 아니면 저기 있는 수수아 민 백작부인도 괜찮고. 그런데 그녀는 31살이잖아.’
확실히 커다란 연회답게 모든 연령층의 남녀가 다수 참가했고, 모두 나름대로 예쁘게 꾸민 상태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전생의 한이 10분의 1정도 풀리는 듯 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전체 분위기는 좋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십대 소녀들이 있을 뿐이고,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인 남의 부인들에게 돌아간다.
아무리 눈높이를 낮추려 해도 20대 중반 아래로는 애기로 보이니 이건 답이 없다.
로엔이 어린 여자애 취향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지금 딱 좋은데 말이야.
‘설마 난 유부녀 전문 바람둥이가 되어야 하는 건가? 으으, 그건 안 되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민이 된다.
20대 초반까지라면 아직 여지가 있는데 25세가 넘어가면 이미 시집을 가서 애를 몇은 낳을 나이다. 그런 여자와 연예를 하면 이건 로맨스가 아니라 불륜인 것이다.
결국 난 그날 연회에서 형식적으로 춤만 계속 추다가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너무 많은 사람을 봐서 그런지 바로 잠들고 싶을 정도로 피곤한데 당면의 사태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잠도 안 온다.
“어떻게 하지? 10대 애들하고는 진짜 못 놀겠는데. 아으.”
난 연예를 하고 싶은 거지 애보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역시 로엔의 상식이 지금의 나에게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키는구나. 이것만큼은 바뀌지 않고 나를 이렇게 갈등시키니 역시 남자는 여자 문제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인가?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데 침대 옆에 세워놓은 스태프가 부르르 떨리더니 창문 밖으로부터 뿌우가 날아 들어왔다.
뿌우는 내가 잠들면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노는데, 이게 불침번 역할도 하기 때문에 그냥 놔두고 있다. 마나가 소모되기는 하는데 그 정도는 별게 아니라 신경 쓸 정도가 못 된다.
“누군가 왔당. 상당히 세 보이는 기사들 열 명이 호위하고 있당.”
“기사 열 명이라고? 그럼 고위귀족일 가능성이 높잖아.”
아무리 마도천하라 해도 기사는 대우를 받는다. 병사를 통솔할 수 있는 지휘관이자 배반하지 않는 부하로써 귀족들은 적지 않은 기사를 휘하에 두는 것이다.
밤에 찾아오는데 기사 열 명을 대동하다니, 누굴까?
“마법사도 있어?”
“있당. 두 명. 못 보던 자들이당.”
“콘돌스핀 가문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경비병에게 렌을 만나러 왔다고 했당.”
나를 찾아왔다고? 이상하네. 난 약속한 일이 없거든.
어찌되었든 난 몸을 일으켜 사람을 만날 준비를 했다. 그러자 곧 하인이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도리아 왕가의 실비아 공주께서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렌 경을 만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잉? 갑자기 아도리아의 공주가 왜 찾아와? 그것도 이런 밤중에.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왕족이 직접 찾아온 이상 그냥 되돌려 보내기도 애매하다. 저쪽은 국경까지 넘어온 셈이니 일단 만나보자.
“응접실로 안내해요. 스승님께는 알렸나요?”
“파우스 경께서는 오늘 마탑에서 연구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일단 전갈을 보냈습니다만.”
“알았어요. 그럼 곧 나갈게요.”
나는 하인을 보낸 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응접실로 나갔다. 응접실에는 뿌우가 말한 것처럼 열 명의 기사가 벽에 붙은 장식장갑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고, 중앙에 있는 소파에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의상으로 보아 가운데 앉은 사람이 실비아 공주인 것 같다. 좌우에 앉은 여자와 노인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아도리아의 궁중 마법사 문양이 새겨져 있다. 특히 노인은 6서클의 경지에 오른 마도사였는데 손에 검정색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얼핏 봐도 상당한 마력이 깃든 지팡이다.
그리고 실비아 공주는, 예상보다 훨씬 미인이었다.
은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살짝 뒤로 묶은 머리에 약간 창백한 듯 보이는 흰 피부의 얼굴은 조명을 받아 진줏빛으로 보였다. 붉은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약간 긴장한 듯 보였는데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지만 비취색 눈이 워낙 커서 날카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드레스가 아니라 얇은 체인메일이었는데, 미스릴로 된 체인이라 거의 옷 같은 느낌에 은은한 광택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옆에 앉은 여마법사가 레이피어를 들고 있는데, 오른손에 자루 째 든 모습이 그녀가 쓰는 무기가 아니라 실비아 공주의 무기를 받아들고 있는 것 같다.
플라티넘 나이트?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이다. 세련되면서도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차가운 인상 탓인지 어린 티가 안 난다.
내가 실비아 공주의 나이를 정확히 기억하는 건 아닌데, 나에게 청혼을 할 정도였으니 잘 해야 20살 정도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실비아 공주는 20대 중후반이라고 해도 믿겠다.
안 예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예쁜데 노안이랄까? 노안이라고 해도 나이가 들어도 거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까 10년 뒤에도 저 얼굴 그대로일 것 같다.
적어도 실비아 공주는 애기로는 안 보인다. 나는 그녀에게 급 호감을 느끼며 물었다.
“공식 방문은 아니지요?”
“그래요. 볼스테아 측에 허가는 받지 않았어요.”
이 여자가! 한 나라의 공주가 밀입국해서 한 밤중에 남의 집에 찾아와도 되는 거야?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렌 경과의 혼담을 마무리 지으러 왔어요.”
“혼담은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거절당하지 않았어요. 단지 렌 경의 혼담은 이반 헬비스트 경과 미스틱 엑스 경이 주관한다고 적혀 있더군요.”
실비아 공주는 말을 하면서 옆에 있는 여마법사로부터 서신 한 장을 받아 나에게 건네주었다. 콘돌스핀 가문의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승님이 보낸 서신인 듯 했다.
과연 내용을 읽어보니 정확하게 거절한다고 쓰여 있지는 않았다. 하긴 왕실의 청혼을 딱 잘라 거절하면 엄청난 무례이니 정중하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유감이라고 에둘러 표현이 되는 거지. 그리고 그 사정이라는 게 이반 헬비스트 경과 미스틱 엑스 경이고.
나는 실비아 공주를 보았다. ‘거절한다.’라는 단어만 없을 뿐 이건 거절의 서신이 맞지 않아요? 라고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실비아 공주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쪽 사정이 별로 좋지 않고 이미 국왕 전하께서 명을 하신 이상 서신 한 장으로 일이 마무리 될 수는 없어요. 난 정식으로 이반 헬비스트 경이나 미스틱 엑스 경을 만나 확답을 듣고 싶어요.”
오잉. 직접 만나겠다고? 이봐요. 언니, 그건 억지잖아요.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실비아 공주를 보았지만 공주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눈꺼풀이 살살 떨리긴 해도 기죽지 않고 뻔뻔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공주님의 말씀은 잘 알겠지만 두 분께서는 함부로 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입니다. 아시겠지만 마족의 계약자들은 하나같이 강력하고 지독한 흉계를 꾸미는 자들, 자칫 잘못해서 그들에게 행적이 드러나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이미 예상했어요. 그래서 결단을 내리기로 했고요.”
“결단이요?”
“저도 데빌 베인에 가입하겠어요. 아도리아 왕국보다 조직의 일을 우선할 것을 맹세해요.”
끄아! 이 여자가 아주 배 째겠다고 선언을 하네.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공주가 왕국보다 조직을 우선하겠다고 딱 잘라 말을 한 이상 이걸 거부하면 여러모로 앙금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실비아 공주를 비롯한 아도리아 왕국의 상황을 볼 때 이 결단은 상당히 훌륭한 것이기에 살짝 감탄하는 마음도 들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대로 가면 아도리아 왕국은 10년 이내에 망한다. 우리 볼스테아 왕국과 10대 가문에 지불해야 할 손해배상금도 그렇고, 마족의 계약자 사건의 발생지인 만큼 주변 왕국들의 시선도 차갑다.
거꾸로 당하긴 했어도 웨어울프킹과 거래해서 침략전쟁을 벌인 것만큼은 사실이니 손가락질 받아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데빌 베인에 가입해서 오명을 씻고, 여차하면 8서클 마도사를 영입해서 왕국의 부흥을 꾀하겠다는 거겠지. 그걸 위해 실비아 공주는 체면을 돌보지 않고 나를 찾아온 거고.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