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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48화 (48/250)

로엔의 마나뱅크 48화

8장 주인 없는 세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계란 정확하게 말하면 이곳 물질계가 아닌 다른 세계, 즉 이계를 의미한다. 왕국으로 말하면 자국 말고 외국을 통틀어 마계라 한다는 소리다. 바꿔 말하면 그들에게는 이곳도 마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고위 마족이란 이계의 신급 존재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는 임모탈, 그러니까 불멸자다. 세상의 규칙에 직접 관여하는 신이다.

그들은 마왕이나 혹은 마신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호칭에 관계없이 그들 간의 힘의 우열은 쉽게 따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무적이지만 다른 세계로 현신하면 힘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서로 간에 싸워서 결판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들 중 누가 가장 강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딱히 답을 얻기 어려운 의문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진지하게 결판을 내고 싶어 하는 자들도 생겼다.

그러던 중, 그들 중 하나인 발데스가 이곳 물질계를 발견했다 한다.

놀랍게도 물질계에는 주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이 존재하지 않는, 무주공산의 세계다.

발데스는 생각했다.

이곳이라면, 신이 없는 세계라면 그들의 현생체가 아무런 제약 없이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동등한 조건에서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요건을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의 호기심은 어느 정도 충족될 수 있으리라.

발데스는 몇몇 고위마족들과 접촉해서 제안을 했고, 관심을 가진 자들과 논의 끝에 몇 가지 규칙을 만들어냈다.

1. 계약자를 만들어 대신 싸우게 한다.

2. 최종승자는 다른 계약자를 모두 물리치고 물질계를 정복함으로써 결정된다.

3. 최종승자가 탄생한 시점에서 다른 자들은 이후 다른 게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승자를 그들보다 강한 존재로 인정한다.

4. 계약자가 전투 이외의 사건으로 죽으면 후계자를 만들 수는 있지만 싸움에서 죽으면 패배로 간주하고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

5. 현생체가 직접 관여하는 것은 가능한 한 줄이고, 꼭 그래야 할 상황이면 그에 상응하는 계약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또한 계약자들 간의 싸움에는 절대 직접 관여할 수 없다.

6. 현생체가 파괴되면 가장 확실한 패배가 되고 순위의 최하위에 머문다. 한 마디로 가장 약한 마족으로 인식된다.

“게임이라, 그러니까 세계정복 게임이라 말이지? 너희들 중 누가 가장 강한지를 가려내는.”

“그렇다. 계약자의 선택, 지원의 종류와 크기, 그리고 중간에 직접 간섭까지 할 수 있으니 복합적으로 힘을 평가할 수 있는 방식이다. 우리는 모두 이 게임에 동의하고 참가하기로 했다.”

“끄응, 이놈들이 남의 세계를 놀이터로 봤다는 건데…그런데 우리 세계의 신은 어디로 갔는데? 신이 있었으면 너희들이 이렇게 함부로 날뛰지도 못했을 거 아냐.”

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계속 질문을 했다. 파즈스가 이렇게 마족들 간의 비밀을 이야기 해주는 것은 사실 반칙에 가까운 일이지만 이판사판이라 말을 해주는 거다. 이 기회에 물어보지 않으면 아마 앞으로는 어디 가서도 정확한 답을 얻기 어려울 거다.

“너희 신이 어디 있는지는 너희가 알아야지 왜 나한테 묻지? 우리가 아는 건 이곳은 주인이 없다는 거다. 그게 가능한지 모르지만 소멸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최소한 봉인 당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었다.”

“신이 없다는 것은 아는데 어디 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네. 이반 경, 백마법의 힘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백마법은 사라진 신의 힘이다. 그래서 따로 재능이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으니 이반 경이라면 약간의 단서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봤지만 이반 경은 고개를 저을 뿐이다.

“찾아봐야겠군요. 이 미친 게임을 막으려면.”

“그래요. 그럴 필요가 있겠군요.”

지금까지는 딱히 신을 찾을 필요가 없었는데,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 조금 염치없지만 역시 신이 필요하긴 한가 보다.

“아직 찾으면 안 된다. 혹시라도 신을 찾으면 그 순간 게임이 중지되고, 난 패배자로 남는다.”

“그건 님 사정이고.”

“신을 찾기 전에 다른 마족들을 소환해서 모두 죽여라. 그것을 위해 내가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거다.”

“그것도 할 거야. 너희들이 남의 세계에 와서 함부로 날뛰는 데 그냥 놔둘 만큼 속이 넓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정보만 주고 끝낼 건가?”

“난 싸울 때 창을 떨어뜨렸다. 전사는 패배한 무기를 줍지 않는 법이지.”

“오호, 이제 보니 창의 기운은 아직 남아있군!”

세상에 이런 횡재가! 난 급히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일시적이지만 결계를 다시 가동시켰다. 그리고 마법진 중앙에 내 스태프 창을 꼽으며 서피에게 명했다.

“서피, 결계 안의 기운을 내 창속에 집중시켜라. 뿌우야, 도와라.”

“알았당.”

콰콰콰콰콰콰

가만히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단 결계를 발동하니 모래가 되어 사라졌던 파즈스의 창이 돌개바람으로 변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래들은 순식간에 모두 내 창속에 스며들었다.

뿌우는 내 창이 힘을 못 이기고 터지지 않도록 유지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듯 연신 비명을 질렀다.

“좀 천천히 넣어랑. 뿌우 집 터진당.”

다행이야. 이 창을 뿌우의 집으로 삼아서. 정령의 집은 웬만하면 파괴가 안 되거든.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창이 점점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든 결계를 파괴하는 창의 힘이다. 이제 이거에 찔리면 마족의 현생체라 해도 제대로 뚫릴 수밖에 없겠군.

“좋아, 네 성의를 봐서라도 꼭 다른 마족들을 모두 소환해서 보내주지.”

서로의 목적이 일치하니 부탁을 안 들어줄 이유가 없다. 내 대답에 파즈스는 겨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외에 이 게임에 참가한 마족의 이름은 발데스, 머독스, 파즈란, 윽, 이런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그들이 지금 상황을 눈치 챘다. 난 차단되고 있다.”

“그런 말 할 시간에 한 놈이라도 더 말해!”

“솔롬…….”

파즈스의 모습이 일렁이며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말소리도 묘하게 울려 퍼지면서 점점 발음이 부정확해 졌다. 그리고 곧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른 고위마족들이 파즈스의 힘이 이곳에 닿지 못하게 차단한 것이다.

불쌍한 파즈스, 최하위 확정이구나. 다른 존재들에 비해 하위라는 인식은 제삼의 공간에서 힘의 우위를 발생시킨다.

“염려마라. 네놈이 밉긴 하지만 다른 놈들도 똑같이 미우니 내 모두 쳐줄테니까.”

난 파즈스가 사라진 빈 공간에 대고 위로하듯 말해준 뒤 일행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카이스난의 영혼을 해방하자. 미리아, 이리 와서 네 엄마와 인사를 나눠.”

“엄마를 다시 살릴 수는 없어?”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어. 살려도 다른 존재가 될 뿐이야.”

“그렇구나.”

미리아는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이미 카이스난의 죽음을 받아들인 듯 더 이상 부활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미리아는 이제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인 카이스난에게 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엄마, 날 기억하나요?”

“난 널 기억할 수 없다. 그런데 넌 나와 아주 가까운 존재인 모양이구나. 내 가슴이 슬픔과 반가움으로 뛰는 것을 보니.”

카이스난은 스스로 기억을 지워서 미리아를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미리아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카이스난은 절대로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스스로 강력한 암시를 걸었을 것이다. 그것은 딸의 안전을 전제로 한 암시이고 죽음도 불사한 것이니 그걸 풀 방법은 없다.

미리아도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지 다시 카이스난을 보며 말했다.

“엄마가 날 기억하지 못해도 엄마가 엄마인 것은 틀림없어요. 엄마, 이제 좋은 곳으로 가세요. 전 렌이 있으니 앞으로도 무사할 거예요.”

“네 이름은 뭐니?”

“미리아에요.”

“미리아, 내 기억에는 없지만 네가 내 딸인 모양이구나. 고맙다.”

카이스난은 눈물을 흘리며 미리아를 끌어안았다. 미리아도 같이 울면서 카이스난을 안았다. 그리고 곧 카이스난의 육체는 서서히 사라졌다. 이미 죽은 지 십수년이나 된 육체가 파즈스의 마력으로 유지되다가 영혼이 떠남과 동시에 분해되는 것이다.

“엄마! 흐흐흑.”

미리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동안 나와 살면서 정상적으로 울게 된 미리아다.

난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리아가 마음을 추스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번 울음을 터뜨린 미리아는 하루를 꼬박 울다가 그대로 힘이 빠져 기절해 버렸다.

난 한숨을 내쉬며 미리아를 침대로 데려가 눕히고 이반 경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족을 소환하려면 계약자를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계약자를 찾아야겠군요.”

난 웨어울프킹의 심장보석을 꺼내들었다.

“이 보석으로 머독스를 소환할 수 있을 겁니다. 그자의 계약자는 이미 죽었고, 이게 그의 심장이니까요.”

“계약자를 죽였다면 굳이 현생체까지 제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있어요. 현생체를 한 번 파괴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이 세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 게임이 끝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물질계에 해로운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크니 뿌리를 뽑아야 해요.”

“그렇군요. 하지만 신을 찾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신도 찾아야죠. 하지만 고위마족들이 못 찾았다면 우리가 찾을 가능성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궁극마법으로 찾을 수 없습니까?”

“적어도 저는 불가능해요. 전 공간에 대한 한 기적에 가까운 힘을 쓸 수 있지만 탐색은 평범합니다. 이반 경이 9서클에 도달하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요.”

“아무래도 저도 힘들겠군요. 저는 공격마법쪽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죠. 머독스를 소환해서 그자를 제거하고, 다시 발데스를 소환해 보도록 해요.”

“발데스의 계약자도 죽었습니까?”

“그래요. 그녀는 훨씬 이전에 죽었어요. 단지 늙어 죽은 거라 새로운 계약자가 나타났을 수도 있겠군요.”

“이전 계약자가 누군지를 안다면 그녀의 흔적을 찾아서 소환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발데스의 계약자는 바로 엘시아 프리스톤이니 프리스톤 가문으로 가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난 엘시아의 이름을 말하면서 다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잊으려 하는 전생의 기억이 참으로 끈질기게 나를 구속하고 있구나.

그리고 엘시아의 이름을 들은 이반 경은 더 이상 놀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맙소사. 그녀가 마족의 계약자였다고요? 마도의 전성시대를 연 그녀가 말입니까?”

“그래요, 잔혹한 진실이지만 거짓이 아니니 받아들이세요.”

난 이반 경을 안정시키며 내 심장의 박동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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