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4화
“1대 관문의 자아는 어떻게 된 거지? 넌 그가 만든 건가?”
“예, 아버지는 외로움을 못 참고 자아를 분열시켜 나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불완전한 자아가 되는 바람에 결국 붕괴되어 소멸했고요.”
“외로움을 못 참았다고?”
“그러니까 주인님께서 아버지에게 인격을 부여했잖아요. 아버지는 그런 주인님께 고마워했지만 그 인격이 문제가 되었어요.”
“아차!”
내 실수다. 관문의 자아는 이곳에 갇혀 100년간 혼자 지냈다. 그런데 인간 비슷한 인격이 주어진 상태이니 지독한 고독을 느꼈겠지. 이렇게 오래 혼자 놔두려면 그냥 책임의식만 불어넣고 생각하는 기능을 없앴어야 하는 거였구나.
“마리포즈 너도 오랫동안 혼자 있었니?”
“아니요. 이제 10년 정도 됐어요. 헤헤, 쪼금 외롭긴 했는데 참을 때까진 참아 보려고 했거든요. 아버지도 70년 정도 혼자 지냈다고 했으니까요.”
“70년이라, 그랬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 70년간 갇혀서 혼자 지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기 힘든 것일 터이다.
무엇보다 나 역시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했기에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미안. 내가 그를 너무 오래 방치했구나.”
나는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마리포즈는 관문의 자아가 자신의 소멸을 각오하고 만든 분신이라 할 수 있다. 혼자가 아닌 둘이 되기 위해, 고독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무한에 가까운 생명을 포기한 것이다.
마리포즈는 내가 갑자기 사과하자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주인님은 아버지의 창조주인데 사과를 하시다니요.”
“아니야. 내가 그에게 인격을 부여했으면 나름 책임을 졌어야 했어. 그런데 나도 인격을 부여한 자아를 만든 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거든.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네. 창조주 자격이 없는 셈이지.”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는 주인님을 좋아했어요. 항상 주인님 말씀만 하신걸요.”
그거야 걔가 나한테 절대적인 충성심을 바치도록 되어 있으니까 그런 거고. 쩝.
“그래도 전 운이 좋네요. 이렇게 주인님이 오셨으니까 말이에요. 저 열심히 할게요. 아버지가 주인님 시중 잘 들으랬어요.”
“그래, 잘 부탁한다. 마리포즈란 이름은 관문의 자아가 지어주었니?”
“예, 딸이니까 예쁜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엄밀하게 말하면 관문의 자아는 성별이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프 자이언트의 몸이라 외형이 남자에 가까운 것을 알고 분신을 만들 때 여성형 외형을 만들고 딸이라고 구분지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난 그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구나. 지금이라도 하나 지어주는 게 좋겠다. 네가 마리포즈니까 그의 이름은 베리포즈라고 하겠다. 이미 소멸된 존재의 이름을 지어도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와아! 아버지는 이름을 가지고 싶어 했어요. 베리포즈라, 좋아요. 전 베리포즈의 딸 마리포즈에요.”
“그래, 그렇게 하자.”
아버지의 이름을 딸의 이름에 맞추어 지은 경우는 아주 드물겠지만, 난 연구실의 기조가 되는 마법진 석판에 1대 관문의 자아라고 기록하고 베리포즈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종의 기념 같은 것이지만 그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리포즈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가 작업하는 것을 보고는 살짝 물었다.
“그럼 저도 나중에 거기 이름이 기록되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넌 소멸되는 게 아니라 이곳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게 해 줄게. 그때에는 단순한 관문의 자아를 만들고 말이야.”
“헤헤, 그럼 저는 주인님을 따라다니는 건가요?”
“그래도 좋고, 아니면 큰 성 같은 곳을 지키게 해 줄 수도 있어.”
“전 주인님을 지킬래요.”
“그래라.”
내가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관문의 자아, 그러니까 베리포즈의 힘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베리포즈는 없으니 마리포즈의 힘을 얻어야겠지.
“널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려면 물질적인 육체가 필요해. 지하창고는 그대로 있겠지?”
“그럼요. 먼지 한 톨 없게 매일 청소까지 하면서 관리해 놨어요.”
“좋아. 그럼 난 지금부터 가디언을 만들 테니까, 넌 나와 렉스의 식사를 준비해 줘. 아참, 요리는 되니?”
“아버지에게 배웠어요.”
“그래, 그럼 부탁한다. 지금 우린 전력으로 달려와서 배가 고프거든.”
컹, 컹
렉스도 격하게 꼬리를 흔들면서 배가 고프다는 데 동의를 했다.
마리포즈는 얼른 연구실 부엌으로 가서 냉동 창고로부터 얼어붙은 식재료들을 녹여 식사준비를 했다. 원래는 환영이라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연구실 내에서는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
끄으으응.
렉스도 신음성을 흘리네.
음식들이 하나같이 모양은 제대로야. 아주 먹음직스러워. 문제는 맛이 너무 너무 너무 없잖아!
나는 슬픈 눈으로 보기에만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보았다. 이렇게 배가 고픈데도 맛이 없다고 느낄 정도라니.
베리포즈는 내가 일류 주방장의 실력을 주입시켜 놔서 수백 가지 요리를 자유자재로 만들뿐 아니라 하나같이 최고의 맛이었거든.
마리포즈는 기본능력에 요리가 탑재된 게 아니라 정말 베리포즈로부터 신부 수업하듯이 배웠다고 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베리포즈나 마리포즈는 사람의 입맛을 모르잖아. 자기가 느낄 수 없으니 그냥 레시피대로 가르치고 배웠는데, 이게 신기할 정도로 맛이 없네.
대충 무슨 맛이냐 하면, 1서클 마법으로 음식을 만들면 딱 이런 맛이 나와. 쩝. 그래서 가끔 가혹한 스승이 1서클 마도사에게 2서클이 될 때까지 자기가 마법으로 만든 음식만 먹게 하는데, 가장 비인간적인 수련법이라고 평가되고 있지.
“맛이……없나요?”
윽, 마리포즈가 눈치를 챘군.
“먹을 만 해. 계속 연습하면 나아지겠지. 뭐.”
끄으으응.
렉스야. 지금 내가 밥을 할 시간이 없으니 그냥 참고 먹자. 이 주 정도만 참으면 될 거야.
나는 불안해하는 마리포즈를 위로해주고는 마음을 비운 채 열심히 요리를 입에 밀어 넣었다. 렉스도 눈치가 있는지 과감하게 눈을 감고 그릇에 담긴 개밥을 핥았다.
“참, 렉스는 육식을 좋아하니까 다음부터는 죽 말고 그냥 고기를 통으로 녹여서 줘. 양념을 할 필요는 없어.”
컹컹!
“예, 그렇게 할 게요.”
렉스야, 그렇게 살았다는 눈빛 하지 마라. 내가 너무 비참하잖니. 흑.
마리포즈의 음식 실력은 나중에 어떻게든 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대충 배를 채운 난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 창고에는 내가 전생에 모아 놓은 재물들 대부분이 있다. 또한 창고 옆에 있는 내 작업실은 거의 완성시켜 놓은 가디언의 몸체가 있다.
원래는 베리포즈의 몸으로 쓰려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걸 고쳐서 마리포즈에 어울리는 형태로 만들어야하니 일이 늘어난 셈이다.
“좋아, 일단 뼈대 규격부터 조정하자.”
나는 가디언의 외부 육체를 다 융해시키고 뼈대만 남겼다. 그리고는 뼈대를 하나씩 떼어 절반 정도의 크기로 줄여나갔다. 뼈대는 아다만티움이 함유된 합금이라 단단하기가 드래곤본에 비교될 정도지만 판금스프링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탄력이 있어 충격에도 강하다.
내가 만든 가디언은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골렘이 아니다. 이것의 기본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인데, 아공간 코어의 기능을 활용해서 아머를 집어넣을 경우 사람과 거의 비슷한 육체가 드러난다.
“여성형 모델이 어디 있더라.”
다행히 아공간 코어를 만들 때 여성형 모델도 준비한 게 있다. 대마법사가 아닌 지금은 코어를 만들기는커녕 뼈대 하나도 힘들다.
원래의 코어 대신에 여성 형 코어를 넣고, 크기를 조절한 뼈대를 조립했다.
그리고 그것을 인공피부 생성장치 속에 넣고 가동시키니 부글부글하는 소리와 함께 뼈대에 사람의 근육과 비슷한 외부 육체 성분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내장은 없고, 체모가 자라지는 않지만 겉으로 보면 인간의 육체와 거의 비슷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육체가 완성되자 아공간 코어에 평상시용 옷과 전투시의 갑옷을 세팅했다.
외부 육체 성분 속에 함유된 금속질이 피부 밖으로 나오면서 일차 장갑을 만들고, 아공간 코어로부터 튀어나온 풀 플레이트 아머가 일차 장갑에 달라붙는 식이다.
인간의 육체라면 이런 순간적인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지만 일차 장갑이 드러난 가디언의 외부 육체는 공성포로 맞아도 튕겨낼 정도의 탄력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
“된 건가.”
여기까지 조립하는 데 대충 보름이 걸렸다. 생각보다는 빨랐다고 할까? 예전에는 나이든 몸이라 아무래도 동작이 느렸던 거 같다. 그때의 움직임이라면 한 달 가까이 걸렸을 것이다.
“좋아, 그럼 시험해 보자.”
나는 가디언의 코어를 활성화 시켜 전투 모드를 발동시켰다.
파캉, 차차차창
옷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면서 대신에 수많은 금속의 실이 나와 피부를 감아 조인다. 그리고 피부로부터 살짝 떨어진 공간에 아머의 각 파츠가 나타나 몸에 달라붙듯이 조립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약 1초.
나는 아머의 장착이 완벽한지 꼼꼼히 확인했다.
“역시 허리가 좀 길었나.”
한 번에 완벽해질 수는 없나 보다. 나는 미세한 조절이 필요한 부분을 체크하고 다시 변신을 풀었다.
문제는 미세한 조종을 위해서는 다시 외부 육체를 녹이고 뼈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좀 단순하게 만들 걸 그랬나.”
나는 살짝 후회했지만 그래도 이 가디언은 한번 제대로 세팅해 놓으면 자기 회복 기능까지 있으니 장기적으로 볼 때 나쁜 건 아니다.
그렇게 다시 재조립하는 데에 일주일이 걸렸다.
그 사이 마리포즈는 여전히 맛없는 요리를 만들었는데, 나는 약간 꾀를 내서 정식 요리보다는 샐러드나 수육 같이 양념 없이 단순하게 삶거나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주문했다.
마리포즈는 평상시 외형을 앞치마를 한 하녀의 모습으로 다녔는데, 반투명한 모습이 거의 유령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무척 활달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난 이제 마리포즈를 그냥 마리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마리도 나를 주인님이 아닌 렌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튼 가디언의 육체가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마리와 융합을 할 차례다. 그런데 그러려면 연구실의 코어를 멈춰야 하고, 그 경우에 이곳의 결계가 사라지면서 난방시설이 날아간다.
극지방의 추위가 그대로 몰아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준비를 다 하고 마지막으로 융합을 해야겠군.”
가장 중요한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다른 일들도 처리해야겠지. 다음에 할 일은 렉스에 대한 보호장치다.
렉스가 아무리 괴물처럼 되었다고 해도 고위 마법사를 만나면 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런 만큼 최소한 렉스가 어떤 상황에서라도 죽지 않을 정도로 방어적인 대비를 해야 한다.
나는 렉스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렉스야, 내가 널 위해 근사한 개목걸이를 만들어 줄게.”
컹컹컹컹컹
얘가 선물을 좋아하네. 이렇게 맹렬하게 꼬리를 흔드는 건 처음 본다.
좋아, 네 기대에 모자람이 없는 멋진 목걸이를 만들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