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44화
7장 마족소환
마족이나 마족의 힘을 이용한 흑마법과 싸우는 데에는 백마법 계통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백마법은 마법사 중에서도 따로 특이한 재능이 있는 존재만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영역이다. 이반 경이나 지금 나와 같이 있는 미리아는 그 특이한 재능의 소유자라서 익힐 수 있지만 난 좀 애매하다.
사실 내 경지까지 오면 마나의 성질은 다 거기서 거기라서 익히려면 익힐 수 있지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딱히 백마법을 안 익혀도 마족과 잘 싸울 수 있다는 거다.
하다못해 흑마법으로 싸워도 충분할 정도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마도사 영역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상 전력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즉, 수련이다.
마침 이곳은 마기로 가득 찬 결계이니 이걸 이용해 수련을 한다면 확실히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2년! 2년이면 돼. 그 사이 미리아 너도 죽어라고 마법수련을 해. 알았지?”
“응, 숙제 안 빼먹고 다 할게.”
“그리고 너, 서피.”
“말하라 주인이여.”
“넌 결계의 새로운 동력원이 되라.”
“난 지금 힘이 거의 없다. 여기서 더 힘이 빨려나가면 소멸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결계의 핵 속에 넣어준다고. 먼저 그 힘을 빨아먹고, 그 다음에는 이 안에 가득 찬 마기까지 흡수하라고. 2년 내에 충분한 힘을 키워야 하니까.”
“알았다. 그럼 내가 결계의 핵이 되겠다.”
“그 다음에 마리, 넌 미리아가 마기를 정화하는 것을 도와줘. 단순히 정화하는 게 아니라 그걸 흡수해야 하니까 네가 통로가 되어야 할 거야.”
“알겠어요.”
“이 언니를 통해서 정화를 해야 해?”
“그래, 말하자면 마리는 당분간 네 마법 스태프와 같은 역할을 할 거야.”
“우웅, 잘 모르겠지만 방법을 가르쳐주면 할게.”
“그래, 그리고 뿌우야.”
“뭐냥.”
“결계 천정에 정령만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을 하나 뚫어줄 테니까, 넌 주변 상황을 항상 살펴. 특히 이반 경이 오면 나한테 알려주고.”
“숲 전체를 살펴야 하냥?”
“이곳을 중심으로 가능한 한 넓은 범위를 살피라고.”
“알았당.”
“좋아. 이걸로 기본 준비는 되는 거니까 이제는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줄 거야.”
난 모두가 할 일을 지시한 후, 내가 할 일을 하나씩 처리했다.
우선 미리아에게는 백마법의 정화마법을 가르쳐줘서 마기를 정화하라고 시켰다. 원래 미리아는 성녀의 재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마기를 저절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긋하게 지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런 방법은 카이스난이 백마법을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것이고, 난 주문이란 주문은 다 아니까 가장 빠르고 효율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정화마법을 마리포스의 몸에 주입하면 마리포스는 그것을 증폭시켜서 운용한다. 연구실의 자아였던 마리포스는 힘을 생성하지는 못해도 변화시키거나 운용하는 것은 아주 익숙하다. 인간보다 훨씬 세밀하고 복잡한 수십 가지 일을 한 번에 진행할 수 있으니 마기의 정화도 최적화 시킬 것이다.
이것으로 미리아는 마나뱅크에 마기를 가두고 정화하는 이반과 거의 비슷한 효율로 마나를 축척할 수 있다. 그리고 위험도 없다.
불공평하다고? 원래 남자 제자와 여자 제자는 차별을 좀 하는 거다.
그 다음에는 결계를 손보았다. 원래 결계의 핵은 카이스난이 가지고 있던 마녀의 구슬이었다. 난 그것을 찾아내어 구슬 속에 서피를 집어넣었다.
서피는 처음에는 사람 머리만한 수정구슬에 갇히는 게 싫다고 난리를 쳤지만 일단 들어간 이후에는 안에 가득 찬 마나에 만족해서 열심히 헤엄치며 힘을 흡수했다. 그러더니 곧 결계를 장악하고 벽 전체에 걸쳐 헤엄을 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2차원화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 뒤 난 결계를 구성하는 마법진을 바꾸어서 약속했던대로 마기를 흡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안의 마기는 카이스난이 평생 모은 마나에 파즈스와의 계약에서 얻은 힘, 그리고 그녀가 아는 모든 저주 주술이 포함된 거라 성녀의 재질을 지닌 미리아라 해도 수십 년에 걸쳐 정화, 흡수해야 하는 양이다.
그런 만큼 아무리 마리포스를 이용한다 해도 미리아가 2년간 흡수할 양은 결계 전체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서피에게 흡수시킬 계획인 거다. 그래야 2년 후에 서피도 전력으로써 한 팔 거둘 수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결계에 뿌우가 드나들 정령홀을 설치하니, 비로소 내가 할 일이 끝난 느낌이다.
이제 남은 것은 수련 뿐, 난 집 한 구석에 내 방을 마련하고 정식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미리아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하루 종일 수련에 몰두했다. 생각해보니 과거에도 4서클 이후에 6서클이 될 때까지가 가장 수련에 불타올랐던 것 같다.
그때는 정말 마도사가 되면 세상을 다 얻을 것 같은 느낌에 매일매일 불타올랐는데, 막상 6서클이 되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스승님의 엄격한 말씀이 기다리고 있었다.
젠장, 내가 수련하자고 환생한 건 아닌데. 그지 발싸개 같은 마족 때문에 이 고생을 하네. 두고 보자, 마족 놈들.
세월이 흘렀다. 그래봤자 한 8개월쯤 지난 거지만.
난 예상대로 5서클에 올랐고, 미리아는 2서클이 되었다. 미친 듯 한 성장 속도다. 미리아가 내가 아닌데 어떻게 1년에 한 서클씩 오르는 거냐. 성녀의 재질이 무섭긴 무섭구나.
하긴 지금 미리아의 성장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백마법만 죽어라고 익히면서 편향적으로 서클만 뚫고 있다. 이러면 5서클에서 6서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난 이점에 대해 미리아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넌 마법사가 아니라 마녀야. 마법은 취미랄까 흥미랄까 그런 거 때문에 배우는 건데, 어쩌다보니 성녀의 재질까지 있어서 백마법은 무지하게 잘 익힐 수 있거든. 하지만 그것도 5서클까지야. 나중에 성녀 본연의 힘을 깨우쳐서 고위 백마법을 본능적으로 쓰게 되겠지만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기는 어려워.”
“그럼 그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해?”
“마녀의 주술을 익혀야지. 네 어머니 카이스난이 익혔던 것들 말이야. 그것도 잘 익히면 충분히 쓸 만해.”
“엄마는 내가 주술을 익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그건 기존의 주술이 주로 저주같이 사악한 요소가 많아서 그런 건데, 내가 보니까 이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그래. 넌 백마법과 주술을 결합해서 세상과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주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그게 가능할까?”
“넌 가능해. 내가 가르쳐주니 더 확실하지. 넌 주술을 완성시킬 수 있어. 지금까지 반쪽짜리였던 주술을 말이야.”
“알았어. 노력해볼게.”
“그래, 하지만 지금은 일단 3서클 뚫는데 주력해. 그 정도는 되어야 1년 후에 너도 한 몫 할 수 있거든.”
“응!”
미리아는 1년 뒤 파즈스를 소환할 때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말에 흥분이 되는 듯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그때 그녀가 써야 할 마법은 바로 홀리 볼트. 라이트닝 볼트의 백마법 버전인데 마기를 파괴하는데 발군의 힘을 발휘한다. 미리아는 그걸 강화마법진 안에서 사용할 것이다. 말하자면 고정 포대와도 같은 역할이랄까? 성녀가 쏘는 홀리 볼트의 위력은 눈으로 보기 전에는 나도 쉽게 견적이 안 나올 정도로 강할 터. 3서클 마법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목표를 가지고 수련을 했는데, 일 년이 조금 지나자 이반 경이 돌아왔다. 뿌우의 보고로 난 이반 경이 숲에 들어왔을 때 알고 미리 결계 밖으로 나가 그를 만났다.
난 이반 경에게 숙제를 모두 해결한 뒤에 오라고 했는데 벌써 오다니, 일 년 만에 마나뱅크의 마기를 모두 정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이 간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일 년만입니다. 그들에 대한 조사를 끝났나요?”
“조사를 했는데 애매한 부분이 있어 일단 스승님께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뭔가요?”
“벌렌드 백작의 뒤에는 하놀렌 가문이 있었습니다. 전후 상황을 보건데 아무래도 하놀렌 가문은 마족의 계약자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건드리면 므란비아 왕국의 정규군까지 움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반 경의 판단이 옳다. 하놀렌 가문은 이곳 므란비아 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마도가문인 만큼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왕국 전체가 들고 일어난다.
그래, 역시 하놀렌 가문이 엮여 있었구나. 골룬 광산 정도의 사건을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마도 가문이 눈치 못 채는 건 말이 안 된다.
문제네. 마도 가문에 마족의 계약자가 있다면 손쓰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군. 적어도 증거를 잡기 전에는 말이야. 이거 정말 전쟁이라도 벌여야 하나?
“왕국 자체에 마족의 계약자가 있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쪽은 조사를 했지만 그런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그쪽은 그냥 놔두고 골룬 광산에 누가 오는가만을 살펴요. 내가 그곳에 대해 의아해 하는 점은 마족의 계약자가 세상을 점령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제거하려 하는데, 어째서 새로운 계약자를 탄생시키려 씨를 뿌렸는지를 알고 싶은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볼스테아 왕국에 있는 콘돌스핀 마탑에 가서 거기 있는 렉스라는 개를 데려와 주세요. 콘돌스핀 마탑에는 내가 쓴 편지를 전해 주시고요.”
“그렇게 하지요.”
이반 경에게 이런 잔심부름을 시키기에는 좀 미안하지만 따로 일 시킬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다행히도 이반 경은 이런 면으로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성격인 듯 순순히 승낙을 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1년 후에 고위마족 하나를 소환해서 싸워야 하니 이반 경도 그때 힘을 보태주세요.”
“고위마족을 소환하실 겁니까?”
“그래요. 계약자 하나를 찾았어요. 이 기회에 뿌리를 뽑죠.”
“예, 그것 참 잘 되었군요.”
싸운다니까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네. 이 사람 천성적으로 전투를 좋아하는구나. 마법사치고는 참 특이하다.
어쨌든 난 이반 경에게 골룬 광산을 감시하며 수련을 하다가 1년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흑마법의 마법서를 건네며 말했다.
“1년간 이 흑마법서에 쓰여 있는 모든 마법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파해법을 찾으세요. 상대는 고위마족, 기본적으로 흑마법 정도는 수식 없이 사용할 테니 충분히 대비하는 게 좋아요.”
“수식 없이 마법을 쓴다면 쉽지 않겠군요. 알겠습니다.”
이반 경까지 있으면 뭐 마족의 소환체 정도는 정말 어렵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놈을 때려잡는 걸로 끝나지 않고, 그 뒤에 어떻게 하느냐지.
아직 시간은 1년이나 있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준비하자.
나는 다시 결계 속으로 들어가 수련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