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40화
“정상적이라면 네 개의 다른 강화마법진이 부딪치면 서로 반발하죠. 보통은 작동을 안 하고, 자칫 잘못하면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이반 경이 아래쪽에 대지의 정령을 소환시켰고, 또 제가 위쪽에 대기의 정령을 소환시켰잖아요. 그러니 불과 물의 정령력은 극소화 된 상태지요.”
“아!”
“도식으로 써 볼까요? 두 가지 정령력이 지배하는 공간에서의 마나 흐름은 이런 식으로 단순화 되고, 그러면 이 네 개의 강화마법진이 서로 엉킬 정도로 복잡한 파동은 일어날 수 없어요.”
“오오오오오오!”
이반 경은 입에서 탄성인지 비명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를 내면서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자가 지금 이걸 한 번 듣고 이해하는 건가. 그렇다면 하나의 퍼즐을 풀고 다음 단계에 가까워졌다는 거군. 대단하다.
2개 이상의 복합 정령력과 기존 룬어마법진을 융합한 입체 마법진은 말하자면 9서클의 영역이다.
나의 설명을 들은 이반 경은 지금 새로운 경지에 한 발을 디딘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게 시작이다. 완전히 기존의 영역을 넘어서려면 남의 설명이 아니라 스스로 모든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법을 넘어선 기적의 영역에 이르는 힘을.
어쨌든 난 모른 척 설명을 계속했고, 이반 경은 계속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이윽고 설명이 끝나자 이반 경은 무릎을 꿇고 나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예에?”
이건 또 뭔 황당한 소리지? 현존하는 마법사 중 제일 강한 사람 중 하나가 이 설명 하나에 갑자기 무릎까지 꿇다니!
난 미친 놈 보는 듯 한 눈으로 이반 경을 보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전 평생 저보다 더 높은 경지의 마법사를 만나면 항상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어떤 대가라도 치룰 테니 저에게 9서클 마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이반 경보다 더 높은 경지라고요?”
“설명하시는 마법진은 제가 오랫동안 연구해 왔지만 결과를 얻지 못했던 부분과 비슷하지만 더 뛰어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그대의 마법 경지를 잘 못 알아본 것을 보면 그대가 저보다 확실하게 한 단계 높은 마법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아, 이 인간. 지금 보니 진실의 시야를 썼네. 그래서 오해를 했구나.
나처럼 감지방어 마법을 쓴 자라도 마도사의 진실의 시야 마법에는 진짜 실력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본인보다 높은 경지의 마도사라면 진실의 시야마저 왜곡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이반 경은 진실의 시야로 내 진짜 실력을 보려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4 서클로 보이자 내가 9서클이라 진실의 시야를 왜곡시킨 거라고 판단 한 거다.
확실히 이반 경의 진실의 시야를 왜곡시키려면 8서클로도 안 되고 무조건 9서클이어야 한다.
그런데요. 나 진짜 4서클이거든요. 그것도 4서클 된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신입 4서클인데요.
말해도 못 믿겠지? 그리고 말 하면 안 된다. 이자의 눈을 보니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내가 정말 9서클의 지식을 가진 4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안다면 이자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내 지식을 빼내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반 경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반은 원래 마도 명문가의 태생이 아니다. 마법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평민의 자식인데, 10살 때 마법사의 소질이 발견되어 마탑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였고, 몇 년 안 되어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문제는 이반과 나이가 같은 마법사 중에 현 마탑주의 손자가 있었고, 그 손자는 나름 뛰어난 소질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반 경에 비교되어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마탑주는 결단을 내려 이반 경의 스승을 위협하여 가르침을 멈추게 했고, 이반 경은 탑에 갇혀 잡일만 하며 마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채 지내게 되었다.
그 결과 이반 경은 거의 20년간 3서클에 머문 채, 4서클 주문은 아예 접하지도 못했다. 그 후 이반은 자신의 동기들 중 상당수가 4서클의 경지에 올랐을 때 동기들에게 구걸하듯 빌고, 또 시키는 일을 해주면서 4서클 마법을 하나씩 익혀나갈 수 있었다. 이때 마탑주의 손자는 이미 5서클이 되어 당당하게 차기 탑주로써 인정을 받을 때였다.
그렇게 마법을 배워 겨우 정식으로 4서클이 된 후, 이반은 탑을 나갈 자격을 얻어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때부터 이반은 각국의 전쟁터마다 찾아다니며 스스로 가장 위험한 임무를 도맡아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항상 5서클 마법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서 이반이라는 마법사는 목숨을 걸고 5서클 마법을 익혀나간 것이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고 드디어 5서클 마법사가 된 이반은 처음으로 그에게 호의적인 마도사를 만난다. 마훔이라는 마도사는 이반을 비공식 제자로 받아들여 6서클 마법을 가르쳤고, 그 결과 이반은 너무나도 쉽게 6서클에 올랐다.
이반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더 높은 서클의 마법을 원했고, 20년간이나 1서클부터 3서클의 마법을 분석해서 4서클 마법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드문드문 배운 4서클과 5서클 마법으로도 경지에 오를 수 있었고, 남들은 벽이라고 느끼는 6서클은 스승의 친절한 가르침 속에 오히려 더 쉽게 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마탑으로 돌아온 이반은 마탑간의 주도권 싸움, 그러니까 가문의 수장 결정전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기존에 있던 마탑측이 아닌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대측에 선봉으로 나서서 과거의 동료나 선배들을 상대로 싸운 것이다.
3년이란 세월동안의 싸움에서 불리했던 세력비는 기적적으로 뒤집혔고, 결국 이반 측이 승리를 했다. 그러나 새롭게 가주가 된 마탑의 탑주는 이반의 전투력과 재능이 장래에 자신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애초에 약속한 7서클 마법서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암살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반은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워메이지. 그는 언제나 배신에 대한 대비를 했다.
이반은 가주의 음모를 미리 알아채고 오히려 그의 연구실에 침투하여 7서클 마법서를 훔쳐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가주는 노발대발하여 가문의 마법사들을 동원하여 이반을 찾았지만 몇 년을 찾아도 그의 행방에 대한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20년 후, 이반은 나타났다.
가주는 다시 가문의 마법사들을 데리고 이반을 처벌하려 했고, 그때 처음으로 이반은 자신이 8서클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바로 자기를 공격했던 마법사들을 멸하고 자신이 속했던 가문을 부수는 것으로.
익힌 것은 백마법이지만 실전에 대한 능력은 파괴마법을 주력으로 하는 어떤 마법사보다 뛰어난 이반, 세상은 그에게 헬비스트라는 이명을 붙였고, 결국 그게 평민이었던 이반의 성이 되어 버렸다.
내가 들은 이반 경의 성격은 은원이 극단적으로 확실하고, 가르침에 목말라 있었던 소년시절의 괴로움이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에게는 무슨 대가든 서슴없이 지불한다고 했다.
8서클이나 되면서도 9서클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자 어린 애처럼 무릎 꿇고 비는 것을 보면 소문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보기에 이반 경이 배신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자신을 거두어 마도사로 만들어 준 마훔에게 얼마나 헌신적으로 봉사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를 제자로 거두어 가르치면 어떻게 될까?
두 가지를 보아야 한다.
가르치면 정말 9서클이 될 것인가? 그리고 만약 9서클이 된 후에 무슨 짓을 할 것인가?
9서클 대마법사는 세상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반 경이 대마법사가 된 후에 이상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물질계는 그야말로 끔찍한 일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풋, 하하하하하하.”
거기까지 생각한 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쓸 데 없는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자를 가르치자. 세상에 나 말고 또 다른 9서클 대마법사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이자가 어긋나면 그때는 내가 그를 막으면 된다.
“이반 경.”
“예, 말씀하십시오.”
“다행히 나에게는 그대에게 가르쳐 줄 지식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가르쳐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제가 치룰 대가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재능 있는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 마도에 종사하는 자라면 누구나 명심하고 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 그 말은!”
갑자기 이반 경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절을 하며 말했다.
“제 진정한 첫 스승님이신 마홈 경께서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며 하신 말씀이십니다. 저 이반은 오늘에서야 생의 두 번째 스승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구나. 마훔 경도 이 말을 했구나.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어쨌든 이 70이 넘은 노마법사는 나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했다.
현존하는 2명의 8서클 마법사 중 하나이자 실전에서는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이반 헬비스트 경이!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거 맞지?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이반 경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대를 제자로 받아들이죠. 난 평생 두 명의 제자를 받았고, 그 중 첫 번째는 저를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제자는 아직 어리죠. 이반 경은 저의 세 번째 제자가 됩니다.”
“스승님, 제자 이반 헬비스트는 평생 그대의 가르침에 따라 노력하고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진명 도리오네 빌보리스를 걸고 맹세합니다.”
하, 진짜 강직한 사람이네. 설마 자기 진명을 밝히며 맹세를 할 줄이야.
“이반 경의 맹세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반 경이 왜 마족의 계약자들을 찾아다니는 지 알려주십시오. 저도 그들을 찾고 있으니 정보를 교환합시다.”
“예, 그러니까 저는 제가 8서클에 이르도록 도와준 제 애인의 유언에 따라 마족의 계약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애인의 유언이라는 말은 아까 들었는데, 그녀가 이반 경을 8서클이 되도록 도왔다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아는 지 이반 경은 그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전 과거 가문으로부터 7서클 마법서를 훔쳐 달아난 후 숲속에 숨어 혼자 익혀나갔습니다. 10년의 수행 끝에 겨우 7서클에 도달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세상에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나타나면 가문의 마법사들이 저를 찾을 것이고, 7서클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그때 그 가주만 해도 7서클이니 같은 7서클로는 감당이 어렵지.
“하지만 7서클에서 8서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령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마법서에 적혀 있었는데, 저는 그때까지 정령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꿈속에서 만난 여인은 제 고민을 듣고 정령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하더군요.”
“꿈속에서 만난 여인이 정령에 대해 알려줬다는 건가요?”
“예, 그녀의 이름은 카이스난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엘프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정령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카이스난? 혹시 카이스난 드림헤그 말인가요?”
“그녀를 아시는군요!”
알지. 내가 지금 그분의 딸을 만나러 가고 있거든.
하하하, 이런 게 인연이구나. 그러니까 미리아의 엄마인 카이스난 드림헤그가 이반 경의 애인이라는 거군. 하프엘프인 카이스난이라면 정령에 대해 알 수도 있지.
참 세상이 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이 기묘한 인연에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설명하라고 손짓을 했다.
“전 그녀가 기존의 소환진에 그녀가 가르쳐 준 정령지식을 응용하여 마침내 대지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지의 정령과 계약을 함으로써 계속해서 정령의 지식을 깨우쳐갔고, 마침내 8서클에 도달했습니다.”
“......”
“저는 저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지식을 가르쳐준 카이스난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만큼 든 저였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저의 구애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의 만남이 꿈속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째서요?”
“그녀는 고위마족과 계약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약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강력한 결계를 치고 안에서만 지내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그 결계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외부인이 결계를 통과하다 틈이 생겨서 경쟁자들이 자신을 감지하게 되면 제거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카이스난 드림헤그는 계약을 이행하지 않아서 능력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꿈 침투 능력은 남았지만 현실에서의 전투에 관한 능력은 거의 잃었기에 경쟁자들에게 위치가 발각되면 감당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원래 카이스난의 계약 내용은 바로 꿈 침투 능력으로 물질계의 실력자들을 하나씩 세뇌하여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카이스난은 아무도 노예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단지 가끔 오러클, 그러니까 예언자의 능력이 발현될 때마다 자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꿈속에 들어갔고, 그러다가 이반 경을 만나 꿈속의 애인관계가 되었다.
“저는 그녀의 경쟁자가 모두 사라진다면 그녀가 결계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판단했기에 그때부터 마족의 계약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카이스난은 죽었습니다. 계약 위반의 후유증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딸을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그녀는, 카이스난은 저에게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딸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를 세뇌했다고 하더군요. 진심으로 저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그냥 이용하려는 마음이 강했다고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여전히 그녀의 유언을 따르려는 것인가요?”
“저는 그녀가 어떻게 말했든 약간은 저를 사랑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세뇌를 당했다고 해도 그것은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임을 압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난 이반 경을 제자로 받아들인 것을 기쁘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