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45화
드디어 준비가 되었다.
난 마도사의 경지인 6서클이 되었고, 미리아는 3서클에 무사히 도달해서 홀리 볼트 마법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난 미리아에게 홀리 볼트를 최대한 빨리 연사할 수 있도록 보름에 걸쳐 반복 연습을 시키는 한 편, 미리아가 들어갈 마법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어갈 마법진은 결계의 외부에 만든다. 그래야 파즈스가 미리아를 공격할 수 없으니까. 한 마디로 안전이 보장되는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만 하는 거다.
그걸 돕는 것은 뿌우와 마리포스, 뿌우는 결계에 구멍을 뚫어 미리아의 홀리 볼트가 통과하도록 하는 역할이고, 마리포스는 마법의 강화와 파즈스의 좌표 확인이다. 파즈스가 환상 계열의 능력을 발휘하면 눈으로 보고 쏘는 것은 의미 없다. 오히려 아군에 대고 쏘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하지만 마리포스는 결계 안에 절대좌표를 가지고 있다. 파즈스가 어떤 방법을 써도 마리포스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다. 옛날 나도 못 하는 일을 파즈스가 한다면 답 없는 거다.
“일단 이걸로 공격 포대는 완성한 거고, 그 다음에는 내 차롄가.”
나도 마법진이 필요하다. 바로 마족소환진이다.
마족소환진은 기본적으로 소환된 마족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장치가 되어 있다. 소환된 존재는 마법진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기본 계약에 응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소환자를 공격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난 싸우기 위해 그놈을 소환하는 거니까 마법진의 힘에 기대어 안전을 꾀할 수는 없다.
“삼중 마법진을 짜자. 소환, 집중, 그리고 전이.”
난 기존의 마족소환진 외곽에 다시 두 개의 동심원을 그리고 집중과 전이의 효과를 각각 추가했다. 이것을 위해 입체 마법진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는데, 뿌우가 결계 전반에 영향을 주니 상부를 담당시키고, 다시 이반 경이 왔을 때 땅의 정령의 힘을 하부에 연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전이는 바로 이반 경의 힘을 받기 위한 것으로 결계 밖에 이반 경이 들어갈 마법진을 설치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데, 이반 경을 결계 안에 들이면 그는 카이스난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카이스난의 영혼에 현혹될 수 있기 때문에 파즈스가 이반 경에 대해 눈치를 못 채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만큼 이반 경은 외부에서 도움을 주어야 하고, 내가 그의 도움을 최대한 받을 수 있도록 전이의 마법진을 설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결계 안에는 나와 렉스만 남고 미리아와 마리포스, 그리고 이반 경은 밖에 남는다. 이반 경이 없었다면 마리포스를 안에서 싸우게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안정적이다.
아참, 서피는 결계 그 자체이자 가장 재미있는 함정이다. 집중의 마법진은 서피 때문에 친 거다. 서피의 진정한 의미를 알면 파즈스는 뒷목 좀 잡을 거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두 개의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릴 뿐.
두 개의 달이 모두 최대로 커지는 것은 삼년에 단 한번, 기본적으로 마족의 소환은 이날만 가능하다. 그래서 난 무리를 해서라도 이날 전에 모든 준비를 끝낸 것이다.
이반 경은 며칠 전에 도착해서 내 설명을 자세히 들었다. 그는 마녀의 결계와 전이 마법진에 감탄해 했다.
“제가 하며 가르침을 구했지만 이미 정령복합 마법진을 가르쳐 준 이상 이반 경은 원하는 마법진을 모두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거군요.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결계에 대한 것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결계 역시 알려드릴 수 없어요. 적어도 이반 경이 결계의 특성에 대해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이반 경은 결계의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어요.”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결계 주변에 머물면서 연구를 해 보도록 하지요.”
“후훗, 계획대로라면 내일 이 결계는 해체될 거예요. 안타깝지만 이번에 경이 결계를 연구할 시간은 없겠군요.”
“며칠만이라도 여유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해체 하는 게 아니라 해체될 거예요. 기한이 다 되었으니까요. 대신 이반 경께는 새로운 숙제를 드리죠.”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이반 경의 배움에 대한 욕망은 진짜다. 정말 이자는 9서클이 되기 전에는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 그 점이 나와 다르구나.
그가 지고의 경지에 오를지 못 오를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그는 전력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 같다.
숙제의 난이도를 한 단계 정도 더 올려도 되겠군.
난 마음속으로 이반 경이 좋아할 지 싫어할 지 알 수 없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마족 소환진 안에 선 나는 신중하게 주문을 외웠다. 제물은 없다. 대신 전대 계약자인 카이스난의 이름으로 소환을 했기 때문에 파즈스는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이스난이 이름으로 소환을 한다는 것은 딸인 미리아와 관계가 있다는 의미이니까.
파즈스에게는 계약의 산물인 미리아의 회수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미리아야말로 그의 힘으로 탄생한 그의 힘의 일부이기 때문에 회수하지 않으면 힘의 손실로 이어진다.
고위 마족에게 있어 크던 작던 간에 힘의 손실은 절대적으로 싫어하는 일이다. 비단 고위 마족뿐 아니라 상위 영격체는 모두 그렇다.
힘에 대한 한 그들은 가장 엄격한 구두쇠인 것이다.
우우우우웅
마법진이 반응한다. 파즈스가 소환에 응한 것이다. 나는 다시 마력을 집중해서 외쳤다.
“마왕 파즈스여! 카이스난의 계약에 응한 자여! 이제 나 렌의 소환에 응하라!”
꽈드드드드
마법진 외곽에 있는 땅 한쪽이 급격히 말라붙어 모래가 되었다. 그러면서 모래속으로부터 거의 거인 크기의 사자머리의 날개달린 파즈스가 나타났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계에서는 마신으로 추앙받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위압감이 확실히 장난이 아니었다.
“과거의 계약을 기억하는 자여. 감히 깨어진 계약을 들추어 나의 분노를 산 자여.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대의 육체는 모래로 화해 전갈들의 잠자리로 쓰일 것이다.”
“만족이라, 지금 상황에서 마왕 파즈스가 만족할 만한 제물은 카이스난이 낳은 딸이겠지?”
“그대는 나를 불러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를 지니고 있구나. 어디 있느냐? 카이스난의 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녀는 훌륭한 성녀가 되었고, 이번 계약에 충실히 따르기로 약속했다.”
“좋다. 성녀가 된 카이스난의 딸을 제물로 나를 소환한 렌은 원하는 대가를 말하라.”
“간단하다. 난 파즈스 너와의 전투를 원한다. 너를 제압하고 너의 힘을 내 힘의 일부로 삼겠다.”
“크크크크크,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그것이 정말 너의 소원인가?”
“그게 다가 아니지. 준비된 것이 또 있다. 주변을 봐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결계는 카이스난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이다. 그것을 내가 강화했다.”
“크르르르, 훌륭한 결계군. 고위 마수를 핵으로 삼은 건가?”
“그렇다. 이미 나의 노예가 된 다스 서펜디움이다. 이 결계와 나 자신이 또 다른 제물이다.”
파즈스는 그때서야 내 소환진에 방어에 대한 규칙이 없는 것을 깨달은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방어 규칙이 없는 이상 언제든지 그는 나를 없앨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능력이 되면 말이다.
“그것에 대한 대가는?”
“카이스난의 영혼, 그녀를 이 자리에 불러라. 그리고 결판을 내자. 승자는 모든 것을 얻고, 패자는 남김없이 승자에게 귀속될 것이다.”
“재미있군. 성녀와 다스 서펜디움, 그리고 버릇없는 마법사라. 좋다. 네놈이 그걸 원한다면,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다면 계약을 하지.”
응했다. 역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고위마족답군. 하긴 파즈스는 지금 자신이 질 거란 생각은 모기 눈곱만큼도 안 할 거다. 왜냐하면 고위마족을 소환해서 싸워 이기는 것은 8서클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일말이 기대라도 하는데, 난 아직 6서클이잖아.
고위마족이 6서클과 싸워서 졌다고 하면 진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으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런데 그게 현실로 일어나거든. 파즈스, 넌 앞으로 최소한 천년은 마족들 간에 왕따가 될 거다. 어쩌면 5천년쯤 갈지도 모르고.
난 파즈스가 카이스난의 영혼을 소환하는 것을 보았다.
녹색의 영체로 출현한 카이스난의 영혼은 이미 마기에 오염되어 있었다.
“부르셨나요? 위대한 사막의 마신이여.”
“나에게 죄를 지은 노예 카이스난, 이제 죄의 일부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저자를 처치하라.”
“오오, 이 죄 많은 노예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완벽하게 세뇌되었네. 혹시 고문하느라 아직 세뇌를 안 시켰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까진 아니었군.
이걸 보면 파즈스는 지극히 냉정한 성격임을 알 수 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사기 친 계약자의 영혼은 온갖 고문을 하면서 수백 년 정도는 가지고 논다고 알고 있는데 불과 십 수 년 만에 노예로 만들어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난 급히 마법을 시전하며 외쳤다.
“서피, 그녀를 막아랏!”
크오오오오
결계의 벽을 따라 헤엄치고 있던 서피가 괴성을 내며 마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기의 압력이 카이스난의 영체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순수한 마력만이 영체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다.
“이익, 누가 쳤는지 지독한 결계로군요.”
댁이 친 결계에요. 내가 손을 좀 보긴 했지만요. 카이스난은 이 결계에 대해 전혀 기억을 못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살을 할 때 이 부분의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즈스는 카이스난의 영혼을 손에 넣고도 미리아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자, 파즈스. 서피랑 카이스난은 따로 놀라 하고 이제는 우리도 재미 좀 보자고.”
“크르르르, 정말 버릇이 없구나. 네놈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주겠다.”
“내가 보기에 넌 자기 소유 영혼을 그렇게 소멸시킬 성격은 아닐걸. 아마 정성들여 세뇌시킨 후 노예로 쓰겠지.”
카이스난을 봐. 난 손가락을 까닥거려 파즈스의 협박이 거짓임을 주장했다. 그러자 파즈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벌려 크게 포효를 했다.
크와아앙
“어이쿠, 사자 얼굴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장난 아니군.”
이건 마법에 당하기 전에 고막이 터져 버리겠다. 다행히 강식장갑 로브가 어느 정도 음파를 막아주었기에 견딜 만은 했지만 난 얼른 음파 차단 마법을 시전해 필요 이상의 고음이 내 귀를 핍박하는 것을 막았다.
그 사이 파즈스는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손톱으로 내 머리를 갈겼다.
난 이를 악 물고 스태프를 들여 파즈스의 손바닥 가운데를 찔렀다.
팍, 파지지직
스태프 창이 파즈스의 손바닥을 뚫지는 못했지만 안에 담긴 전격의 힘이 손을 타고 파즈스에게 흘렀다. 뿌우는 안에 없지만 그동안 충전한 정령력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난 상체가 휘청했지만 그의 손힘을 버텨냈다. 내가 낀 스톰 자이언트 벨트의 힘이다.
파즈스는 움찔 하며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네 놈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겠지? 전력으로 덤벼라, 파즈스.”
“좋다. 모처럼 만나는 싱싱한 제물이구나. 육체를 잡아먹고 영혼은 노예로 부려주마.”
이건 공갈협박이 아니다. 파즈스는 입을 크게 벌리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단숨에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