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42화
이반 경은 나한테 세 가지 숙제를 받아서 떠났다.
한 가지는 나를 함정에 빠뜨린 씨돔 상회와 벌렌드 백작을 조사해서 이 산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을 캐내는 것이다.
단, 당장 급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면 그냥 조사만 해 놓고 몰래 감시할 뿐 따로 손을 대지 않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씨를 뿌리고 간, 그러니까 흑마법사들에게 고위 마수를 소환시켜주고 떠난 자를 찾아내는 거다.
가만히 지켜보면 언젠가는 그들이 다시 돌아와 상황을 볼 가능성이 크다.
흔히 말하지 않는가? 범죄자는 언제든 현장에 돌아온다고.
그 다음에는 내가 이번에 그린 마법진의 도해를 이해하고 이걸 응용한 진을 구성한다. 이번에 봉인의 진에 강화, 전이, 흡수의 성능을 추가로 설치했으니 이반은 자신의 특성을 살려서 정화와 치유의 백마법 효과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서 기존에 계약한 대지의 정령 이외에 또 다른 정령력이 필요한데, 난 불의 정령에 대한 계약식을 가르쳐주고 계약을 하라고 시켰다.
“미리 말하는데, 소환 계약은 한 가지 속성에만 전념하는 게 좋아요. 한 번에 두 속성의 정령과 계약하는 게 가능은 한데, 나중에 별로 안 좋아요. 그러니 불의 정령과는 그냥 필요할 때 정령력만 빌려서 쓸 수 있는 계약을 해요.”
“그런 계약법이 있군요.”
“정령력만 빌리는 거라면 4대 정령의 힘을 모두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 그만큼 힘이 들고 복잡하니 우선 메인은 대지를, 서브로 불을 사용하세요. 처음에는 한 번에 한 가지 힘만 써야 해요. 익숙해지면 둘을 동시에 쓰면서 힘의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으, 너무 많이 가르쳐 주는 거 아닌가. 이런 건 알아서 깨달아야 하는데. 하지만 저 마법진을 마음대로 변형하려면 두 가지 정령력을 이용한 입체 복합 마법진을 쓸 수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가르쳐 줘서 익힌 것은 나중에 또 다시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나 버린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적게 가르쳐 줄수록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아예 안 가르쳐 주면 길을 못 찾으니 또 안 되고.
그래도 정령 복합 마법진을 연구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정령에 대해서 다시 깨우치게 되니까 괜찮을 거다.
사실 9서클로 가는 길은 가르친다고 되는 건 아니다. 그냥 방향만 제시하고 알아서 연구하라고 해도 될까 말까다. 그것도 마지막 단계는 아예 단서조차 줄 수 없다.
이반 경이 만약 9서클의 경지가 된다면 그것은 나와는 또 다른 영역일 것이다. 그러니까 9서클은 자신만의 기적을 창출하는 영역인 셈이다.
어쨌거나 난 내가 이끌어줄 수 있는 부분은 아끼지 않고 가르쳐 줄 생각이다. 내가 전생의 스승과 현생의 스승에게 받은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은 아까 말한 마기의 정화다. 이것은 앞에 두 가지를 숙제를 한 후에 도전하도록 했다. 마나뱅크에 들어간 마기는 그냥 놔두어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그 사이 이반 경이 발전을 한다면 마나뱅크의 마기를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이걸 먼저 도전했다가 힘이 달리면 몇 년간은 고생을 해야 하니 순서적으로 가장 나중에 두고, 일종의 중간시험 같은 형태를 취하게 했다.
“숙제가 끝나면 하이델 숲으로 와서 날 찾고요.”
“명에 따르겠습니다, 스승님.”
거 참, 인사 한 번 깍듯하네.
“그리고 떠나기 전에 환상 마법진 좀 설치하고 가요. 정화되기 전 상태의 기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동굴은 내가 서피에게 육체를 줄 때 정화가 되어 깨끗한 상태다. 난 이반 경에게 산 아래에서도 마기를 느낄 정도로 강력한 환상 마법진을 설치하라고 지시한 후 먼저 산을 내려갔다. 체감까지 속이는 환상이 아닌 만큼 이반 경이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휴, 생각지도 못한 제자 덕분에 앞으로 좀 편하게 됐네.”
난 결과적으로 만사가 잘 풀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당분간 이반 경은 나대신 마족의 계약자를 찾는 일을 하게 될 거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그가 직접 손을 써서 계약자를 처리할 거고.
난 그 사이 미리아의 문제를 해결하며 나 자신의 성장에 집중하면 된다.
8서클의 제자를 두었으니 이대로는 안 된다. 이반 경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현재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 가능성이 크다.
그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해도 스승으로써의 체면이 말이 아니니, 일단 내가 성장하는 게 급하다.
나는 마리포즈와 함께 길을 재촉했다. 씨돔 상회에서는 날 죽었다고 생각할 테니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다.
“투명.”
파앗
난 마리포즈와 나 자신에게 투명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장거리 가속 마법을 걸어 보통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3배 빠르게 이동을 했다.
보통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하이델 숲을 목표로 여행을 계속하니, 보름도 되지 않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이델 숲은 시골 영지의 구석에 있는 그런 작은 숲이 아니다. 거대한 산맥 하나에 해당할 만큼 넓어서 외국에서도 지명을 알 정도이니 이제부터 이 안에 있는 미리아의 은거지를 찾는 것도 보통일은 아닌 셈이다.
“뿌우야, 한 바퀴 둘러봐라. 시력 공유”
파앗
“그럼 간당.”
뿌우가 돌개바람으로 변해 숲 안쪽으로 날아갔다. 난 시력 공유 마법으로 인해 뿌우가 보는 것을 같이 보기 시작했다.
숲, 숲, 숲, 그야말로 숲의 바다라 할 만 했다.
“생각보다 빡세겠네.”
목적지까지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꼬인 느낌이다. 이게 숲 안에서 오두막 같은 것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데, 아예 숨겨져 있는 결계를 찾는 거니까 더욱 귀찮다.
나는 투덜대면서도 집중해서 조금이라도 위화감이 있는 곳은 체크를 해 두었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 직접 가서 확인을 해보면 알 수 있으리라.
한참을 뿌우의 시선으로 숲을 살피니 결국 정신력의 한계가 왔는지 어지러움을 느꼈다. 마나는 안 달리는데 눈이 핑핑 도는 게 문제다.
나는 결국 시력공유를 풀었고, 뿌우는 그것을 알고 탐색을 중지한 채 돌아왔다.
“이거 다 찾으려면 몇 달 걸린당.”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야. 그냥 3일간 버틴 후 미리아가 오면 물어보자. 정확한 위치를 몰라도 단서는 얻을 수 있겠지.”
“그게 현명하겠당.”
우리는 일단 미리아와 만날 때까지 쉬기로 하고 며칠 간 머물 준비를 했다. 마법의 힘으로 즉석에서 작은 통나무집을 만들고, 난로와 침대, 탁자 등을 만드니 훌륭한 숲속의 쉼터가 되었다.
그 후 난 침대에 누워 쉬고, 마리는 사냥을, 뿌우는 요리를 했다. 마리의 요리는 당분간 신뢰를 할 수 없어서 고민하던 참에 의외로 뿌우가 요리까지 잘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큰 수확이다.
“대기의 정령을 소환해서 청소와 물걸레질, 요리, 설거지까지 시키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당.”
뿌우는 기가 막힌 듯 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정작 요리나 청소가 그다지 싫지는 않은 듯 열심히 했다.
녀석, 장래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군.
어쨌든 난 뿌우와 마리포즈 덕분에 3일간 빈둥거리며 모처럼의 휴식을 취했고, 3일째 되는 날 꿈속에서 미리아를 만났다.
“와, 벌써 도착했다고?”
“도착은 했는데, 그냥 숲 외곽이라 너희 집이 어딘지를 모르겠어. 혹시 찾아가는 방법 있니?”
“글쎄, 나도 우리 집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는 몰라. 그냥 숲 안에 있다는 것만 알거든.”
“으, 그럼 정말 다 뒤져야 하는 건가? 혹시 주변에 특징 같은 거 없어?”
“너를 만나러 갈 때 말고는 결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걸. 그때에도 그냥 숲의 길을 이용한 거라…….”
“그럼 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 하나를 결계 밖으로 던져 놓을 수 있지? 그러면 내가 위치추적 마법으로 그걸 탐색해 볼게.”
“그게 좋겠다. 뭘 던져 놓을까?”
“지금 지니고 있는 것. 내가 봐야 마법을 걸 수 있으니까.”
“그럼 이 허리띠 어때?”
“좋아. 잠깐 줘봐.”
난 미리아의 허리띠를 자세히 살폈다. 녹색의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는 마법 물품이 아니지만 꽤 고급품이었다.
“완전히 기억했어. 그럼 깨어나면 바로 결계 밖에 던져 놔.”
“그런데 혹시 짐승들이 물어 가면 어떻게 하지?”
“대충 위치만 확인하면 되니까 물어 가면 내가 찾아줄게.”
“응.”
다행이다. 이정도면 헛고생은 안 하겠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리아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다음 날, 약속했던 대로 미리아의 허리띠를 대상으로 위치 추적 마법을 펼치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범위를 최대한 넓게 잡았는데도 전혀 작동을 안 했지만 그냥 찾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다. 난 계속 마법을 유지하며 숲을 탐색했다.
그렇게 숲속을 3일정도 헤매니 드디어 위치추적에 허리띠가 걸렸다.
다행히도 짐승들이 허리띠를 물고 이동하지 않았는지 곱게 접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내가 접근하자 근처에 있는 나무 하나가 일렁이며 안쪽에서 미리아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야, 빨리 들어와.”
“하하하, 드디어 찾았다.”
오랜 여정 끝에 결국 미리아의 결계를 찾아낸 나는 얼른 갈라진 나무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주변 환경이 확 바뀌며 조금 넓은 들판이 나타났고, 제법 잘 지은 저택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내 눈에는 저택이 보통 저택으로 보이지 않는다.
“역시 마기에 휩싸여 있네.”
“정말?”
“응, 저 건물 전체가 담긴 마기는 고위 마수의 마기에 필적해. 근원이 뭔지 아니?”
“몰라, 렌이 한 번 조사해 줄래?”
“알았어.”
집주인인 미리아의 허락을 받았으니 제대로 한번 조사를 해 보자. 나는 일단 집의 재료부터 확인을 했다.
“역시 재질이 이상하다 했더니 마수의 뼈로 골조를 세우고 비늘로 겉을 발랐네. 으음, 안쪽에 메워진 것은 피로 반죽한 진흙인가?
이정도면 정진정명 마녀의 호러하우스다. 기둥마다 새겨진 피의 의식은 혈마법의 저주 중 가장 강력한 것들만 골라서 넣은 듯 한 느낌이다.
그런데 그 저주가 오히려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마기를 막고 있다.
“이독제독인 거군. 미리아네 엄마가 꽤 실력이 좋았나 보다.”
“정말?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근데 제일 이상한 건 너야. 너에게는 아무런 마기도 느껴지지 않아.”
정말 이상하다. 하프 서큐버스라면 마기가 없을 수 없는데. 내 감각에는 미리아의 몸에 전혀 마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정도라면 미리아가 굳이 결계 속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는데?
웨어울프킹의 심장보석을 지닌 나의 시야는 다른 고위마족의 계약자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 내 눈에 평범해 보이면 그들 눈에도 같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