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37화
[마법사에게 걸리면 난 그대로 생체실험 재료로 쓰일 거야.]
[염려 마세요. 내가 밀항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절대 안 걸립니다.]
[네가 몰라서 그래, 마법사들이 마음먹고 탐색을 하면 안 걸릴 수가 없다고.]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그자들이 오기 전에 떠나야죠. 오늘 밤에 바로 이 항구를 뜨자고요.]
[그럼 어디로 가는 건데? 국경을 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된다고.]
[항구만 벗어나고 아무데도 안 갑니다.]
[뭐?]
[그러니까 바다 위에서 3일쯤 버티는 거죠. 그러면 조사를 끝낸 배가 출항을 할 테니까 그곳에 타면 되거든요.]
[오호, 그런 방법이!]
그러네, 정말 ‘그런 방법이!’네. 블랭코 가문의 수색자들이 출항하는 배를 뒤진 후에 타면 된다는 거군.
나는 살짝 감탄하며 마리가 옮겨주는 둘의 대화를 계속 들었다.
[이미 선장하고는 얘기가 되어 있어요. 승선부에도 탑승 기록이 되어 있고요. 일단 배에 탄 후에는 아까 전해드린 신분으로 행세하면 됩니다. 그러면 배에서 내릴 때에도 전혀 문제없으니까요.]
[흐흐흐, 자넨 역시 이 바닥 최고의 브로커야. 그럼 부탁하겠네.]
[성실과 신용의 프로드 운송업이니까요. 다음에도 이용해 주세요.]
[물론이지. 난 일류 이외에는 신용 안 한다고. 자네 말고 이 항구에 일류는 없어.]
그러니까 저 빨간 머리 청년이 프로드란 밀항업자고, 저 이마에 칼자국이 나 있는 자가 밀항을 하려는 자로군.
“마리야. 넌 당분간 계속 저자들 말을 듣고, 그들의 이름이나 신분, 직업 등등 필요한 정보는 모두 기억해 줘.”
“네.”
“그리고 뿌우야. 나오지 말고 들어.”
[듣고 있당.]
“좀 있다가 저놈들이 움직이면 투명 상태로 미행해서 방이 어딘지 좀 알아봐줘.”
[알았당.]
나는 밀항하는 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또 그자의 동작과 습관도 세밀하게 보았다. 대충 보면 단검을 잘 쓰게 생겼고, 인상이나 말투로 보아 별로 좋은 자는 아니다.
겁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조심성이 없어 좀 허당끼가 있어 보인다.
그 사이 마리포스가 정보가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자의 이름은 독스, 비린내 독스라고 불린다. 밀수업과 강도, 도둑질 등 여러 가지 범죄를 저지르면서 이 항구에서 살다가 며칠 전에 잘못해서 사람을 죽였는데 그게 블랭코 가문 마법사의 친동생이었단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도망가려고 밀항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독스는 출항이 금지된 게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프로드는 마법사의 동생 한 명 죽은 거 가지고 출항금지까지 할 정도는 아닐 거라고 말했지만 독스는 믿지 않는 중이다.
밀항을 주선하는 프로드는 이 바닥에서 10년째 그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프로드의 아버지가 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부자 이대에 걸쳐 밀항 주선업을 하는 중이다.
“저자가 좋겠군.”
나는 결정을 내리고 그들이 자리를 옮기기를 기다렸다.
독스는 프로드와의 대화가 끝나자 여관 이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갔고, 거기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난 뿌우가 방을 확인한 후 여관 밖으로 나가 자신에게 투명 마법을 걸고 독스의 방으로 가서 조용히 독스에게 수면 마법을 걸었다.
“슬립.”
“윽, 마법사!”
독스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잠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늦어서 잡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다시 독스를 깨움과 동시에 최면 마법을 걸어 그의 개인 신상과 외국의 거래처와 인간관계들을 상세히 물은 후 일일이 기록했다.
그렇다. 난 독스가 될 것이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여행자라는 것은 의심받고 조사받기 딱 좋은 것이니 실존하는 다른 사람으로 변장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독스는 어둠의 세계에서는 나름 신분이 확실한 자이기 때문에 움직이기 편하다.
기록이 모두 끝난 후, 나는 다시 독스의 상의를 벗기고 등에 기억상실 마법진을 그렸다.
이것은 대상을 일정 기간 동안 기억상실에 걸리게 하는 마법인데, 마법 효과가 끝나고 기억이 되돌아 올 때쯤에는 마법진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때문에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렇게 백지 상태가 된 독스에게 난 다시 최면 마법을 써서 가짜 기억을 주입시켰다.
“넌 루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 사연이 있어서 최대한 블랭코 가문의 마법사들을 피해 도망을 가야 하는데, 바다로 가는 길은 막혔어. 그러니 육로로 움직여야겠지? 내가 길을 가르쳐 줄게. 일단 달렌 왕국으로 가서 다시 므란비아 왕국으로 가라고, 그러면 거기까지는 블랭코 가문의 힘이 미치지 못할 거야. 염려 마. 내가 잡히지 않게 얼굴도 바꿔줄 테니까.”
이걸로 기억상실 마법이 풀리기 전까지 독스는 자신이 루엔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마법연쇄 효과는 단순히 주문서만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실전마법인 것이다.
난 독스에게 외형변경 마법을 걸어 내가 분장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버렸다. 원래 체격까지는 바꾸지 않았기에 소년이 아닌 동안의 청년 정도로 보였지만 이 정도는 상관없겠지.
독스는 멍한 상태가 되어 내가 주입시킨 명령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이제 최면이 풀리면 그는 내가 암시한 것을 자신의 생각이라 굳게 믿고 필사적으로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난 독스에게 수면 마법을 걸어 침대 아래에 숨긴 후 나 자신이 독스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짐을 쌌다.
“마리 넌 미리 바다에 나가 기다리고 있어. 내가 출항한 배에 옮겨 타면 그때 배 밑에 매달리면 될 거야.”
“예.”
마리는 숨을 쉬지 않아도 된다. 체온이 떨어져도 죽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바다 속에서 한 달 동안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난 독스가 되어 밀항을 하고, 마리는 배에 매달려 있기로 했다.
준비가 끝난 나는 밤까지 기다려 프로드와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앞으로 3일간은 큰 파도가 없어 보트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프로드가 말했다.
마리포스는 물 밑을 걸어 내가 있는 지점 바로 아래쪽에서 같이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 3일을 기다리니 배가 출항을 했다. 내가 원래 타려고 했던 국체 왕국으로 가는 범선이다. 프로드는 익숙한 솜씨로 범선 옆쪽으로 보트를 움직였다.
큰 배에 보트를 잘못 접근시켰다가는 배가 전복되기 십상인데 전혀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배를 대는 것을 보니 이자는 일류 뱃사람이 틀림없다.
“어서 올라가세요. 즐거운 항해되시고요.”
“다음에 인연 있으면 보지. 내 언젠가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
“그러세요. 독스 님이 돌아오시면 제가 술 한 잔 사겠습니다.”
“그러지.”
난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배 위에서 내려온 사다리에 매달렸다. 선장이 직접 내려준 줄사다리였고, 난 그가 안내하는 대로 내 방에 무사히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밀항 성공인가? 마리포스가 배 아래에 달라붙었다는 것도 확인했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나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정말 평범하고 지루한 항해의 시간이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고, 보이는 것은 모두 바다고, 음식은 매일 비슷한 것만 나왔다.
배 여행은 체질에 안 맞네. 난 앞으로 좀 귀찮더라고 가능하면 육지여행만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지루함을 버티기만 하면 시간은 저절로 흘러가고, 배 역시 알아서 목적지까지 가 주는 점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블랭코 가문이 날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찾으려 했을까? 설마 진짜 납치라도 할 생각이었던 것일까?
여기서 이유를 알 방법은 없다. 난 모르는 것에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기에 당분간 이쪽 일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아무튼 항해가 너무 지겨워서 머릿속이 멍해질 무렵, 나는 드디어 국체 왕국의 나폴리안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구에서 형식적인 입국 절차를 끝내고 나오자 나는 바로 항구를 벗어나 한적한 해안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자 바다 속으로부터 마리포스가 기어 나왔는데, 그녀의 갑옷에는 작은 소라와 고동 같은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관절 부분에는 이끼도 가득 끼어 있었다.
“하하, 마리야. 일단 붙어 있는 것부터 다 떼어내라.”
“예, 렌 님.”
화르르륵
파란 불꽃이 일어나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곧 마리는 평상시의 깨끗한 외형으로 돌아왔다.
“몸에 이상은 없지?”
“예.”
“그럼 이제 움직이자고. 참, 나는 당분간 독스로 행세할 테니까 나도 날 독스라 불러.”
“그렇게 하겠습니다. 독스 님.”
“님은 빼. 내가 그동안 생각한 우리 관계의 컨셉을 이야기 해 줄게.”
그러니까 마리는 수행중인 여기사고, 난 마리에게 고용된 안내인인 거다. 마리는 내가 원래 강도이자 밀수꾼인 것은 모르고 있다. 그냥 잘못해서 마법사의 가족을 죽여 타국으로 도망 온 불쌍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냥 독스라고 부르면 될까요?”
“응, 난 마리포스 경이라고 부를게.”
“예.”
“그럼 다시 항구로 돌아가서 마차를 하나 구하자고, 그 다음에는 편하게 므란비아 왕국까지 가는 거야.”
“예.”
마리포스가 요즘 말투가 좀 딱딱하군. 연구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안 그랬는데, 여기사로 행동하라고 하니까 그런 모양이네.
난 마리포스가 풍부한 감정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여기사는 감정을 죽이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존재라서 그녀의 감정이 억제되는 모양이다.
쩝, 어쩔 수 없나.
지금 마리포스를 용병이나 하녀 같은 걸로 바꾸기에는 좀 무리다. 당분간은 이대로 가자.
나는 마리포스와 함께 나폴리안 항구로 돌아와 마차를 구하러 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마차를 살 수 있는 상점은 바로 독스의 거래처 중 하나인 씨돔 상회뿐이다. 씨돔 상회는 나폴리안 항구의 마차길드를 총괄하는데, 뒷면으로는 밀수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씨돔 상회로 들어서니 지배인인 클락 씨가 날 보며 반기는 얼굴로 말했다.
“여, 독스. 언제 왔는가? 이번에도 물건을 팔러 왔나?”
“아닙니다. 클락 씨. 이번에는 단순한 여행이고, 이분의 수행에 동참하기로 했지요.”
“오호, 단,순,한 여행이구만.”
단순한 여행은 업계용어로 한 마디로 사고치고 외국으로 튄 것을 의미한다. 이럴 경우 거래처에서는 밀항자가 원할 경우 적당한 비용을 받고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게 관례로 되어 있다.
클락 씨는 내가 딱히 은신처를 필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그냥 미소를 지으며 주문하는 대로 마차와 말 두 필을 비롯해 여행의 필수품들을 준비해 주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떠나려고 할 때, 상회 안쪽에서 누군가가 나와 클락 씨에게 귓속말을 했다.
클락 씨는 살짝 안색이 굳었다가 바로 활짝 웃으며 말을 했다.
“저런, 안쪽에 계신 분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는데 잠시 들어가지 않겠나?”
“예? 전 마리포스 경께 고용된 몸이라 바로 떠나야 합니다만.”
“마리포스 경도 바쁘지 않으시면 잠시 대화를 나누시지요.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요.”
마리포스는 내가 신호를 보내자 승낙을 하고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가는 순간 분위기가 바꼈다.
살기! 뒤에 있는 클락 씨까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품속에서 두 개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마리포스 경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여기 독스 씨와 진지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은데, 협조 좀 해 주시죠.”
협조라, 무기를 버리란 소리군.
마리야, 걍 쳐라. 죽이지는 말고.
내가 신호를 보내자 마리포스는 바로 대검을 뽑아들어 검면으로 클락을 때렸다.
클락은 기겁해서 쌍검을 던졌지만 마리포스는 능숙하게 어깨갑주로 튕겨내며 공격을 계속했다.
뻑, 뻑, 뻑
“제길, 석궁을 쏴!”
슈슈슈슈슉
앞쪽에 있는 커튼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석궁을 날렸다. 죽일 생각은 없는지 마리포스의 다리 쪽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포스는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석궁의 쿼럴을 모두 피했다. 중갑을 입은 기사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저런!”
잠복하고 있던 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놀람의 탄성을 질렀다. 마리포스의 실력을 알아보고 자신들에게 승산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이럴 때 멈춰야 이쪽에 유리하겠지?
“잠깐! 양쪽 다 멈춰주세요.”
내가 크게 외치자 마리포스는 몸을 벌떡 일으켜 공격을 하려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씨돔 상회측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공격을 멈추었다.
“마리포스 경, 이자들이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니까 제가 해결하도록 하지요.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유가 어쨌든 간에 사람을 속여서 유인한 후 뒤에서 공격을 했다. 내 동료를 해치려 한다면 나도 참지 않겠다.”
마리포스는 싸늘한 목소리로 선언을 한 다음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캬, 씨돔 상회 인간들 겁먹은 거 보소. 우리 마리포스가 협박에 재능이 있네.
난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이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물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뭔가요?”
“그러니까, 자네는 비린내 독스가 아니지 않나.”
에고, 바로 들켰네.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