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1화
이곳에서 미스틱 엑스라는 명칭은 사부님이나 락티움 마탑의 빈츠 경 정도만 안다. 빈츠 경이 따로 조사를 시켰을 지는 모르지만 도망간 본이 그걸 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바로 지례짐작으로 미스틱 엑스가 튀어나온다?
젠장, 결론은 하나군.
“스펠 플래그의 독을 준 자가 빈츠 경인가?”
“크크크, 잘도 아는군. 그렇다.”
“그렇다면 넌 제거되고 있는 중이군.”
“나는! 그 마족 같은 빈츠가!”
본은 흥분해서 충혈된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자 본의 몸을 덥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렸고, 본의 배에 그려진 붉은 마법문양이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물의 표식, 이미 마족에게 바쳐졌나?”
“흐으으, 괴롭다. 마족의 벌레들이 내 창자를 먹고 있어.”
그런 거 같다. 볼록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한 배는 벌레들이 뭉쳐 새로운 몸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마도사를 제물로 마족을 소환한다면 꽤 쓸만한 놈이 나오겠는데? 진행도로 보면 대략 3일 안으로 나올 거 같다. 조금만 늦었으면 골치 아플 뻔 했네.
“디스펠!”
파지직
튕기는군.
“뿌우, 저 안에 뭉치는 것들을 막아.”
“뿌웅, 저기 더럽당. 그래도 한당.”
뿌우가 스태프에서 튀어나와 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내부에서 마족의 기운과 뿌우의 힘이 부딪쳐 본의 몸 이곳저곳이 올록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크아아아아아악!”
고통이 심하겠지. 뼈를 철퇴로 때려서 가루로 만드는 듯한 느낌일 테니까. 그런데 지금 그거 신경 쓸 상황이 아닌 건 본 너도 알지?
이 마족 튀어나오면 골치 아프다. 나오기 전에 어떻게든 막던가 최소한 약화라도 시켜야 해.
나는 연속해서 계속 디스펠을 사용했다. 빈츠가 직접 이 소환진을 그린 듯 7서클의 힘이 느껴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계속해서 쓰다보면 부분적이나마 약화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소환진은 완벽하지 않거든.
파팍
“좋아. 하나 깨지고.”
열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육망성으로 구성된 마법진의 한 축을 부쉈다. 몸의 유지를 보강해주는 부분이다.
그러자 본의 비명이 두 배쯤 커졌다. 그의 몸이 이상하게 변했다.
팔 한쪽이 몸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팔은 두 배쯤 길어졌다. 다리가 문어처럼 관절없이 비틀렸다. 눈 아래에 다시 눈에 여섯 개쯤 더 생기고 입이 길게 찢어졌다.
마족과 융합되는 중이다. 이제는 몸이 녹아내리는 느낌이겠군. 그만큼 안에 있는 마족의 몸에는 본의 육체성분이 섞이고 있는 거다. 한 마디로 약해지고 불안정한 몸이 되는 거지.
나는 냉정하게 본의 상태를 관찰하면서 이번에는 동결 마법으로 본의 몸을 얼렸다.
얼어붙은 본의 몸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끄아아아아! 제발 날 죽여줘.”
안 되는 거 알잖아. 지금 널 죽이면 내가 제물이 된다고. 그리고 마족은 바로 튀어나오고.
이건 고의가 아니야. 내가 널 곱게 놔둘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고문까지 생각은 없었거든. 미안.
나는 얼어서 갈라진 본의 몸속에 내 피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본의 몸속에 있는 마족의 기운이 이게 왠 떡이냐 하는 느낌으로 열심히 피를 빨아들였다.
그렇지. 더럽혀지고 얼어붙은 피보다는 젊고 싱싱한 내 피가 좋겠지. 하지만 말이야. 내 피는 먹으면 체해.
“결정화!”
파파파팡
마녀의 주술 중에 자기 피에 마나를 주입해서 굳히는 수법이 있다. 보통 마녀는 이걸로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만들어 쓰는데, 이렇게 결정화 된 피는 닿기만 해도 물질이 부식되고 마나가 분해되어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끼아아아아!”
본의 입에서 사람이 아닌 것의 비명소리가 흘러 나왔다. 마족이 지르는 소리다.
지금 저 마족 녀석은 몸속에 수백 개의 피 결정 파편을 품었다. 멀쩡한 마족도 죽을 둥 살 둥 한 치명적인 공격을 이제 새로 태어나려는 놈이 견디기는 쉽지 않을 거다.
푸악
“나왔군!”
본의 배를 찢고 나온 마족은 아직 육체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반쯤 흘러내리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놈은 네 개의 눈으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한 개밖에 없는 팔을 뻗었다.
나는 즉시 옆으로 피하며 외쳤다.
“뿌우, 들어와!”
“알았당.”
뿌우는 허공에서 몸을 부르르 한 번 떨어서 마족의 기운을 털어버리고는 스태프 속으로 들어왔다. 난 창날을 꺼내 전격의 힘이 깃든 창으로 마족의 머리를 찔렀다.
팍, 파지지지직
“끼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악!”
마족의 하반신은 아직 본의 몸속에 있다. 나는 둘의 비명소리를 무시하며 연속해서 창으로 마족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그 사이 마족도 팔로 공격을 하려 했지만, 창속에 있는 뿌우가 손만 밖으로 뻗어서 마족의 팔을 잡아버렸다.
잘한다. 뿌우. 모양 좀 안 나오면 어때? 팔 달린 창. 유니크 해서 좋네. 뭐.
“끝이다.”
나는 창날 반대편에 달린 엘레멘탈 정령석으로 반쯤 갈라진 마족의 머리를 때렸다. 동시에 마나를 주입해서 정령석의 힘을 강화하니 방어 마법의 힘이 마족의 몸을 장악해 그대로 분해를 해 버렸다.
펑
터지네. 더럽게.
그래도 강식장갑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마족의 피와 육체가 내 몸에 침투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뿌우야. 렉스 몸에 묻은 것 좀 털어줘. 저거 살 속을 파고들면 골치 아플 수 있으니까.”
“알았다. 잘 말려서 털어준다.”
위이이잉
돌개바람 모드인가. 순식간에 렉스의 털이 뽀송뽀송하게 변한다. 물도 아닌 마족의 피와 육편이 깔끔하게 털려나가는 걸 보니 상당한 압력이다.
“끄으, 마족을 이리 쉽게 처리하다니.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구나. 미스틱 엑스.”
마족이 튀어나와 몸이 거의 반쪽만 남은 본이 말했다. 고통은 사라졌나보다. 아니면 죽기 직전이라 고통을 못 느끼거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본에게 물었다.
“뒤뜰에 내 마법서를 숨겨 놨다. 거기에 모든 것이...”
마법서를 집 밖에 숨겨 놨다고? 만약을 대비하긴 했었군.
나는 숨이 끊어진 본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마법진의 흔적 같은 것을 잘 봐두면 상대의 실력과 빈틈을 알아낼 수도 있다.
9서클에 도달하면 모든 마법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는 아무래도 뭔가 비효율적인 부분이 있다. 마도사가 3서클 마법사의 주문을 들으면 피식 웃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도 6,7서클 마도사 주문을 들으면 옛날에 나도 저랬지 하는 생각에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이걸 웃고 끝내는 게 아니라 주문을 방해하기 위해 이용한다면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경우가 있다.
빈츠의 실력을 보니 대충 견적이 나온다. 이놈은 기회만 되면 거의 8서클에 도달할 것 같다. 빈틈을 찔러서 어쩌고 저쩌고 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거지.
“으음, 지금 붙으면 힘들겠는데.”
최소한 내가 5서클은 되어야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다. 거기에 저쪽은 가문의 수장, 혼자 붙는 것도 아니고 뒤로 페론의 암살자와 연관도 있다. 반대로 이쪽은 스승님과 몰던의 안전도 생각해야 하고.
“고민되네. 쩝.”
나는 일단 뒤뜰로 가서 주변을 뒤졌다. 땅이 파여진 곳에 작은 상자가 숨겨져 있고, 그 안에 마법서 몇 권과 약간의 보석과 금화, 그리고 반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나는 우선 마법서를 펼쳐 본이 남겼다는 내용을 찾았다.
그 안에는 스승에게 선택받지 못한 자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재능은 자신이 더 뛰어난데 인품 때문에 자기 친우이자 처형이 후계자로 발탁되니 본은 절망감에 휩싸여 방황을 한다. 그러던 중 락티움에서 임시 마탑주로 와 있던 브롬 경이 유혹의 손길을 펼쳤다.
마탑주가 될 수 있다는 브롬 경의 제안에 본은 자신의 아내에게 스펠플래그의 독을 풀었고, 예상했던 대로 친우는 여동생을 구하고 은거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인인 헬렌이 스승의 막대한 마나를 이용해서 본을 추월했고, 4대 마탑주의 자리를 이었다.
집념이 지나쳐 한이 된 본은 결국 헬렌에게 다시 손을 썼다. 그녀가 죽으면서 스승의 마나를 남편인 자신에게 넘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헬렌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오빠의 마나홀을 복구할 연구를 했고, 죽기 전에 오빠에게 모든 마나를 넘긴 것이다.
5대 마탑주가 되어 목표의 절반을 채웠지만 스승의 마나를 얻지 못하면 앞으로의 발전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파우스를 제거하고 그 제자로부터 마나를 빼앗을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모든 것이 파국에 이르러 버렸다.
-락티움 마탑에서 사람이 와서 나에게 숨으라 했다.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복귀시켜 준다고.
과연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어쩌면 난 제거될 지도 모른다.
아마 이 글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후일 것이다.
미련은 없다. 일을 저지른 것은 나니까. 후회할 마음도 없지만 억울하게 이용당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빈츠, 그자만큼은 용서하기 어렵다. 아무쪼록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빈츠측이 아닌 스펠 플래그에 대한 조사를 위해 나온 자이기를 바란다.
마족과도 같이 음험한 빈츠에게 나와 같은 죄의 결과를 알려주기를 기원한다.-
“흠, 결국 혼자 뒤집어쓰긴 싫었단 소리군.”
이제 어떻게 한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빈츠를 찾아가서 딱 때려잡고 싶다.
나는 스태프에 박아 넣은 엘레멘탈 정령석을 보았다. 그냥 이거 확 터뜨려 버려?
“아니지, 그놈의 죄를 세상에 다 알려서 화형을 시켜야 해. 그냥 암살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쉬워.”
기다리자. 내가 적어도 5서클 정도는 되어야 빈츠를 상대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도망가서 숨어 있자.
결론을 내린 나는 결계를 나와 마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장의 편지를 썼다.
“뿌우야, 이 편지와 마법서를 파우스 스승님께 전해 줘.”
“알았당.”
“스승님이 뭐라고 하든 편지만 주고 바로 나와. 나한테 바로 돌아오지 말고 아까 그 숲까지 갔다가 몰래 오라고.”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당.”
후훗, 뿌우 녀석, 생각하면서 일을 하는 타입이군. 편해서 좋네.
난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후 파우스 스승님이 오셨다.
심각한 얼굴, 뭐, 내가 편지를 좀 진지하게 쓰긴 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스승님, 어쩐 일이세요?”
“미스틱 엑스에게서 편지가 왔다. 듣던 대로 대기의 정령을 부리더구나.”
“그분을 만나셨군요! 그런데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이세요?”
“놀랍게도 그분은 본을 추적해서 행방을 찾았더구나. 이 일의 전말이 적힌 본의 마법서를 같이 보내왔다.”
“일의 전말이라고요?”
“직접 읽어봐라.”
“예.”
나는 표정연기를 하며 진지하게 본의 마법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었다. 그 다음에 연속해서 내가 써서 스승님께 보낸 편지도 읽었다.
그곳에는 미스틱 엑스의 이름으로 몸을 숨기라는 호의적인 충고가 적혀 있었다. 사건이 커지면 스펠 플래그에 걸린 경험이 있는 스승님과 나는 일종의 증거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제거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만큼 위험이 닥치기 전에 몸을 빼는 게 현명하다는 내용이다.
“이제 어떻게 하죠?”
“그걸 나도 모르겠구나.”
파우스 스승님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다.
“도망가죠. 미스틱 엑스라는 분의 충고가 맞는 것 같아요.”
“그래, 그래야겠지.”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미안해요, 스승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