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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22화 (22/250)

로엔의 마나뱅크 22화

도망을 가도 어떻게 가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둘째 치고 파우스 스승님은 이곳에 가문이 있다. 마탑 사람들과의 친분도 있기에 모든 것을 버리고 훅 떠날 수는 없다.

행적을 감추지 않고 빈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는 방법이 뭘까?

그 답은 파우스 스승님이 내셨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 있는데, 이게 오히려 도움이 될 거 같구나.”

“무슨 고민인데요?”

“최근에 옆 왕국인 도리아스와의 분쟁이 심화된 모양이더구나. 아마 전면전까지는 몰라도 꽤 민감한 상황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래서 볼스테아 왕실에서 마탑으로 마법사 지원을 요청해 왔고, 빈츠 경은 우리 마탑에서 인원을 차출하라고 하고 있단다.”

아항, 역시 빈츠 답네. 시라브 마탑을 실질적으로 손에 넣었으니 위험한 전쟁에는 이쪽 사람을 쓰겠다?

스승님은 이 점에 대해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셨던 듯하다. 전쟁터에 나간 마법사는 아무리 보호받아도 위험하다. 막말도 이쪽도 적을 칠 때 마법사부터 어떻게 하려고 하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건 피할 수 없는 의무조항이기도 하다. 전시에 마도병단을 운용하도록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마탑은 국가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는 것이다.

문제는 원래는 세 개의 마탑에서 착출해야 하는데, 시라브 마탑이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다.

파우스 스승님은 말했다.

“난 아직까지는 5서클 마법사로 등록이 되어있으니 내가 직접 나간다면 몇 명분은 대신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우리 브로스마이어 가문은 전시에 솔선해서 참전하는 것을 가훈으로 삼고 있으니 이참에 가주로써 의무를 다 할 생각이다.”

저기요. 스승님. 지금 겨우 1서클 될까 말까 하는 분이 5서클이라 하고 전쟁터에 나가면 난리 나요.

전쟁이 안 나면 모르겠는데, 일단 나면 본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문제가 되거든요.

아무래도 스승님은 당신 때문에 시라브 마탑이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덜 보내려고 본인이 희생할 생각만 하신 것 같은데 말이야. 이게 전력이 부족해서 작전이 실패하면 다 죽을 수도 있잖아.

지극히 위험한 생각인 거지. 전쟁이 안 일어나고 끝난다면 나쁜 생각은 아닌데, 최소한 전력측정을 속이면 유사시에 큰일이 난다고.

이분이 전쟁이나 분쟁에 참여한 적이 없어서 그쪽은 개념이 없으시구나.

내가 황당한 표정을 안 지으려고 억지로 참고 있을 때 스승님의 말은 계속 되었다.

“렌, 너는 몰던하고 같이 남쪽으로 가거라. 내 이곳의 일이 안전해지면 널 부르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도 스승님과 같이 가지요.”

“아직 어린 너까지 군에 들어갈 필요는 없단다.”

“스승님, 저 3서클이잖아요. 그리고 싸워본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진짜 전쟁이 나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어요.”

“네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안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단다.”

“스승님.”

“이번에는 내 말을 들어라. 스승으로써의 명이다.”

아 놔, 거기서 강제권을 발동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파우스 스승님은 삶의 회의를 느낀 것 같다. 본의 배신에 충격을 받고 빈츠의 음모로 인해 시라브 마탑까지 난을 겪게 되었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판단을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이성을 잃은 분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알았어요. 스승님 말씀에 따를게요.”

“그래, 나중에 성장해서 충분히 강해진 뒤에 돌아오거라. 그때에는 브로스마이어 가문의 일도 부탁하마.”

유언처럼 말씀하지 마세요. 내 자존심을 걸로 스승님이 벽을 똥으로 도배할 때까지 살게 해 드릴 거니까요.

*

파우스 스승님에 의해 계획이 세워지고 난 아무 말 없이 따랐다.

스승님은 마탑의 옛 친구 분들과 몇몇 노마법사들을 설득해서 젊은 마법사들이 아닌 나이든 마법사 위주로 구성을 했다.

이것은 내가 살짝 의견을 냈는데, 다른 마탑에서는 주로 젊은 마법사들을 내보내니 이쪽에서 맘 잡고 고위 마법사가 나가서 지휘부를 형성하자고 했다.

그분들은 파우스 스승님이 현재 마법을 거의 못 쓰는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도병단 최고 지휘관으로써 지휘만 하라고 도움을 주기로 하셨다.

탑에 남겨진 젊은 마법사들 역시 선배와 스승들이 솔선수범해서 군에 들어가고, 그 덕분에 자신들은 보호받게 되었기에 감격해 했다.

“스승님이 인덕이 있구나.”

노마법사들이 스승님을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본 나는 약간 마음을 놓았다. 무엇보다 노마법사들은 젊었을 때 참전 경험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전쟁초보 마법사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분들은 마법적 재능이 떨어져 평생 노력해도 마도사가 되지 못했지만 인간적인 정과 의리를 가슴에 담고, 머릿속에는 전쟁 경험이 들어있으니 가장 든든한 아군이다.

스승님도 몇 번이나 그분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위험한 상황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허허허, 마리오스 경이 마지막까지 자네를 총애했지. 우리는 마리오스 경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이번에 갚도록 하겠네.”

마리오스 경은 파우스 스승님의 스승님이다. 2대 탑주이고, 지금까지도 노마법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듯하다.

그렇게 의외로 희망적인 마도병단 구성이 끝났다.

임시 마탑주인 네티스 경이 탑에 남고, 파우스 스승님을 필두로 한 시라브 마탑 마도병단은 정식으로 출진을 했다. 락티움 마탑의 인원까지 이쪽에서 동원을 한 셈이라 아마 이번 출진은 우리 마탑이 최대 규모일 것이다.

나는 일단 파우스 스승님과 같이 출발을 했다. 그러나 도중에 스승님이 시키는 대로 부대를 이탈해 나오기로 했다. 애초부터 마도병단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시라브를 떠나 이틀 정도 오자 스승님은 나를 불러 같이 한적한 곳까지 갔다.

“이걸 가져가라. 내 마법서 몇 권과 가문에서 급한 대로 마련한 자금이다. 남방으로 가면 마도사가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도록 해라. 너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큰 성취를 이룰 거라 믿는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20년 정도는 걸릴 거라 생각하고 계시겠죠?

스승님은 나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계신다. 난 조용히 스승님이 주는 재물과 마법서를 받아들었다.

확실히 유서 깊은 귀족가문답게 급히 마련한 금액이 장난 아니다. 난 그것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스승님께 인사를 했다.

“꼭 돌아올게요. 스승님.”

“그래, 너를 만난 건 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제자야.”

스승님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꼬옥 껴안으셨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말했다.

“내 진명은 살브르 토닥이다.”

진명까지 가르쳐 주시다니. 스승님 그러지 마요.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컥해서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냥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하고 그들과 헤어졌다.

*

무리와 헤어져 잠시 시라브 쪽으로 걸어서 돌아오니 길 한쪽에 몰던이 마차와 힘께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파우스 스승님과 계획한 대로다.

“몰던.”

나는 복잡한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몰던의 이름을 불렀다.

몰던은 내 등을 툭툭 치고는 나를 마차에 태웠다.

“파우스 선생은 네게 미래를 의탁하셨다. 지금은 살아남아 후일을 기약할 생각만 하거라.”

침울한 표정의 나를 위로하는 몰던, 진득한 정이 느껴진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몰던을 똑바로 쳐다보고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아니요, 몰던. 전 이대로 떠나지 않을 거예요.”

몰던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훗, 내가 시킨 대로 할 거 같아요? 스승님이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터에 서는 걸 놔두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라고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릴 수는 없어요. 난 스승님이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무슨 수를 써서든 스승님과 같이 살아남을 거예요.”

“무슨 계획이 있니?”

“미스틱 엑스를 찾을 거예요. 그분이라면 뭔가 도움을 주실 것 같아요.”

몰던은 ‘어떻게 찾을 거니?’라고 묻고 싶겠지만 난 찾을 자신이 있다고요. 암, 내가 나를 찾는 거니까. 도움? 확실하게 줄 수 있지. 내가 나를 돕는 거니까.

몰던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확실히 그 분을 찾을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구나. 그럼 같이 찾아보자꾸나.”

“아니에요. 몰던은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같이 찾으면 곤란하거든요. 후후훗.

“뭐냐?”

“몰던 친구 분이 용병단을 이끌고 있다고 하셨죠?”

“그래. 오랫동안 연락을 안 했지만 지금도 용병단이 있는 건 확실하다.”

“이걸로 그분들을 고용하고 싶어요. 전쟁이 안 나면 몰라도, 전쟁이 나면 아무래도 스승님을 도울 수 있는 병사들이 필요해요.”

나는 스승님이 준 재물을 통째로 몰던에게 건넸다. 자금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승님이 알아서 챙겨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거 아니면 내 마법무구 중 하나를 처분해야 했다고.

아무튼 이정도면 웬만한 용병단 하나를 참전시킬 대금은 될 걸?

“알았다. 흐, 오랜만에 피가 끓는구나.”

아니, 저기요. 지금 그 이를 드러내는 악당 같은 미소의 의미는 뭔가요? 몰던은 그냥 용병단만 고용하고 스승님과 같이 후방에 계셔야 하거든요.

뭔가 실수했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몰던, 설마 그 나이에 칼 들고, 아니 창 들고 설칠 생각은 아니죠?

몰던은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내 등을 세게 팡팡 치고는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내 하루라도 빨리 용병들을 데리고 올 테니, 넌 너의 할 일을 해라. 널 믿는다. 아들아.”

“다녀오세요. 아버지.”

갑자기 아들이라 부르니 목이 막혀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쩝.

나는 몰던이 마차를 몰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들판에는 나와 렉스만 남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북쪽을 보았다.

“대충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두 달 정돈가.”

계산을 해 보니 스승님이 국경에 도착해서 정식으로 부대정비를 하고 뭔가를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돌아와야 한다.

몰던도 그걸 알기에 서둘러 떠난 것이다.

“좋아. 렉스야. 네가 힘 좀 써야겠다.”

나는 렉스의 목을 툭툭 두드려 주고는 등위에 올라탔다. 마법으로 날아서 갈 수도 있지만 그러다 잘못해서 마법탐지에 걸리면 내 행적이 드러난다.

마법은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부터 내가 가려는 곳은 길이 없는 산악지대가 많기에 마차는커녕 말도 다니기 힘들다.

믿는 건 렉스뿐, 산과 들, 숲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이 녀석이라면 충분히 시간 내에 그곳에 갈 수 있다.

“가자.”

우오오오오옹

렉스는 오랜만에 나를 태우고 달리는 게 신이 나는 듯 크게 울부짖었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대륙의 천정이라 불리는 북부산맥, 왕국을 세 개나 지나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거리다.

달려라. 렉스. 네 다리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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