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39화
검은 안개가 낀 골짜기 안쪽에는 붉은 색의 살덩이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둥근 덩어리들은 짧고 얇은 네 개의 다리에 의해 겨우 지탱되는 상황이다.
난 이게 뭔지 안다. 마기에 몸이 녹아 변형되어 버린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지능도 퇴화되어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배고픔으로 항상 슬피 울며 땅의 흙을 먹는다.
헬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것들은 흑마법사들이 마수를 사육할 때 먹이로 주기 위해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사육한 마수를 마족에게 제물로 바치며 흑마법사들은 성장해 나간다. 가장 지독한 흑마법사 성장법이다.
“이것들이 작정하고 일을 벌이는군.”
난 진짜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런데 이놈의 마족들이 이런 식으로 사람 열 받게 만드니 내가 맘 편히 지낼 수가 없잖아.
광산 안쪽으로부터 강력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장난이 아닌 게, 정상적인 마법사로 치면 최소 7서클은 되는 수준이다. 흑마법사가 이 정도까지 성장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마탑 녀석들, 도대체 이런 고위 흑마법사가 탄생할 때까지 뭐 했던 거지?”
마탑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역 내에 흑마법사가 탄생하는 것을 막는 거다. 인쿼지터 마법사들이 항상 이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철저하게 조사를 해서 흑마법을 익히는 자들을 찾아내 제거해야 한다.
이 지역을 장악한 마도가문이 어디지? 텔문 가문인가? 그리고 여기가 벌렌드 백작령이지? 그렇다면 벌렌드 백작도 이 일과 관계있다는 건데. 씨돔 상회도 한 다리 걸친 건가?
이게 알려지면 벌렌드 백작과 씨돔 상회는 물론이고 텔문 가문도 크게 문제가 될 거다. 다른 영역 내에 고위 흑마법사 사태가 발생하면 다른 가문에서 관리 능력이 없다고 치고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
“아까 심부름 간 놈들이 보고를 해도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진 않겠군.”
오히려 내가 이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나올까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씨돔 상회는 의뢰를 핑계로 날 제거하려 한 것이다. 거의 확실하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다. 이건 위험하다. 지금 내 수준으로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
고개를 돌려 마리포스를 보았다. 그녀의 힘으로 어떻게든 될까?
“아니지, 확실하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걸 수는 없어.”
나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굳이 내가 해결할 필요는 없다. 그냥 웨어울프 킹 사태 때처럼 10대 가문에 이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때, 광산 안쪽에서 섬광이 일어났다.
팍 하는 강렬한 빛의 폭발과 함께 헬록들이 비명을 지르며 완전히 녹아내려 물처럼 변했다.
“정화의 태양!”
강렬한 신성계열 마법이다. 고대에 신이 죽은 이후 신성마법은 기존의 마법에 편입되어 백마법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법사라면 마나를 이용해 신성계열 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화의 태양 같이 특수한 마법은 신성계열에 대한 재능이 없으면 펼칠 수 없다.
뭐 9서클의 경지에 오르면 상관없긴 하지만 지금 저 안에서 마법을 쓴 자가 9서클인 거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이미 누군가 앞서 와서 여길 뽀개고 있는 상황이란 건데. 누굴까?
호기심이 일어났지만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으니 이대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몸을 돌려 떠나려 하는 순간 안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봐! 그냥 가면 어떻게 하나? 이리 와서 좀 도우라고.”
들켰네. 어떻게 안 거지?
방어마법을 걸면서 기본적으로 감지불가 마법도 걸었다. 움직임 자체도 상당히 은밀하게 했는데 이 거리에서 알아차리다니.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이대로 도망가도 되지만 체면이 있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몸을 뺄 수는 없다고.
“누구십니까?”
“그런 거 물을 시간에 이리 와서 좀 도우라고!”
아 놔, 성격 무지 급한 사람이네.
나는 투덜대면서도 광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쪽은 이미 강력한 마법이 몇 번이나 시전 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엇, 이건 정화의 대지!”
땅에서 은은한 신성광이 흘러나오고 있다. 8서클 백마법의 흔적이다. 놀랍게도 안에 있는 자는 8서클 마도사인 것이다. 그것도 마법사 중에 가장 희귀하다는 백마법사.
“아!”
그러고 보니 백마법사 중에 8서클인 자가 있었지. 나는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이반 헬비스트 경이십니까?”
“멍청아! 이런 데서 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지 말아!”
웁스, 죄송합니다.
이름을 알면 저주의 표적이 되지. 거기다 상대가 겁을 먹고 도망갈 수도 있고 말이야.
어쨌든 저자가 이반 헬비스트 경인 것은 맞네. 행방불명된 8서클 마도사. 아론 체프코트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도사로 평가되던 자.
자신의 손으로 가문을 부수고 홀로 자취를 감춘 자가 왜 이런 곳에서 흑마법사와 싸우고 있을까?
“어서 오라니까! 네 녀석과 같이 있는 대기의 정령이 필요하단 말이다.”
아차, 기록에 의하면 이반 경은 땅의 정령을 부린다고 했지. 당연히 뿌우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다.
난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광산 안쪽은 원래 좁은 굴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어떻게 된 것인지 커다란 공동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람 수백 명이 들어가도 여유 있을 정도의 넓이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직경 30미터 정도 되는 대형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안에는 거대한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푸른색의 투명한 뱀.
“다스 서펜티움!”
놀랍다. 나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인데, 저놈은 마계의 마수 중에서도 가장 강한 놈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그 육체는 물로 이루어져 있어 죽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설마 물질계에 현신해 있었다니.
다스 서펜티움은 자신을 가두는 마법진을 파괴하려 나오려고 머리로 땅을 부수고 있었다. 머리가 땅에 부딪칠 때마다 쩡쩡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그러나 마법진이 새겨진 지반은 거대한 암벽인 듯 패이거나 부서지지 않고 있었다.
마법진 옆에는 나를 부른 이반 헬비스트 경이 서서 쉬지 않고 주문을 시전하고 있었다. 대충 내용을 보니 정령의 힘을 강화하는 주문이다. 그의 정령인 대지의 정령의 힘을 강화해서 마법진이 새겨진 암석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반 경의 주변 땅에서는 계속해서 언데드들이 기어 나왔다. 단순한 좀비나 스켈레톤 뿐 아니라 고스트 같은 형태가 없는 존재들도 튀어나왔기에 이반 경은 정령강화 주문을 시전하는 틈틈이 공격마법으로 언데드들을 상대해야 했다.
“땅이 오염되어 있다. 이놈들이 이곳에 구덩이를 파고 수천 명의 시체를 집어넣었어. 그리고 그 위에 암반을 얹고 마법진을 그린 거야.”
“흑마법사들은 이미 죽였나요?”
“죽였어. 그러니까 이 뱀이 날뛰는 거지.”
“그럼 땅을 정화해야겠군요.”
“땅은 힘들어. 일단 대기부터 정화해!”
“들었지? 뿌우야. 바깥에 있는 신선한 공기를 최대한 몰아와 줘.”
“알았당.”
뿌우는 곧 동굴 바깥쪽의 공기를 몰고 들어왔다. 돌개바람이 공동 안을 돌아다니며 썩은 공기를 모두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신선하다고 해도 마기의 구름에 속해 있는 공기라 그다지 정화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썩은 냄새가 사라졌다는 것만 해도 다행인 건가?
공기가 정화되자 언데드가 튀어나오는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던 건데, 아무래도 바깥 공기에는 언데드가 싫어하는 성분이 있었나 보다. 흑마법사들이 이걸로 언데드들을 튀어나오지 못하게 제어를 했던 거 같다.
이제 남은 문제는 다스 서펜티움이다.
난 이반 경의 곁으로 가서 다스 서펜티움을 가둔 마법진을 살펴보았다.
이반 경은 상당히 지친 듯 전신에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고, 손도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다.
거의 한계 상황이다. 앞으로 10분도 버티기 어렵다.
난 서둘러 창끝으로 마법진 외곽에 또 하나의 원을 그렸다. 그러니까 직경 30미터를 넘는 커다란 원이다.
“뭐하는 거냐!”
“강화요. 북쪽에 로펨, 남쪽에 소엠, 동쪽에 도엠, 서쪽에 오엠을 새겨 넣을 거에요.”
“그런 미친! 될 리가 있냐!”
오호, 역시 8서클은 달라. 바로 알아듣네. 네 방향에서 서로 다른 형식의 강화마법을 새겨 넣으면 마나가 꼬일 데로 꼬여서 제대로 작동을 안 할뿐 아니라 잘못하면 기존의 마법진까지 붕괴될 수 있다.
근데 이거 된다. 그게 당신과 나의 차이야.
난 이반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그린 원과 기존의 원 사이의 공간에 룬어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이반은 몇 마디 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지만 내가 룬어를 그리는 속도와 정확도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난 10분 만에 그 많은 룬어를 모두 그려 넣은 후 마리포즈에게 말했다.
“마리야. 이거 활성화시켜.”
“예.”
마리는 자신의 대검을 마법진의 정북 쪽에 꽂고 내부에 쌓여 있는 마나를 흘려 넣었다. 단순한 마나가 아닌 자신의 육체를 가동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마법진 전체로 퍼졌고, 동시에 네 개의 강화 마법진이 가동되었다.
우우우우웅
“허헛! 어떻게 이게 가동될 수 있지?”
이반 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감탄성을 터뜨리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그의 힘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 듯 그대로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다스 서펜티움은 마법진의 기운이 강해지자 압박을 느끼는 듯 이제는 꼬리로 사방을 사정없이 후려치지만 이미 강화되어버린 마법진을 부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이반 경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너야말로 누구냐? 아직 마도사도 되지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마법진을 10분 만에 완성시킬 수 있지? 정령까지 부리고 말이야.”
이반 경도 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먼저 설명해 주세요.”
“알았다. 난 죽은 애인의 유언에 따라 마족 계약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지. 특히 고위 마족과 계약한 자들을 말이야.”
아, 그러시군요. 이미 이 사태를 알고 있었던 거군요.
“그런데 이놈들은 좀 달라. 고위 마족과 계약을 하지도 않았는데 저 마수를 소환했단 말이야. 저놈의 힘으로 고위 마족과 계약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더라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군요.”
“그렇지. 저런 놈은 고위 마족과 계약을 안 하면 소환할 수 없으니까.”
“이반 경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떤 놈이 씨를 뿌린 거야. 이놈을 소환시키는 걸 도와주고 떠난 거지.”
“제 생각과 같군요.”
“그런데 말이 안 되잖아. 저걸 소환했으면 자기가 부려야지. 왜 남에게 줘?”
“혹시 흑마법사 중 살려둔 놈은 없나요?”
“없어. 그놈들이 전부 저 마법진과 연동이 되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군요.”
“그래, 저놈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그 다음에는 이곳의 영주를 잡아 심문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아.”
“영주과 연관이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하겠죠. 안 그러면 이정도 일이 진행될 때까지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으니까요.”
“마탑의 인쿼지터 마법사들의 눈을 어떻게 피했는지도 알아봐야겠어. 새로운 은닉방법이 개발됐다면 여기 말고 또 다른 곳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그럼 일단 저놈을 처리하죠.”
“잠깐, 난 이미 대답했다. 이제는 네 차례야.”
윽, 꼭 듣고 싶다는 건가?
난 이반 경을 보고 말했다.
“하나만 골라요. 아까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이유와, 내 정체.”
“으윽! 치사하게 그렇게 나오다니!”
고르라니까~.
결국 이반 경은 한숨을 내쉬며 마법진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암, 그게 바른 마법사의 자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