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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46화 (46/250)

로엔의 마나뱅크 46화

아무리 물질계에 현신한 마족이 힘의 일부밖에 못 쓴다 해도 상대는 고위마족이다.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신으로 불리는 존재들. 밀려오는 압력의 수준이 틀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압력만으로도 전신이 굳어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할 터, 그러나 난 정신만큼은 대마법사의 경지에 든 사람이다. 직접적인 압력이 아닌 이런 외부의 기운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과감히 고위마족에게 싸움을 걸 수 있는 거다.

난 침착하게 주문을 시전 했다. 썬더 스톰, 6서클 마법이다.

그 사이 파즈스는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번갈아 휘저었다. 6서클 마법 따위는 몸으로 받아내도 상관없다는 듯 전혀 방비하지 않았다.

난 파즈스가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겨우 마법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상대의 가슴에 마법을 발동시키며 외쳤다.

“치환!”

꽈드드드등

하얀 색의 벼락이 그물처럼 파즈스의 몸을 덮었다. 그것은 일순간에 파즈스의 전신을 구속함과 동시에 강력한 힘으로 그를 거의 결계 구석까지 밀어냈다. 그리고 그물에 포함된 썬더 스톰의 기운이 파즈스의 털을 살짝 말리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8서클 백마법 공격마법인 화이트 웹이다. 물리력과 신성력의 절묘한 조화로 육체와 영체에 동시에 타격을 입힌다.

파즈스는 괴로운 듯 괴성을 지르면서도 손을 연거푸 휘둘러 하얀 그물을 찢어냈다. 지독한 놈 저걸 단번에 찢네. 무려 8서클 마법인데.

전이 마법진을 이용해 나는 이반 경이 시전한 마법을 내가 끌어다 쓸 수 있다. 거기에 지금처럼 내 마법을 융합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반 경은 내가 텔레파시로 주문하는 대로 마법을 쓸 뿐이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혀 모른다.

이것으로 난 8서클 마법사처럼 마법을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한 번에 두개의 마법을 동시에 쓸 수 있는 거다.

공간과 결계에 대한 깨달음으로 대마법사가 된 나만의 마법진! 이반 경이 없었다면 다른 방법을 썼겠지만 그의 도움이 있으니 훨씬 쉽게 파즈스를 상대할 수 있다.

나는 연속으로 마법을 써서 계속 압박해 나갈까 하다가 일단 멈췄다. 아직은 결판을 낼 때가 아니다. 상대를 흥분시켜 진정한 힘을 끌어내야 한다.

고위마족정도 되면 분명히 비장의 한수가 있을 터, 그걸 알아내야 확실하게 끝장을 볼 수 있다.

도발, 깨알 같은 도발로 이놈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야 한다.

“크르르르, 어떻게!”

“흥, 넌 이미 나에게 당한 거다. 네 수준으로 나의 능력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 같으냐?”

“틀림없이 6서클 마법사인데, 설마 내 진실의 시야를 속일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속인 게 아니라 네 눈이 삐꾸인 거다.”

“크르르르, 네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양팔을 잡아 뽑으면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 못하겠지.”

휘리리리링

웃, 내 양쪽에서 황색의 작은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이것은 강력한 부식의 힘을 지닌 삭풍! 파즈스가 일으킨 삭풍은 동시에 나를 향해 몰려들었다.

난 어쩔 수 없이 양팔을 들어 배리어를 친 채 삭풍을 막았다. 한손에는 나 자신의 배리어, 다른 한 손은 이반 경의 배리어다.

꽈드드득

윽, 역시 양손의 힘이 다르니까 중심을 잡기 힘드네. 다행히 8서클 배리어는 중화의 힘이 있어 삭풍을 어느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난 일단 한쪽 삭풍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다른 한쪽은 버티기로 했다. 그러나 파즈스는 그런 날 가만 놔두지 않았다.

크왕!

파즈스가 다시 달려들었다. 사자의 포효와 함께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내 팔을 동시에 공격해왔다.

팔을 움직이지 못하니 내가 당할 것 같지? 어림없다. 파즈스.

난 물러서지 않고 한 발을 앞으로 디디며 외쳤다.

“홀리 볼트!”

퍼퍼퍼펑

천정으로부터 은색의 창 같은 것이 연속해서 네 발이나 발사되었다. 미리아가 쏜 홀리 볼트는 마리포스의 조정에 의해 결계막의 모든 방향에서 발사할 수 있다. 그래야 미리아의 위치가 들키지 않으니까.

홀리 볼트는 정확하게 파즈스의 머리를 때렸다. 연속해서 정수리 부분을 가격당한 파즈스는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충격이 장난 아니지? 성녀의 백마법은 모든 마기를 관통하니 그야말로 해골에 직접 뚜들겨 맞는 느낌일걸.

이때다. 난 한발을 내딪은 반동을 살려 무릎을 꿇은 파즈스의 코를 발로 냅다 찾다.

퍽, 끄앙!

스톰 자이언트의 힘으로 콧등을 채이니 충격이 좀 온 모양이다. 그래도 깨갱이라고는 안 하네. 개랑 사자는 확실히 다르군.

파즈스는 고통이나 충격보다는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듯 두 눈이 발갛게 변한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사이 난 8서클 중화 마법으로 삭풍을 하나씩 가라앉혔다.

이 삭풍은 좀 골치 아프다. 파즈스가 집중을 안 해도 사라지지 않고 알아서 나를 공격하는 느낌이니 다시 소환하면 주의가 필요하겠다.

“세 번째 물러나는 건가?

난 태연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 태도가 상처난 파즈스의 자존심을 더욱 자극한 듯 그의 주변에 황색의 모래바람이 일어나 몸과 동화하듯 털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 날 불러내 도전할 만큼의 힘은 있구나. 그러면 이제 내 분노를 받아라.”

쿠오오오오

결계 전체에 모래바람이 분다. 난 급히 전신 배리어를 쳤다. 강식장갑 로브의 방어력을 믿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부르륵

땅에서 세 마리의 전갈이 튀어 나왔다. 크기가 딱 나만한 놈들인데, 꼬리의 독침이 검붉은 빛을 띠고 주변의 빛을 빨아먹는 느낌이 불길하기 짝이 없다.

“이게 너의 전력이냐? 길게 끌기 싫으니 조금 더 보여 봐라.”

“그래, 다 보여주마.”

파즈스의 뱀 머리를 한 꼬리가 길게 늘어나며 주변의 삭풍을 빨아들이더니 하나의 창으로 변했다. 창날이 뱀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인데 창자루도 곧게 뻗지 않고 조금씩 꿈틀거리는 게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이계라지만 나에게 무기를 들게 한 자는 수천 년 만에 네놈이 처음이다.”

역시 저런 수인족 계열의 마족은 코를 한 번 차주면 바로 끝힘을 쓰는군. 그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는 거겠지.

난 조심스럽게 몇 겹의 배리어를 다시 쳤다. 그리고 정령어로 외쳤다.

“뿌우야, 저 삭풍 어떻게 처리 안 되냐? 넌 대기 정령이니 중화라도 좀 해봐.”

[안 된다. 저거 정령력이 아니라 순수한 마기다.]

“그럼 저 창에 대해 아는 거 없냐?”

정령의 분석력은 의외로 쓸 만하다. 특히 마족의 능력에 대해서라면 은근히 주워들은 게 많다.

왜냐하면 마계란 곧 이곳 물질계를 제외한 모든 이계를 뜻하고, 정령력은 모든 이계에 동등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포트라가 있다면 정말 모든 정보를 줬을 것이다. 대기의 대정령이 보지 못한 마족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뿌우는 역시 그 정도까지 잘 알지는 못했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창날이 내 정령력을 분해하고 있다. 저거 닿으면 결계고 뭐고 다 날아갈 거다.]

“젠장, 결계 파괴 전문 무기로군. 가장 성가신 유형이네.”

막을 수 없는 병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피해야 하는데, 난 마법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벗어나면 이반 경의 주문을 쓰지 못한다.

어쨌든 상대의 수를 대충 다 봤으니 견적은 나왔다.

그때 파즈스가 창을 나한테 겨누며 외쳤다.

“네놈의 능력을 봐서 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정식으로 나의 계약자가 되어 이 물질계를 지배해라.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무례를 용서하고 네놈에게 위대한 삭풍의 힘을 주겠다.”

호, 파즈스 이 녀석. 진짜 냉정한 성격이네. 최고로 분노한 상황에서도 계약을 진행하려 하다니. 노예가 되면 정식 계약자가 못 되나 보군.

그런데 삭풍의 힘을 준다고? 땡기는데!

저런 순수한 마기의 발현은 정말 얻기 어렵다. 특히 이계인 이곳에서도 작용하는 힘이라면 고위 마족의 능력 중에서도 최고위급이라 할 만 하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묻자. 대륙을 지배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뭘 해야 하는 거지? 설마 너를 신으로 받들어야 하는 건가?”

파즈스는 내가 묻자 계약할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 듯 살짝 살기를 죽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다른 경쟁자를 모두 제거하고 네가 물질계를 지배하면 그 순간 계약은 끝난다. 내가 준 계약의 힘을 이후에도 쓸 수 있지만 내가 너에게 다른 요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얼라? 이거 조건이 왜 이리 좋지?

뭔가 사기를 치는 건가? 아니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파즈스가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정말 물질계를 지배하기만 하면 계약이 완료된다는 건데, 그래서 저놈이 얻게 되는 것은 뭘까?

“다른 계약자들도 모두 그런 조건으로 계약을 한 것인가?”

“그건 모르지. 난 너의 능력을 봐서 최대한의 관용을 베푼 것이다.”

하긴, 고위 마족의 특성 상 상대가 어리버리하면 영혼까지 빼 먹으려 들겠지. 하지만 이것으로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고위 마족들이 계약을 하는 주된 이유는 계약자의 대륙정복, 그것뿐이다.

“너의 계약자는 카이스난인데, 내가 새로 계약해도 되는 거냐?”

“카이스난이 정식으로 너를 후계자로 삼을 거다. 그러면 그녀의 아이도 너의 소유가 된다.”

얘는 지금 내가 미리아에게 혹 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봐, 내 취향은 최소한 20대 중반 정도 되는 여기사 누님이라고. 삼십대 초반의 글래머면 더 좋고. 십대 중반은 애 같아서 이성 같은 느낌이 안 난다니까.

그나저나 이놈이 왜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신으로 받들어 달라고 하면 그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정복만으로 끝이라면 실제로 이놈이 계약으로 얻어가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에잇, 부족한 정보로 고민해봐야 의미 없지.

“미안하지만, 난 너를 제압하고 싶거든. 나를 이기면 내가 새로운 계약자를 찾아주면 되지 않겠어?”

“크르르르, 그것 좋은 생각이군. 일단 너를 노예로 삼고 새로운 계약자의 조언자로 삼는다면 확실히 대륙정복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얘가 내 능력을 인정해 버렸네. 괜히 미안하지만 어쨌든 결판을 내자고.

난 다시 주문을 시전함과 동시에 미리아에게 계속해서 홀리 볼트를 쓰게 해서 전갈을 공격했다.

전갈은 세 마리지만 땅과 천정, 그리고 결계의 벽 측면으로부터 무작위적으로 튀어나오는 홀리 볼트에 몇 번 얻어맞고는 갑주가 깨어져 노란 체액을 흘리게 되자 더 이상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파즈스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도 달려들지 않고 신중하게 나를 노렸다. 세 번이나 공격했다 물러나고, 코까지 채여서 이제는 더 이상의 실패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눈치다.

이번에 오는 공격은 정진정면 파즈스의 분노를 담은 최고의 공격이리라. 난 전갈들을 상대하면서도 감각은 파즈스에게 집중시킨 채 대비를 했다.

이반 경은 나의 요구대로 최고의 방어마법과 강화마법을 계속해서 내 몸에 걸어주었다.

그 사이 서피는 계속해서 카이스난에게 압력을 가해 그녀의 움직임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스난은 점점 서피의 힘을 흡수, 동화함으로써 결계에 적응을 해나가는 중이다.

곧 카이스난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될 것이고, 파즈스는 그것에 맞추어 공격을 할 생각인 듯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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