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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36화 (36/250)

로엔의 마나뱅크 36화

*

밤이 되었다.

성장기에 있는 나는 키가 커야 하기에 일찍 자는 습관을 들여 바른생활 소년이 되었고, 지금은 꿈속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러고 서 있지?

아! 오늘이 벌써 한 달째구나.

꿈속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미리아와의 만남 이후 난 한 달에 한 번씩 그녀와 만나 마법을 가르치고 있다.

아도리아 왕국과 전쟁을 할 때에도 난 미리아와의 수업을 미루지 않았다. 미룰 필요가 없다.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이 그냥 잠을 자면 되는 거니까.

한쪽 공간이 밝아지며 미리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저어 인사를 한다. 그런데 웃는 표정이 좀 이상한데?

“숙제 다 했어?”

난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금새 울상이 된 미리아는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많아서…….”

“많다고! 그럴 리가 없거든. 너 뭔가 딴 짓 했지?”

난 인간의 한계를 잘 안다. 미리아가 한 달 동안 죽어라고 숙제만 했다면 틀림없이 끝낼 수 있는 분량을 내 줬다. 그런데 안 해놓고 많다는 핑계를 대다니.

“사실은 요즘 새를 길러서, 그러니까 새하고는 현실에서도 약간 대화가 되더라고.”

“아항, 새하고 논다고 숙제를 안 했다는 거네.”

“미안.”

미리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됐어. 네가 힘들다면 진도를 줄이지 뭐.”

“아니야, 나 열심히 할게. 이번엔 정말 너한테 새로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 그랬어.”

“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나빠 보이잖아. 알았어. 그럼 다음번에 오늘 숙제까지 합쳐서 해.”

“응.”

마법의 스승으로써 게으른 미리아를 한바탕 혼 낸 나는 그녀가 부족한 대로 해 온 숙제를 평가했다.

2 서클의 마법주문을 모두 암기하는 것을 한 달 만에 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미리아는 가능하다.

놀랍게도 미리아는 이미 1서클에 도달했고, 마법진에 대한 기초지식도 익혔다.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마족의 피가 섞여서 그런가?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재능이다.

아 참, 그동안 내가 미리아를 관찰해서 내린 결론인데 미리아는 하프-서큐버스다.

서큐버스는 원래 실체가 없는 영체형 마족이기 때문에 육체는 순수한 인간이지만 영혼이 반인반마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녀를 만난 김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미리아, 그런데 너, 혹시 세계정복 같은 거 생각 있니?”

“에? 그게 뭔데?”

“아니다. 네가 아니라 너희 엄마 말이야. 고위 마족과 계약해서 너를 낳았잖아.”

“응.”

“너희 엄마가 세상을 모두 정복하려고 했던 거야?”

“아니, 엄마는 그냥 나를 낳고 싶었데.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그렇구나. 흠.”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응, 이번에 우리 볼스테아 왕국이 전쟁을 치렀잖아.”

난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미리아에게 설명했다. 마족과 계약을 맺은 웨어울프 킹의 등장과 그의 경쟁자가 세계 정복을 꿈꾼다는 말에 미리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이 결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

“집히는 게 있어?”

“응, 엄마가 난 다른 경쟁자에게 알려지면 안 된댔어.”

“그럼 엄마도 샤날이 말한 경쟁자 중 한 명이 맞는다는 거네.”

“엄마는 세계 정복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어!”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리아 같이 착한 애를 낳은 분이 그럴 리가 없지.”

“히잉.”

나는 일단 미리아를 다독여주고 생각에 잠겼다.

고위 마족이 아이를 낳기 위해 계약한다는 내용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러니까 미리아의 엄마는 뭔가 다른 조건으로 계약을 한 거다. 그런데 그 조건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거고, 그녀의 진심은 아이를 낳아보고 싶었던 거라는 이야기.

우와, 그분 혹시 고위 마족을 상대로 사기 친 건가? 급 호감이 생기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그리로 갈게. 어쩌면 미리아 네가 결계 밖으로 나와도 되는 방법을 찾을 지도 모르잖아.”

“우왓! 정말로 올 거야? 멀어서 못 온다고 했잖아.”

“이번에 일이 좀 있어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어. 이 참에 한 번 가지 뭐.”

“헤헷, 정말이지? 언제 올 거야?”

“가는 데만 한두 달 걸릴걸. 중간에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말이야.”

“응응, 기다릴게. 어차피 숙제만 해도 한 달 후딱 가니까.”

“그런데 새하고 대화가 된다고?”

“응, 새는 착해서 내가 부탁하면 다 들어줘.”

그건 대화가 아니라 새를 지배하는 능력이잖아. 킁.

얘가 성장하면서 능력이 하나씩 생기나보네. 혹시 나중에 각성하면 최종병기가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이 된다. 미리아의 엄마가 고위 마족을 속였다면 고위 마족도 미리아의 엄마를 속일 수 있으니까. 결국 미리아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이번에 가면 진짜 확실하게 알아봐야지.

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미리아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

렉스는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몰던이 붙잡자 결국 포기를 했는지 꾸웅꾸웅 거리며 주저앉았다. 난 렉스의 코를 주물러 주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마리포스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마법사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가죽갑옷을 입고, 스태프의 창날을 꺼낸 채 손에 들었다. 그야말로 누가 봐도 소년 용병의 모습이다.

마리포스 역시 갑옷에 검을 칠을 해서 흑기사의 모습으로 바꿨다. 대검을 등에 맨 전신갑옷의 흑기사를 싸늘한 느낌을 주변에 퍼뜨려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헬멧을 벗으면 상당한 미녀의 얼굴이 나오기 때문에 분위기가 확 바뀐다. 묘한 매력이다.

어떻게 보면 마리포스가 기사고 난 종자 같은 느낌도 들지만 그건 상관없다. 당분간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으니까.

실제로도 마리포스는 내 보호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번에 만든 위조 신분증 말이다.

마리포스는 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고, 난 그녀의 사촌동생으로 같이 기사수행을 떠난다는 증표를 만들었다.

가짜 신분증의 내 이름은 그냥 루엔. 발음은 원래 이름인 렌과 비슷한데 약간 혀를 말면 된다.

그래서 마차도 내가 몰기로 했다. 마리포스는 안에 앉아 사방을 감지한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집중할 때 마리포스의 감지 능력은 거의 지평선 끝에 있는 지렁이 땅 파는 것까지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아주 쓸 만하다.

“어디로 갈까요?”

마리포스가 물었다.

“하이델 숲으로 가는 가장 빠른 경로를 찾아줘.”

“네, 마차를 몰고 갈 수 있는 길만을 택한다면 모시모 왕국으로 가서 달렌 왕국을 통해 므란비아 왕국의 남쪽 국경선을 따라 이동하는 게 제일 빨라요. 그런데 그 경로는 중간에 사막지대를 끼고 돌아야 하기 때문에 편안하지는 않을 거예요.”

“좀 편한 길은? 여행 느낌도 나고.”

“모시모 왕국 남쪽에서 배를 타고 국체 왕국까지 가서 다시 므란비아 왕국으로 진입하는 게 좋겠네요. 좀 돌아가는 길이지만 배로 이동해서 그다지 차이는 안 나요.”

“배 여행이라. 그거 나쁘지 않네. 그쪽으로 하지.”

마리포스에게 대륙의 지도를 전부 주입시켜 놓으니 참 편하네. 거기에 각 지역 특산물과 명승고적, 인물 등등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만들어 놨거든.

그러니까 얘는 내 비서이자 보디가드인 셈이지.

나는 마리포스가 가리키는 대로 관도를 따라 마차를 몰았다. 도중에 마을에 들러 소문을 들으니 어떻게 된 게 내가 이동하는 속도보다 내가 마족을 찾아 비밀리에 여행을 떠났다는 소문이 더 빨리 퍼지고 있었다.

여관 주인까지 내 이름을 아니 내가 유명해지긴 했나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미스틱 엑스가 유명해졌고, 렌이라는 이름은 조금 묻어가는 느낌이긴 하지만 이것도 무시 못 한다.

어쨌든 난 최대한 행적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며 볼스테아 왕국의 국경을 넘어 모시모 왕국에 들어섰다.

모시모 왕국은 국토 면적은 작아도 해양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척해 인근 왕국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이곳을 장악하고 있는 마도 가문은 블랭코 가문. 우리 콘돌스핀 가문과는 오랜 라이벌 관계라고 한다. 지금은 우리보다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대략 16번 정도 수준이다.

참고로 콘돌스핀 가문은 원래 21번이었는데, 이번 사태로 순위가 확 떨어져 30번 정도가 될 거라고 한다. 이건 공식적인 게 아니라 현재 최고의 군사대국인 덴판 제국의 황제 탄신일 날 보내는 초대장 순위에 따라 결정된다.

덴판 제국의 황제 탄신일 초대장은 순위 결정 통지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냉정해서 50년 전부터 거의 이게 공식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시모 왕국에 들어서니 길 곳곳에 수상한 자들의 모습이 감지되었다. 마법사인데 평상복을 해서 신분을 감춘 자들.

아무래도 블랭코 가문에서 나를 찾기 위해 사람들 파견한 거 같다.

“안 되겠다. 우리 마차 버리고 걍 말을 타고 가자.”

“그러죠.”

우리는 인적 없는 곳으로 가서 마차를 분해한 후 땅에 묻었다. 천하장사라고 할 수 있는 마리포스가 있으니 이런 작업도 한두 시간이면 금방이다.

난 다시 마법으로 땅에 남겨진 흔적을 지우고 말에 안장을 얹었다.

“마리 네가 앞장 서. 마법사들이 있으면 돌아가고 말이야.”

“산길로 가도 되나요?”

“말을 끌고 이동할 수 있는 정도면 상관없어.”

“예, 그럼 길 상관없이 이동할게요.”

에고, 진짜 쫓기는 느낌까지 나네. 그래도 배를 타고 저 멀리 있는 국체 왕국까지 가면 괜찮겠지. 그때부터 제대로 여행을 즐기자.

난 나름대로 마음의 위안을 하며 황야와 산지를 가로질러 모시모 왕국의 남쪽에 있는 메르세디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아직 이곳에는 블랭코 가문의 탐사자가 온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조금 마음을 놓고 마리포스의 이름으로 배를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배를 타고 떠나려 하니, 배가 출항을 안 한다.

“블랭코 가문에서 항구의 배가 출항하는 것을 금지시켰데.”

“뭐야? 밀수업자라도 잡는 건가?”

“몰라, 2, 3일 내로 블랭코 가문에서 사람이 올 거라던데? 그 사람들의 검사를 받아야 출항할 수 있데.”

아 놔, 미치겠네. 이놈들이 진심으로 날 찾으려 하는 건가? 그런데 날 찾아서 어쩔 건데?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편하게 여행을 좀 해보려고 했더니 이상한 놈들이 태클을 거는 형국이다.

어떻게 할까?

난 잠시 생각하다 마리포스에게 말했다.

“마리야, 근처에 밀항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자들이 있나 좀 살펴 봐.”

“예, 청각 기능 강화할게요.”

마리포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 사방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를 모두 감지하기 시작했다. 여관 안쪽뿐 아니라 거리 너머 반대편 술집이나 식당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모두 듣고 분석할 수 있는 게 마리포스의 능력이다. 한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거라면 뿌우도 가능하지만 이렇게 군중이 떠드는 소리를 한꺼번에 듣는 것은 마리포스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있어요. 모두 네 군데, 그 중 가장 가까운 곳은 저쪽 구석에 있는 두 사람이에요.”

“뭐라 하는 지 나한테 말해줘.”

“예.”

마리포스는 둘의 대화를 그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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