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47화
반투명한 모습의 카이스난이 점점 붉게 변해갔다. 결계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신호다. 애초에 이 결계는 그녀가 친 것으로 기억을 지웠다고 해도 영혼과 몸은 기억한다.
카오오오오
서피가 더욱 압력을 올렸지만 이제 카이스난은 더 이상 눌리지 않고 걸음을 옮겨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파즈스도 창을 겨눈 채 한 걸음 나를 향해 내딛었다.
드드득
으, 아직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 방어마법이 찌그러지는 힘이라니! 저 창의 위력은 내 상상을 초월한다.
방어마법을 해체하는 특성이 있는 창, 저건 아마 강식장갑로브도 가볍게 뚫을 것이다.
가만, 저런 위력의 무기를 내가 전에도 한 번 봤었지.
맞다! 발데스의 다리털로 만든 대거. 발데스 스팅!
내 제자 엘시아가 나를 암살할 때 쓴 대거도 저것과 비슷한 힘이 있었지. 그래서 최강의 방어로브인 결계로브조차 뚫고 내 심장에 구멍을 냈다.
“그렇단 말이지.”
으드득, 그때를 생각하니 심장이 격하게 뛰면서 이가 갈린다. 파즈스와 발데스가 같은 놈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비슷한 꼬챙이를 쓰는 것을 보니 그놈이 그놈 같았다.
오기가 생긴다. 저걸 못 막으면 내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을 것 같다.
나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려 파즈스에게 외쳤다.
“와라! 네놈의 그 잘난 창으로 내 가슴을 찔러봐라!”
“크르르르, 제대로 미친 놈.”
파즈스는 내가 말을 하자마자 바로 달려들며 창을 내질렀다. 카이스난 역시 파즈스와 보조를 맞추어 나를 향해 뛰어올라 손가락을 갈퀴처럼 만들어 내 머리를 잡으려 했다.
“홀리 볼트!”
퍼퍼펑
홀리 볼트가 다시 파즈스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나 파즈스는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 거릴 뿐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난 내 스태프 창을 파즈스에게 뻗으며 동시에 주문을 시전 했다.
“공간반전!”
이것은 결계 안에서만 쓸 수 있는 마법으로 단거리 텔레포트의 응용이다. 그러니까 나만의 독창적인 마법인 셈이다.
내가 서 있는 마법진의 위치가 파즈스의 위치와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카이스난의 공격은 그대로 파즈스의 머리에 적중했다.
콰직하고 카이스난의 손톱이 파즈스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역시 카이스난! 고위 마족에게도 통하는 공격을 했군. 원래는 그걸로 내 머리에 구멍을 내려 했겠지만 말이야.
“크르릉! 카이스난!”
“아앗, 주인님!”
둘이 당황하는 사이 내 창은 둘을 동시에 꿰뚫었다. 정확하게는 카이스난은 뚫고, 파즈스는 가슴가죽이 워낙 질겨서 창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창에 담긴 뇌전의 힘을 그대로 둘의 전신을 휩쓸었다.
파지지지직
여기서 승부를 봐야 한다.
“디바인 피스트!”
이반의 8서클 마법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이 마법은 상대를 정확하게 적중시키지 않으면 그대로 빗나가 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적중되어 있는 상황, 그대로 마법이 발동했다.
크기가 거의 파즈스의 몸통만한 거대한 손이 나타나 파즈스와 카이스난을 동시에 쥐었다. 카이스난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이미 디바인 피스트에 의해 쥐어진 후인지라 빠져나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한 수!
“서피, 결계력을 카이스난에 연결해랏!”
카오오오오
서피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이 제어하는 결계의 힘을 모두 카이스난에게 쏟아 부었다. 카이스난은 이미 결계력에 적응하여 마치 결계의 주인인 것처럼 영향을 받지 않지만, 넘쳐흐르는 힘을 모두 담고 있을 수는 없다.
결계의 힘은 카이스난의 몸을 통해 외부로 발산되었고, 그것은 다시 디바인 피스트에 막혀 그대로 같이 붙어있는 파즈스에게 흘러들어갔다.
크와아아아앙!
어떠냐? 쇼킹하지?
밀봉효과라고 할까? 결계의 힘은 디바인 피스트에 의해 힘의 손실이 전혀 없이 모두 파즈스를 공격하는 데 집중되었다.
파즈스의 괴로운 비명소리에 난 쾌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격을 늦추지는 않았다.
일단 승기를 잡으면 잠시도 틈을 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나 같은 고수의 싸움법이다.
“서피! 파즈스의 꼬리를 물고 마기를 빨아 먹엇!”
카오오오오
마기를 빨아먹으란 명령에 용감하게 돌진하는 서피, 손발을 못 움직이는 파즈스의 유일하게 자유로운 꼬리를 무는 데 성공했다.
“이놈! 저급한 마수가!”
파즈스는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꼬리를 깨문 서피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눈빛만으로 서피의 피부 표면이 팍팍 터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파즈스는 크게 포효하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디바인 피스트가 견디지 못하고 쩍쩍 금이 가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어딜, 못 벗어난다! 렉스!”
이반 경이 데려온 렉스는 결계 바깥 천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서피가 결계의 힘을 대부분 집중시켜 파즈스를 공격한 후 껍데기만 남은 결계는 아무런 힘이 없이 시각차단 효과만 있었을 뿐, 내가 소리쳐 부르자 렉스는 바로 천정을 뚫고 아래로 떨어져 내려 그대로 파즈스의 목을 깨물었다.
크왕!
“크윽, 이놈은!”
마기가 줄줄 세어나가지? 렉스는 마기를 빨아먹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고위마족의 현생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못할 힘이다. 아마 웨어울프킹과 계약한 고위마족이 경쟁자를 상대할 비장의 한수로 전해 준 힘인 것 같은데, 이게 어쩌다보니 렉스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머독스! 설마 네놈은 머독스의 계약자였나?”
파즈스가 난 노려보며 외쳤다. 아항, 웨어울프킹과 계약한 고위마족의 이름이 머독스인가 보네.
“아니다. 그놈의 계약자는 내 손에 죽었다.”
“뭐라고!”
“그러니 너도 억울해할 것 없다. 이제 가랏!”
홀리 볼트 연사, 8서클 백마법, 스톰 자이언트의 힘으로 내지른 창.
모두가 파즈스의 몸에 적중했다. 이제 파즈스의 육체는 곳곳이 터지고 갈라져 검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그리고 그 피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기묘한 흡입력에 의해 렉스와 서피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고위 마족 보약 하나 제대로 빨고 무럭무럭 자라는 강아지와 뱀이라고 들어봤나? 이놈들 어쩌면 진짜 대단한 존재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난 겉으로 보기에는 연속해서 마법을 쓰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모두 이반 경의 마법일 뿐, 나 자신은 전혀 마법을 안 쓰고 그냥 대기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커넥트 마법은 유지를 한 채, 나의 마나뱅크 구좌에 담긴 마나를 쓸어 내 손에 모았다.
파즈스는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국 힘을 써서 드디어 디바인 피스트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몸이 자유로워진 순간 창으로 자신의 목을 물고 있는 렉스의 배를 찌르려 했다.
저거 맞으면 렉스 죽는다.
“네 상대는 나다!”
퍽
내 손바닥이 파즈스의 배를 쳤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마나뱅크에 있는 마나를 모두 파즈스의 몸속에 흘려 넣었다.
순수한 마나가 파즈스의 몸 안을 채우는 마기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그 엄청난 양은 순간적으로 마기를 파즈스의 몸 밖으로 밀어냈다. 갈라진 육체의 틈으로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검은 피! 그것이야말로 파즈스의 마기다.
“끄르르, 어떻게 인간이 이런 마나를!”
9서클 대마도사의 마나다. 내가 전에 이거 빨아먹다가 전신이 터져 죽을 뻔 했거든. 너도 이제 그 기분을 맛 봐라.
정상적인 상태였어도 힘들었을 텐데 이미 손상이 많이 간 육체의 마기였기에 나의 마나가 주는 압력에 대항할 수는 없다.
파즈스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에서는 마나가 마기를 밀어내고, 밖에서는 두 마리의 마수가 마기를 빨아대니 견딜 재간이 없는 듯 했다.
툭
파즈스가 손에 쥔 창이 땅에 떨어지더니 모래바람으로 변해 흩어졌다. 육체가 마치 뿌우처럼 펑퍼짐하게 변해 팔과 무릎을 굽히기도 힘들어 보였다.
난 쉬지 않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조금이라도 압력이 떨어지면 이놈이 다시 움직일까 걱정이 되었다.
그 사이 껍데기만 남은 결계가 걷혔다. 미리아와 이반 경이 안의 광경을 보고 동시에 놀라 외쳤다.
“엄마!”
“카이스난!”
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
“카이스난은 세뇌 당했으니 잠시 제압해요! 마리는 전갈을 상대해.”
“알았습니다.”
이반 경은 즉시 구속 마법으로 카이스난을 묶어 파즈스로부터 떼어냈다. 그리고 마리포스는 대검을 뽑아들고 세 마리의 전갈을 하나씩 쳐 죽였다. 역시 마리포스는 강하다.
“미리아도 이리 와서 이놈 몸속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육체를 완전히 분해해야 된다고.”
“응!”
크아아아아
마리아의 신성력마저 몸속에 들어가니 파즈스는 고통이 몇 배나 가중되는 듯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자 드디어 파즈스의 부푼 몸 전체에 수천 개의 균열이 생기며 결국 팍 하고 터져 버렸다.
파스스스스스
모래로 화해 사라지는 파즈스, 비록 이계에 있는 본신에는 영향이 없다지만 적어도 그의 힘 중 일부는 손상이 간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 렉스와 서피가 필사적으로 빨아먹고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난 미리아에게 말하고 소환마법진에 다시 걸어 들어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허공중에 파즈스의 환영이 나타났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야말로 허깨비 같은 상태의 파즈스다.
“분하다. 이 세계에 9서클 대마법사는 없는 줄 알았는데.”
훗, 그렇지. 고위마족의 몸을 날릴만한 마나의 압력은 9서클의 경지에 들어야만 나오니까. 사실 난 지금 6서클에 불과하지만 마나뱅크에는 9서클의 마나가 들어있다. 양뿐 아니라 흐름의 압력이 9서클이라는 것은 이미 경험한 바. 고위 마족의 마기에 대항하여 먹히지 않고 오히려 마기를 밀어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충분히 계산한 부분이다.
뒤에서 이반 경이 역시 9서클이었군이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속이거나 거짓말 한 적 없지만 그가 멋대로 오해하는 걸 굳이 밝힐 생각은 없다.
파즈스 역시 마찬가지, 내가 9서클 대마법사라고 생각하면 다시 물질계에 돌아오겠다는 생각은 안 하겠지.
“넌 졌다. 파즈스, 이제 카이스난의 영혼과 네가 현신한 몸은 모두 나의 것이다.”
“믿기 어려운 결과지만 어쩔 수 없군. 하지만 부탁이 있다.”
“뭐지? 설마 너도 다른 경쟁자를 모두 제거해달라고 할 거냐?”
“그렇다. 그리고 가능하면 다른 마족들도 모두 소환해서 나처럼 파괴해 주기를 원한다.”
독한 놈, 혼자 당하긴 싫다 이거지?
웨어울프킹도 혼자 실패하긴 싫다고 하면서 나에게 자신의 심장을 주었다. 마기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심장보석이다.
그런데 파즈스는 아예 다른 고위마족을 모두 소환해서 현신한 육체를 파괴해달라고 한다. 이걸 어떻게 할까?
“그걸 한다면 내가 얻을 수 있는 대가는?”
“정보다. 이번 내기에 참가한 마족들의 이름을 모두 가르쳐주지.”
“내기? 고위마족들이 내기를 한 건가?”
“그렇다. 이건 자존심 문제다. 내가 이기지 못하면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하고, 내 현신체가 파괴되었으니 다른 자의 현신체도 모두 파괴되어야 한다.”
“혹시 그렇지 않으면 네가 지는 건가? 그냥 경쟁자만 제거된 것으로는 비기는 게 아니로군?”
“눈치 빠른 놈. 그렇다.”
오호, 이거 나쁘지 않은데, 무슨 내기인지, 뭐가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파즈스는 내가 맘 잡고 고위마족을 모두 때려잡지 않으면 완전히 망하는 거군.
난 좋은 기회를 얻었음을 깨닫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