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7화
“뭣! 마법사를 지원해 준다고? 그것도 백 명 당 한 명 꼴로!”
“그렇다니까. 우리가 왜 14살 소년을 단장으로 추대했는데, 브로스마이어야. 브로스마이어.”
“으음, 브로스마이어. 이름은 들어봤지만…….”
“지금 마도병단 책임자가 누군지 알아? 파우스 브로스마이어라고.”
“헛! 그게 정말인가?”
“우리 단장이 그 파우스 브로스마이어 경의 후계자라니까. 내가 다 확인했어. 그러니 자네도 이쪽으로 붙으라고.”
“정말 붙으면 우리에게까지 마법사를 지원해 준다는 말이지?”
“어허, 속고만 살았나? 마법사 50명까지는 확실하다고 했어.”
“50명! 이야, 합류하지. 내 마법사 50명과 같이 싸울 수 있다면 14살이 아니라 10살짜리 여자애가 단장이라도 합류한다. 정말.”
“나도 같은 생각이야. 암. 자, 그럼 여기에 싸인 하라고.”
그로스웜 아저씨 말 잘하네. 사람 꾀는 데 천부적 재질이 있어.
난 지금 그로스웜이 다른 용병단 단장들 꾀는 것을 뿌우를 통해 실시간으로 듣고 있다. ‘귀 빌리기’라는 마법으로 다른 사람이 듣는 것을 같이 들을 수 있는 마법이 있는데, 그걸 뿌우에게 썼거든. 뿌우는 투명모드로 그로스웜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고.
그로스웜이 합류시킨 용병단은 몰던이 명령체계를 확립해서 일원화 시킨다. 각 용병단은 일시적이지만 헤지호크 용병단의 대대가 되어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4천6백 명인가. 이제 한두 부대 정도만 더 받아들이면 되겠네.”
그로스웜이 다음 용병단장을 찾아가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이들을 이끌고 하루라도 빨리 볼탄으로 가야 한다.
그 다음 날, 우리는 소르판을 나와 볼탄으로 향했다.
5천의 병사가 이동하는 광경은 꽤 장관이었는데, 단지 붉은 고슴도치 그림이 그려진 깃발은 아무리 봐도 정이 들지 않았다.
“기왕이면 드래곤이라던가, 유니콘 이라던가, 그리폰 같은 폼 나는 걸로 하지. 쩝.”
그래도 몰던과 그로스웜이 애정을 가지는 부대명을 내가 바꿀 수는 없지.
그래, 우리는 헤지호그다. 모양은 볼품없어도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에게는 가시 맛을 보여주지.
*
5천이나 되는 병력은 전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전력이다. 우리가 볼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헤지호그 용병단의 이름이 먼저 알려졌는지, 성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정규군 장교 둘이 마중을 나왔다.
“자네가 렌인가?”
“그렇습니다만.”
“난 얀센이라고 하네. 자네 스승이 기다리시니 나와 같이 가세.”
에고, 스승님이 보낸 사람들이었군.
“그전에 먼저 우리 용병단을 주둔시킬 곳을 지정해 주시죠.”
“그건 여기 네서스 경이 안내를 해 줄 걸세.”
“그럼 그렇게 하죠. 그로스웜 대장님. 네서스 경의 지시에 따라 부대를 움직여 주세요. 몰던 대장님. 우린 가죠.”
“허허, 이것 참 곤혹스럽군.”
몰던은 막상 파우스 스승님을 만나려니 좀 쑥스러운 듯 자꾸 웃음소리를 냈다. 우리는 적당히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얀센 경을 따라 볼탄으로 들어갔다.
얀센 경은 마법사는 아닌데, 전신의 근육과 기세가 대단한 것이 상당히 뛰어난 기사라고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마법을 못 써도 이정도 기량을 가진 기사는 보통 마법사의 호위기사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
직접적인 공격마법은 막히거나 해제되면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날 수 있지만, 호위기사를 강화하고 상대의 공격을 중화시키는 식으로 싸우면 빈틈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강력한 마도사라도 뛰어난 기사나 검사를 우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기사도 마법사의 지원 없이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검만으로 마법을 이기기는 힘든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마나뱅크를 이용해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자네 스승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네.”
“그러시겠죠.”
“사제간의 일이니 내가 관여할 수는 없지만, 파우스 경은 훌륭하신 분이니 너무 속 썩이지는 말게.”
잔소리꾼이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닌 듯 하니 좋게 받아들이자.
나는 정중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계속 얀센 경을 따라갔다.
요새의 마도병단 숙소는 마법사들이 모이는 공간답게 나름 고상하게 꾸며져 있고, 정신을 맑게 하는 향도 피워져 있었다.
파우스 스승님이 계신 지휘관 실에는 스승님만 계셨는데, 평소에는 작전실로 이용하는지 큰 탁자가 놓여있고, 한쪽 벽에 설치된 스크롤용 책장에는 지도로 보이는 두루마리들이 빽빽이 끼워져 있었다.
“어서 와라.”
“스승님, 두 달 만에 뵙네요.”
“보고는 들었다. 용병단을 조직했다고?”
“예. 상당한 전력이 될 거에요.”
“글쎄. 내가 듣기로 넌 용병단 규모를 늘리면서 마법사의 지원을 약속했다더구나.”
후후훗, 그거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쁘시군요. 사실 스승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내가 스승님을 팔아 사기를 친 거나 다름없는 거니 말이지. 그것도 당신께서 해결해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일을 벌인 셈이고.
나는 사죄하는 의미로 살짝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스승님과 헤어진 후 미스틱 엑스를 만났어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말 돌리기 성공, 좋아. 좋아.
“몰던이 용병들을 모집하는 동안 저는 그분께 도움을 청하러 갔거든요.”
“으음, 무슨 도움을 받았느냐?”
“시간이 없다고 마법진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가르쳐 주더라고요.”
“마법진, 그런 분께 가르침을 받았다면 대단히 많은 깨달음이 있었겠구나.”
“예, 그런데 제가 배운 건 주로 이 마법진들을 이해하기 위한 거였어요.”
나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마법진 도해를 꺼냈다.
한 장이 아니라 오십 장 정도의 작은 책자로 만들어진 것인데, 각 장에는 모두 마법진이 그려져 있고 해설이 자세하게 달려있다. 그리고 그 오십 개의 마법진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표지에 쓰인 제목은 카탈라난, 고대어로 전신의 위엄이라는 뜻이다.
“이, 이것은!”
파우스 스승님은 눈을 크게 뜨고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겼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숨을 거칠게 쉬었다. 손도 덜덜 떤다.
극도로 흥분한 모습, 그동안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어때요? 죽여주죠? 이게 9서클 대마도사가 맘 잡고 그린 마법진이에요.
내가! 진지하게! 그린 겁니다.
카탈라난은 땅에 그리는 마법진이 아니다. 이건 바로 사람의 몸에 그리는 생체 마법진이다. 마법사는 이걸 등에 그리고 저마다 지정된 위치에 선다. 그렇게 오십 명의 마법사가 또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하면 그 주변은 엄청한 효과를 주는 역장으로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역장을 마법진의 제목인 카탈라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오십 명의 마법사가 카탈라난을 형성하고, 또 하나의 요소로써 오천 명의 병사들이 동원된다면 이론적으로는 그야말로 불사에 무적의 군단이 탄생한다.
“으으, 이런 게 가능하다니. 정말 이게 실제로 작동을 한다는 것이냐?”
“제가 배운 바로는 틀림없어요. 스승님께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제가 설명을 해드릴게요.”
나는 일단 전체적인 구동방식과 구체적인 효과를 설명한 후, 각 페이지를 넘기며 자세하게 하나씩 설명을 했다.
이게 몇 시간에 설명할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고 제대로 이해시키려면 한 장당 하루는 꼬박 설명해야 할 거지만, 나는 간단하게 마법진이 진짜로 작동하고 또 몸에 그려도 부작용이 없다는 부분만 중점적으로 말했다.
스승님은 연신 감탄성을 발하며 내 설명을 들었는데, 최대한 줄여서 말했는데도 끝나고 나니 이미 밤이 깊어 버렸다. 거의 일곱 여덟 시간은 꼬박 설명한 거 같다.
“그런데 이 마법진의 코어에는 정령의 힘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구나. 이건 어떻게 할 거니?”
“미스틱 엑스께서 저에게 정령을 빌려 주셨어요.”
“정령을 빌려줘? 그게 진짜, 아니, 진짜라도 가능한 거냐?”
“예, 저에게 정령친화력이 있어서 된다고 하더라고요.”
전문용어로 정령공유라고 한다. 정령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고난이도의 기법이지.
이건 내가 아론 체프코트의 동생인 마이어 체프코트를 만났을 때 안 건데, 마이어 체프코트는 불의 정령을 데리고 있었거든.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건 마이어 본인이 소환한 게 아니야. 아마 형인 아론의 정령을 공유한 거겠지.
난 미스틱 엑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고 나서 이자의 강함을 대충 현존 최강의 마법사와 비슷하다고 설정했어. 그러니 아론이 쓰는 기술은 미스틱 엑스도 쓸 수 있는 거지. 후훗.
나는 스태프를 꺼내 엘레멘탈 마정석이 세팅된 부분을 스승님께 보여 드렸다. 그리고는 스태프를 두 손으로 잡아 땅에 수직으로 세우고 집중한 표정으로 외쳤다.
“정령 소환!”
뿌우우우우!
스태프 속으로부터 뿌우가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체 날아서 방안을 한 바퀴 돈 후 내려섰다.
이 녀석, 멋있게 보이고 싶었던 거냐.
“무슨 일이냥?”
“미안, 그냥 한 번 불러봤어.”
“뿌우, 넌 마나 적어서 나 자주 부르면 안 된당. 일 있을 때 불러랑.”
슈욱
뿌우는 다시 스태프 속으로 들어갔다. 시킨 대로 연기 잘 하네.
나는 어떠냐는 듯이 파우스 스승님을 보았고, 스승님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구나. 정말 소환한 정령을 타인에게 빌려주는 게 가능하구나.”
그럼요. 이 정도는 아론도 한다니까요. 하긴 스승님이 속하신 콘돌스핀 가문은 정령에 대해 거의 무지한 수준이니 알 리가 없지.
어쨌든 이것으로 난 마법진과 정령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아는 척 해도 된다는 거지. 그동안 알아도 모른 척 하느라 얼마나 답답했는데.
또 유사시에는 뿌우도 부를 수 있잖아.
내가 그동안 준비한 건 내 힘을 숨기지 않고 쓸 수 있는 배경을 만들기 위한 거야.
이제는 힘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빈츠가 어떤 수를 써도 다 대응할 수 있어.
나는 아직도 마법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스승님께 말했다.
“제가 스승님과 함께 마법진의 코어가 되고, 오십의 마법사와 오천의 용병이 마법진을 구성하면 전장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코어가 되는 우리 둘은 싸우는 동안 절대로 죽을 일이 없고요. 뭐, 다른 사람도 거의 죽을 일이 없겠지만.
“그렇겠구나.”
“스승님께서는 우선 50명의 마법사를 지원해 주세요. 가능하면 스승님과 친한 사람들로요. 전 그분들께 이 마법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할게요.”
“50명을 동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걸 살짝 보여주기만 해도 무조건 지원을 할 테니.”
그렇죠. 이거 보고 매달리지 않으면 그건 마법사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럼 내일 당장 사령관에게 보고를 하고 마법사를 선출하도록 하자.”
이제는 스승님이 더 적극적이다. 그러면서도 계속 마법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건 일단 스승님께서 가지고 계세요. 전 한 부가 더 있거든요. 이걸 분해해서 선출된 마법사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며 설명을 할 게요.”
“그래도 되겠니? 그럼 이건 내가 좀 보도록 하마.”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잠은 주무셔야 해요.”
“알았다. 라고는 대답해도 잠이 올지 모르겠구나.”
스승님은 자신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쩝, 어쩔 수 없이 내일 영양제라도 좀 만들어 드려야겠군.
“그럼 전 용병단에 돌아가 있을게요.”
“그래, 내일 다시 오거라.”
아무리 마법진에 마음이 쏠려도 제자를 쫓아내기에요? 하하하.
난 속으로 웃으면서 지휘관 실을 나와 헤지호그 용병단에게 배당된 막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