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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43화 (43/250)

로엔의 마나뱅크 43화

보통 사람도 이정도 마기에 갇혀 살면 마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미리아는 단 한 점의 마기도 없는 청정 인간 소녀 그 자체다.

태생도 무시, 환경도 무시하고 청정하다니, 이건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어머니가 남긴 책 같은 거 있어?”

“응, 엄마 서재에 많아.”

“그거 좀 볼게.”

난 미리아의 모친인 카이스난 드림해그의 서재로 갔다. 마법사의 연구실처럼 기묘한 실험기구가 놓인 방이었다. 한쪽 벽면은 각종 마법에 관한 서적들로 꽉 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인간의 책이 아니라 엘프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나뭇잎 책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카이스난의 일기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일기는 책장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미리아는 아직 꺼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도 결계와 결부되어 있어서 결계가 걷히기 전에는 아예 책장에서 뽑히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그걸 확인하고 책장에 새겨진 마법의 힘을 슬쩍 조작했다. 그럼으로써 결계와의 연결을 옆에 있는 ‘마법을 연구할 때 잘 걸리는 성인병에 대한 예방법’에 옮겼다.

“이걸로 된 거지.”

미리아와 난 일기를 뽑아 같이 읽어보았다. 사실은 내가 먼저 보고 싶었지만 미리아가 눈을 번쩍이며 꼭 봐야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이 일기는 결국 미리아가 읽으라고 쓴 것일 테니까.

과연 그 안에는 카이스난이 한 일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계약대로 미리아는 모든 마기를 정화시키는 성녀의 재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반마족이면서 성녀인 셈이다.

나는 파즈스에게 말했다. 내가 다른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물질계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싸울 절대병기가 필요하다고, 꿈속을 지배하는 것으로 경쟁자 이외에는 거의 모든 인간을 세뇌시킬 수 있게 되었지만 경쟁자에게는 이 힘도 소용없다. 정작 나 자신의 힘이 강해진 것은 없으니 아무래도 불리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파즈스는 계약에 동의했고, 미리아는 마인과의 전투에 대비한 절대병기로 태어났다.

하지만 미리아야,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즈스를 속이기 위한 구실, 난 네가 마인들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란다. 내 딸이 경쟁자들의 손에서 벗어나 물질계에 닥쳐올 가장 가혹한 마인들의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성녀의 재질이 필요한 것이다.-

“허, 너 성녀였어?”

난 황당한 표정으로 미리아를 보았다. 생각해보니 오러클의 능력에, 새를 부리는 능력은 서큐버스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 그야말로 표준 성녀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미리아는 꿈 침투 능력을 소유한 성녀인 셈이다.

최곤데! 왜 최고냐고?

성녀가 꿈 침투가 되면 정신치유가 된다고.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말이야. 서큐버스 같은 정신계 마족에 의한 세뇌도 모두 고칠 수 있고, 한 마디로 서큐버스의 천적 같은 존재랄까?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능력에 정신치유까지 되면 그건 선천적 백마법 마스터라고 할 수 있잖아. 요즘 내가 백마법하고 인연이 좀 있네. 이반도 그렇고 미리아도 그렇고.

미리아는 아직 성녀의 재질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모르겠는 듯 내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몰랐어. 그런데 절대병기…….”

이크, 그 부분은 대충 넘어가자고.

“사기 친 거래잖아. 계속 읽어보자.”

난 더 이상 미리아가 절대병기에 집착하지 못하게 딱 잘라 말하고 얼른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미리아를 낳고, 난 계약에 의해 내 몸이 점점 마기에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10년도 되지 않아 파즈스의 뜻대로 물질계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만 가진 존재가 될 것이다. 애초에 계약한 목적도 잊고, 딸인 미리아조차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될 테지.

참을 수 없다.

파즈스, 넌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지만 한 가지만큼은 간과했어. 그건 바로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너와의 계약을 일부로 파기하는 거야. 내 영혼은 너한테 줄게. 고문을 하던 마수에게 먹이든 마음대로 써. 하지만 그것으로 넌 내 딸에게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해. 내 딸은 자유로운 존재야!

내 딸 미리아야. 이 일기를 읽을 때쯤 넌 결계안의 마기를 모두 정화할 정도로 힘이 강해졌을 거다. 그러면 넌 다시 결계를 치거라. 너의 몸 안에 자란 신성력을 이용해서 어떤 마의 종자들도 범접할 수 없는 결계를 쳐야 한다.

앞으로 당분간은 그들의 시대가 올 거다. 고위마족과 계약한 마인들의 시대! 혼란이 극에 달한 대전쟁의 시대다.

그들 중 승자가 탄생할 때까지 전쟁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전쟁은 족히 100년 이상 계속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가혹한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이용당하고 희생당해 죽거나 노예가 될 것이다.

미리아야, 넌 그 사이 결계 안에서 살며 꼭 살아남아라. 그것이 너의 어미인 나 카이스난의 의지란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 바로 나의 영혼을 소유한 고위마족 파즈스의 유혹이다. 그놈이 내 영혼으로 너와 계약을 하자고 해도 절대 하지 마라. 계약을 해도 난 풀려날 수 없고, 결국 너마저 그의 소유가 될 게 뻔하다.

설령 내가 다시 나타나 권해도 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아닌 파즈스의 노예일 뿐이니, 괴롭더라도 이 어미를 부정하거라. 넌 현명한 아이이니 내 뜻을 알아줄 거라 믿는다.-

흠, 그러니까 카이스난 드림헤그는 물질계가 마인들로 인해 난리가 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자신의 딸이 그동안 무사히 살 수 있기를 원한거군. 하긴, 이 결계 안에 있는 마기를 모두 정화하고 그걸 흡수해서 결계를 깰 정도가 되면 충분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지.

결국 이 결계는 미리아를 가두거나 숨기는 기능도 있지만 진짜 목적은 마기를 가두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미리아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엄청난 마나를 흡수하게 되는 거고.

성녀의 재질이라, 카이스난이 정말 재밌는 생각을 했다. 고위 마족의 힘을 빌려 성녀를 낳을 생각을 했으니까 말이야. 이건 정말 획기적인 발상이고, 결국 힘의 근원이 어떻든 간에 작용방법을 바꾸면 반대 속성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증거이다.

카이스난은 정식 마법사는 아니지만 거의 9서클에 근접한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감탄하는 사이 미리아는 일기장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가 마족에게 영혼을 빼앗겼어. 나 때문에. 후아앙.”

굉장히 슬픈 건 알겠는데, 왜 이리 애기처럼 우니.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에 후아앙은 아니잖니? 이때는 흐흐흑 정도는 되어야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탕 먹다가 떨어뜨린 줄 알겠다.

미리아는 지금까지 슬픔이라는 감정을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평생 거의 혼자 살았으니 감정이 풍부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표현이 너무 어색하다. 설마 제대로 울 줄도 모르다니.

그게 귀엽다면 귀엽긴 한데. 일기장을 계속 읽어야 하니 일단 좀 그치게 하자.

“마족한테 영혼 빼앗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만 울어.”

“엄마 영혼을 되찾아 올 수 있어?”

“당연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돼.”

“그럼 당장 찾아 줘!”

얘가 말로 쉽다고 하니까 진짜 쉬운 줄 아나. 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도 준비는 좀 해야 되니까 일단 진정하고 일기장을 계속 보자.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거든.”

“으응. 그럼 계속 봐.”

미리아는 내 말에 순순히 일기장을 다시 건네 주었다. 그리고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참고 나와 함께 일기장을 읽었다.

일기장 안에는 카이스난이 미리아에게 전해주고 싶은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숲의 마녀가 쓸 수 있는 주술 중 비법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다수 있었고, 신비에 쌓여 있는 엘프족의 도시 위치까지 적혀 있었다.

-신성 결계는 엘프족의 도시 인근에 치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그때 엘프족과 계약을 해서 서로 돕기로 하면 엘프족의 정령결계와 상호 연결된 신성결계를 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어미는 마녀라 그게 불가능했지만 성녀의 재질을 지는 너라면 그들도 받아들여줄테니, 가능하면 꼭 그렇게 하거라.-

“오호, 엘프족이 성녀는 받아준다는 건가? 미리아야. 너하고 있으면 엘프 구경도 해 보겠다.”

“그게 좋은 거야?”

“엘프가 숲에 들어가 인간과 접촉을 안 한지 천년이 넘었거든. 가끔 숲에서 추방된 엘프가 나오긴 하는데, 그들은 이미 종족의 힘을 대부분 읽어서 진짜 엘프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고. 아무튼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고,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가보자.”

“응, 레빈이 간다면 같이 갈게.”

“그래, 그래. 내 제자가 참 착하긴 해요.”

난 미리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계속 일기장을 읽었다.

마지막에 드디어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파즈스와의 계약서와 계약에 대한 정보다. 그곳에는 바로 파즈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보자. 파즈스는 이계의 마족 중 최고위를 차지하고 있는 고위의 존재이고 열사의 사자라는 이명으로 불린다. 사막의 열기와 삭풍, 그리고 전갈의 독을 자유롭게 조종하는군. 물을 순식간에 마르게 하는 능력도 있네. 설마 사람 몸속의 체액도 말릴 수 있는 건가? 그럼 좀 성가신데. 사자의 머리와 뱀의 남근을 가져 힘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직접전투도 무지하게 강하다는 소리네. 자존심이 강하고 남을 속이기보다는 강요와 협박을 좋아한다.”

마족 소환을 해도 아무나 오라고 하는 것과 상대에 대해 알고 지정하고 소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다. 심지어 흑마법을 쓸 때에도 고위 마족 중 하나의 존재를 명확히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난 파즈스를 상대하기 위해 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난 다시 카이스난이 그린 마법진의 도해를 살펴보았다. 파즈스를 소환하기 위한 마법진과 이곳 결계를 위한 마법진이 모두 그려져 있었다.

“좋아. 계획이 섰어.”

“뭔데?”

“일단 내가 6서클이 돼야 해. 그 사이에 여기서 수련을 해야겠어.”

“응.”

“그리고 그 사이 이 결계를 바꿀 거야. 마족소환진을 새로 설치해서 결계 전체와 연결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파즈스란 놈을 소환한 후에 그놈을 통으로 녹여서 이 안에 채울 수 있지.”

“그게 가능해?”

“어차피 고위마족은 자신의 영역에서 나오지 않아. 그놈이 소환진에 응해서 보내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 같은 거야. 힘의 일부지. 그런 만큼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

“그럼 엄마의 영혼을 되찾을 수 있어?”

“영혼도 되찾고, 힘도 얻자고.”

일석이조. 새둥지를 털면 새도 잡고 알도 얻을 수 있다.

그동안 고위마족의 계약자니 뭐니 심장에 칼빵도 맞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는데, 이제 겨우 한 놈 찾아냈으니 확실하게 털어먹어주지.

난 주먹을 부르르 떨며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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