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49화
우선 당장 할 일은 영혼이 빠져나간 카이스난의 몸을 매장하는 일이다. 미리아와의 이별을 끝마친 카이스난의 영혼은 승천했고, 그녀의 몸은 이제 평범한 시체가 되었다.
난 근처에 있는 바위 하나를 깎아 비석을 만들었고, 그 사이 이반 경이 근처 나무를 깎아서 관을 만들었다. 땅을 파는 것은 마리포즈와 렉스가 맡았다.
비석에 뭐라고 쓸까?
난 잠시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리고 천천히 정성들여서 글씨를 새겨 넣었다.
-딸을 사랑해서 마족의 유혹을 이겨낸 마녀 카이스난, 이곳에 잠들다.-
“자, 이제 그녀를 묻도록 하죠.”
내가 비석을 세우고 말하자 미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카이스난의 시체를 관에 넣었다. 그리고 관뚜껑을 닫고 흙을 덮었다.
“자, 이제 좀 쉬죠. 오늘은 너무 무리를 했으니 앞으로의 일은 내일 이야기해요.”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다들 기분이 그게 아닌 듯 조용히 내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왔다.
사실 난 거의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기에 바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지금 암살자가 오면 아마 난 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리포스가 내 옆에 서서 지켜주니 안심이다. 그래, 그래, 렉스 너도 있는 거 알아. 근데 너도 잘 거잖아. 벌써 코를 고네. 모처럼 포식하니 기분 좋냐? 얼씨구, 서피도 렉스 옆에 똬리를 틀고 눈을 감는다. 얘도 마기를 배부르게 먹어서 졸리나보군.
난 인간은 아니지만 내 가족과도 같은 권속들을 보다가 스르륵 눈이 감기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이미 밤이었다. 거의 하루를 꼬박 잔 것 같았다.
사방이 조용해서 집안을 살펴보니 미리아는 방에서 자고 있었다. 얼굴에 눈물 흘린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자다 깨서 울다가 다시 자는 모양이다.
이반 경은 없었다. 어디지?
난 집 밖으로 나섰다. 어느 새 내 뒤에는 마리포즈가 따르고 있었다. 렉스와 서피는 그냥 계속 잔다.
집 밖에 있는 카이스난의 무덤 앞에 이반 경이 앉아 있었다.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다 슬픔의 정령이란 게 있다면 지금 그에게 임했을 것이다.
“다행이오. 그대를 구할 수 있어서. 하지만 이제는 그대를 볼 수 없구려.”
꿈속의 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중인가.
낮에는 감정을 잘 제어하던데 결국 자기 마음은 속일 수 없군.
마법사는 항상 냉정해야 한다. 지금 이반 경처럼 슬픔에 잠겨 있으면 제대로 주문을 시전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마법사는 순수한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도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버리면 결국 좋은 꼴을 못 본다. 욕심이 지나쳐 근본적인 소중함을 잃는 것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
난 그런 면에서 이반 경이 좋다. 그래서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 면도 있다.
“아, 스승님. 나오셨군요.”
이반 경이 내 기척을 알아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슬픔의 감정을 정리하고 마법사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온다. 역시 좋은 마법사구나 이반 경은.
“이반 경,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듯한데 좀 더 쉬세요.”
“그래야하는데 잠이 잘 오지 않는군요.”
“이해합니다. 하긴, 당분간은 여유를 가지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테니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도록 하세요.”
“예, 그런데 미리아가 바로 카이스난의 딸입니까?”
“그래요. 그리고 내 제자이기도 합니다.”
“제자라, 사승관계가 조금 꼬이는군요.”
“하하하, 그쪽은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겁니다. 우리 마탑은 제자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규율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제자를 한 번에 한 명만 들이게 되어있는데, 제가 그걸 어긴 거니까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미리아를 양딸로 삼아도 되겠습니까?”
“미리아를 말입니까?”
“카이스난이 마지막에 딸을 부탁했었습니다.”
“그런가요? 알았습니다. 전 관여 안 할 테니 내일 직접 이야기 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미리아에게 보호자가 생기는구나. 잘 됐네. 이반 경은 좀 엄격해도 좋은 아빠가 될 거다. 아빠가 된 김에 미리아에게 백마법도 좀 가르쳐 주겠지. 그럼 난 이제 마녀의 주술 쪽을 가르쳐야겠군. 백마법과 마녀주술을 동시에 쓸 수 있는 성녀라. 얘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힘을 쓰게 될지 나도 잘 예측이 안 가네. 하하하.
“그런데 마지막에 마족의 현생체를 파괴한 수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마법을 시전한 것은 아닌듯한데, 엄청난 마나의 흐름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마나뱅크로부터 파즈스의 몸 안에 직접 마나를 흘려 넣은 것입니다. 순수한 마나는 마기를 만나면 동화되어 버리지만, 마나의 흐름이 거세면 동화가 안 되고 오히려 압력으로 마기를 밀어낼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화되는 마나보다 밀어내는 마기가 많은 거죠.”
“그런 일이 가능하군요!”
“지금의 이반 경이라면 전력을 기울이면 한번쯤은 이런 공격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승패가 아슬아슬하겠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그 경우 이겨도 이반 경의 마나가 바닥날 겁니다. 마기를 따로 정화하지 않으면 회수도 힘드니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 그래서 다스 서펜디움과 렉스를 이용해 마기를 흡수한 거로군요.”
“그래요. 그 둘이 있으니 전 마나 러시를 사용해도 절반 정도는 다시 마나를 회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전 기본적으로 이반 경보다 훨씬 마나가 많습니다. 압력도 몇 배는 더 세고요.”
“양도 압력도 부족하군요. 알겠습니다. 더욱 수련을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반 경은 자신의 손으로 마족의 현생체를 파괴하고 싶은가보다. 그게 카이스난을 죽게 한 마족들에 대한 복수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반 경, 고위마족의 현생체는 8서클로는 파괴하기 힘들어요. 한 놈 보내자고 마나 고갈 상태까지 가면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지.
그러니까 당분간은 마음 비우고 내 서포트 역을 하라고요. 후훗.
이번 싸움으로 난 확실하게 방법을 찾았다. 결계를 치고 이반 경이 외부에서 서포트하면 난 안에서 8서클 마법과 6서클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거기에 미리아가 성녀의 힘을 쓰고, 마리포즈가 나를 보호한다. 결정적인 상황이 되면 렉스와 서피가 마기흡수로 정리까지 깔끔하게 해주니 이정도면 우리는 최강의 마족헌터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고의 효율이다. 당분간은 이걸로 가야지.
아무튼 싸울 때의 진형은 갖춰진 거고, 조사는 어떻게 할까?
마족의 계약자들과 마도 가문이 엮여 있는 흔적이 발견된 이상, 섣불리 조사하고 다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역시 우리 쪽도 비밀조직이 필요하겠군요.”
“예?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반 경은 내가 뜬금없이 비밀조직 이야기를 하자 뭔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마족의 계약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력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로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조직을 처음부터 키우기도 애매하네요.”
어둠을 찾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빛이 다가가면 어둠은 사라지기에 절대로 찾을 수 없다. 이반도 이런 이치를 잘 아는 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탐사 조직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를 돕는 친구들이 약간 있습니다.”
오호, 그렇지. 이반 경도 마족을 잡는다고 돌아다녔으니 따로 정보조직을 만들었을 만 하지.
“그렇다면 이반 경이 이 일을 맡아주세요. 대륙 전체를 조사할 정도로 강대한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 정도까지 크려면 수십 년은 걸릴 겁니다.”
“일단 볼스테아 왕국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점점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신경 쓸 거 없어요. 천천히 탐색하다 걸리면 잡고, 안 걸리면 그 사이 우리도 힘을 키우면 되니까요.”
“그렇지요. 어차피 이 일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라, 제 평생을 걸어야 하는 일일 겁니다.”
정말 싸움을 좋아하는 성격이네. 평생 마족과의 전쟁을 결심하다니. 뭐, 잘 됐다. 이반 경이 열심히 하면 난 적당히 놀 수 있겠군.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비밀조직이 아니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바로 내 본래의 목적 때문이다.
화려한 청춘! 20대 대마법사!
마족들이 미친 짓을 벌여서 날 방해해도 난 인생을 즐기고야 말 거다.
난 고개를 돌려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난 품속에서 웨어울프킹의 심장보석을 꺼내 이반 경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받으세요. 이게 있으면 마기가 눈에 보일 겁니다.”
“마기를 볼 수 있다니, 대단하군요!”
마기는 탐지가 안 되기 때문에 위험하고 은밀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마족을 추적할 때 큰 도움이 된다.
난 파즈스의 창을 흡수한 스태프를 들고 있어서 이제는 웨어울프킹의 심장보석이 없어도 그와 똑같이 마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들고 하놀렌 가문을 조사하면 뭔가 나올 거예요. 하지만 가능하면 손을 쓰지 마세요. 고위마족이 관련된 일은 손을 쓰면 단숨에 끝을 봐야 합니다. 아니면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조사가 끝난 후, 콘돌스핀 마탑으로 오세요. 미안하지만 이반 경의 명성을 좀 이용하겠습니다.”
“제 이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쓰십시오.”
“고마워요.”
계획이 세워졌다. 이제는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다음 날, 이반 경의 말을 들은 미리아는 울먹이면서 아빠라고 불렀다. 역시 미리아는 가족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미리아 넌 당분간 이반 경과 같이 다니면서 백마법을 배워. 난 콘돌스핀 마탑으로 가서 앞으로의 일을 진행할 준비를 할 테니까.”
“응, 그런데 머독스란 놈은 안 잡아?”
머독스는 웨어울프킹과 계약한 고위마족이다. 수인족의 신과 같은 존재. 웨어울프킹의 심장보석을 매개체로 소환을 할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결계준비를 해서 현생체를 소환한 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난 당분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파즈스의 현생체가 파괴되었는데, 곧바로 머독스의 현생체도 잡으면 마족의 계약자들이 손을 잡고 우리를 상대할 가능성도 있어.”
“그렇구나.”
“이번에 안 건데, 계약자가 죽은 것은 다른 고위마족이 알 수 없어. 하지만 현생체가 파괴되면 모두 알게 되는 것 같아.”
“정말?”
“응, 그러니 우선은 계약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내서 처치하는 게 중요해. 현생체는 나중에 몰아서 정리해도 되는 게, 그놈들은 이쪽에서 소환을 하기 전에는 힘을 못 쓰거든. 계약자만 죽으면 말이야.”
게임의 룰을 아니 확실한 대책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미리아와 이반 경은 내 설명을 듣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피와 렉스가 이번에 흡수한 마기를 소화하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 이후에 다시 싸우자고, 그땐 이 녀석들도 더 강력해 질 테니 말이야.”
컹
샤사사사사
렉스가 말을 알아듣고 살짝 짖었다. 서피도 열심히 하겠다는 듯 똬리를 한 번 더 틀었다. 난 렉스의 목을 살짝 긁어주고 말을 이었다.
“식사를 하고, 움직이자고. 여유는 있지만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알았어.”
“알겠습니다.”
미리아와 이반 경은 동시에 대답을 했고,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