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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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 스승님과 내가 락티움 콘돌스핀 마탑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마탑주인 빈츠 경 이외에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른 장년의 남자, 입고 있는 로브의 문양으로 보아 체프코트 가문의 마법사인 것 같다.
6서클 정도의 수준으로 나이에 비해 상당한 실력을 지녔다.
“마이어 체프코트라 합니다. 혹시 파우스 경께서는 미스틱 엑스라는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하십니까?”
성격 참 급하네. 이쪽 인사는 받지도 않고 바로 본론으로 가는 거냐.
“미스틱 엑스라, 처음 들어봅니다.”
“그렇다면 혹시 스펠 플래그가 임의로 전염된다는 사실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흐흠, 그렇다면 경과 경의 제자 이외에 스펠 플래그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까?”
“그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가 알기로는 죽은 제 여동생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질문을 세 번 받은 파우스 스승님이 이유를 묻자 마이어 경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어차피 사건 당사자들끼리이니 숨길 필요는 없겠군요. 사실은 제 형이자 체프코트 가문의 수장인 아론 체프코트 경께서 이번에 한 장의 편지와 스펠 플래그에 걸린 사람의 피를 받았습니다.”
그 뒤의 내용은 내가 한 일이니 안 들어도 뻔하다.
아론 경은 피를 분석했고, 거기에 정말로 스펠 플래그의 독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결국 아론 경은 결단을 내려서 완전분석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진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한편, 단서인 제공자인 미스틱 엑스라는 마법사와 스펠 플래그에 걸린 당사자를 찾기 위해 동생인 마이어 경을 보냈다는 얘기다.
“흐흠, 대기의 정령이 편지를 전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스승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빈츠 경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하긴, 정령을 소환하려면 최소한 6서클이라는 소린데, 자기 영역에 자기가 모르는 마도사가 숨어 살고 있다면 마탑주로써 체면이 서질 않겠지.
마이어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정령 소환에 대한 마법진은 이미 거의 소실되어 현재에는 우리 체프코트 가문과 가주 이외에는 멸절된 헬비스트 가문밖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 최강의 마도사였던 엘시아 프리스톤 경의 가문도 정령소환 마법진에 대한 비법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지요. 그런데 대기의 정령이 나타났으니, 이건 어쩌면 행방불명되었던 이반 헬비스트 경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게 체프코트 가주님의 판단이십니다.”
엥, 정령 소환 마법진이 소실되었다고?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야.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내가 뿌우를 그쪽에 심부름 보낸 것은 그냥 6,7 서클 마도사라는 인상을 심어주려 했던 건데, 이게 이미 사라진 기술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빈츠 경이 심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반 경이 제자를 키웠다고 해도 벌써 정령을 소환할 수는 없을 테니 어쩌면 본인일 지도 모르겠군요.”
“그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이반 경이라면 본인이 직접 완전분석 마법을 시전 했을 테니까요. 대기의 정령을 부려서 편지를 보낸 미스틱 엑스라는 분은 7서클 일 거라는 게 가주님의 판단이십니다.”
“7서클 마법사가 이곳에서 덴판 제국까지 정령을 보냈단 말입니까? 믿기 어렵군요.”
빈츠 경이 놀란 눈으로 확인하듯 되물었다.
역시 마탑주답게 뭘 좀 아네. 정령을 보낼 수 있는 거리는 친화도와 마나량에 비례하니까, 8서클이라도 쉽지 않은 일을 7서클이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상식적으로 계산이 안 나오거든.
마이어 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심부름 온 대기의 정령을 볼 때 계약 내용이 임시 계약이 아닌 결속 계약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결속 계약이라고 해도 거리에 한계가 없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맞습니다. 이 경우는 미스틱 엑스라는 분의 정령친화도와 계약 내용에 특별함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군요.”
“정령친화도와 계약 내용이라...”
“계약 내용…….”
쩝, 다들 계약 내용이라는 말에 꽂혔네. 자신들이 모르는 정령과의 계약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봐요. 오해거든요. 그냥 마나량으로 승부를 본 거라고요.
설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 꽤 답답하네. 다른 사람은 멋대로 생각해도 상관없는데 스승님까지 고민하니 말이야.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들 생각하세요.
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윗분들이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이후에도 마이어 경은 스승님께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결국 미스틱 엑스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어쨌든, 상황이 중요하니 내일 당장 본 경을 소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이어 경도 그때 같이 참석해서 조사의 공정성을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내가 예측한 대로군. 본은 이제 끝장이다. 빈츠 경으로써는 이 일이 본 경 혼자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체프코트 가문에 증명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스펠 플래그를 퍼뜨리려 한 혐의가 콘돌스핀 전체에 올 지도 모르니까.
빈츠 경이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고 우리는 숙소로 안내되었다.
파우스 스승님은 아직도 본 경에 대해 정이 남아 있는지 상당히 슬픈 표정을 짓고 계셨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잠꼬대로 본 경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셨지.
그 나쁜 놈, 자기 욕망을 위해 친구와 아내까지 죽이려 한 놈. 스승님, 그런 놈에 대해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역시 파우스 스승님은 정이 많아서 친구의 배신을 단호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우신가보다.
에효. 젠장. 마음 좋은 사람이 더 고생하는 게 세상의 이치라니까.
숙소에는 미리 와 있던 몰던이 간단한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잘 되었습니까? 시장하실 텐데 우선 뭐 좀 드시죠.”
몰던은 정말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두 사람의 뒷바라지를 하는구나. 이제는 몰던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로 느껴질 정도다.
파우스 스승님도 몰던의 잔정이 마음에 와 닿는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때, 빈츠 경이 숙소에 방문했다. 우리는 또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얼른 식사를 치우고 차를 끓여 빈츠 경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
“아까는 마이어 경이 있어서 말을 못 했는데, 정말 미스틱 엑스라는 분을 모르나?”
“예, 짐작 가는 것도 없습니다.”
“내 생각은 마이어 경과는 좀 다른데, 아무래도 미스틱 엑스라는 분은 이반 헬비스트 경과는 관계가 없는, 그러니까 전혀 새로운 은거 마법사인 것 같단 말이네.”
“그렇지. 이건 내 감인데, 어쩌면 그자는 기존의 마탑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지도 몰라.”
뜨끔
나는 뒷목을 누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저씨, 감 좋네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한 수 배우고 싶네. 정말.
“빈츠 경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요.”
“그렇지. 그런 만큼 만약 그자를 찾으면 어떻게 해서든 우리 마탑에 끌어들이고 싶단 말이야.”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정령 소환 마법진이니…….”
“그렇지. 이미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7서클에서 8서클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정령에 대한 깊은 지식이 필요하고, 그걸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정령과 계약을 해야 된다는 거 말일세.”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체프코트 가문이 정령 소환 마법진에 대한 정보는 절대로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지요.”
“맞아. 아마 이번에 온 마이어 경도 그걸 확인하러 온 걸 거야. 이반 경과 관련이 있다면 몰라도 만약 없다면 회유하든 제거하든 하려고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크겠군요.”
아하, 그런 상황이었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다보니 현재의 마법가문들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있는 지를 대충 알만 하다.
그러니까 마나뱅크의 이용으로 인해 마나의 양이 풍족해진 마법사들은 마도사까지는 옛날보다 상대적으로 빠르고 쉽게 된다. 하지만 일단 6서클이 되면 마나의 양보다 깨달음이 중요한데, 지식의 극치라 말할 수 있는 마법진에 대한 연구가 없으면 7서클이 되지 못하고, 정령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야 8서클의 관문을 뚫을 수가 있는 거다.
그런데 각 가문에서는 그 점을 이용해 마법진과 정령에 대한 정보를 엄중히 제한해서 자격이 되는 직계 마법사들에게만 전수를 한다.
특히 정령에 대한 정보는 현재에는 거의 체프코트 가문에서 독점하다시피 한다. 그런데 만약 미스틱 엑스라는 자를 회유할 수만 있다면 콘돌스핀 가문에서도 8서클 마법사를 배출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엘시아 이야기가 나왔는데, 엘시아가 최고의 마법사로 군림할 당시 이상하게 정령 소환 마법진을 알고 있는 마탑들이 하나둘씩 멸망해 갔다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엘시아가 정령 소환 마법진을 손에 넣는 한편,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새로운 8서클 마법사들의 탄생을 원치 않았기에 암중으로 그런 일을 벌였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증거가 없어서 엘시아를 문책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프리스톤 가문도 지금까지 정령 소환 마법진이 없다는 것이 혐의를 벗을 수 있는 가장 큰 변명거리이기도 하고.
빈츠 경이 애가 타는 이유가 있구만.
이 아저씨는 내가 보기에 7서클에서 갈 데까지 갔거든, 정령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8서클을 못 가고 있다고 생각할 만 해. 이 정도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정령에 대한 정보를 찾고 싶을 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엘시아에게 정령 소환 마법진은 가르쳐 주지 않았지. 정령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해 줘서 열심히 연구했으면 독자적으로 개발했을 테지만, 안 했나보네?
밤이 깊어질 때까지 파우스 스승님과 빈츠 경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결론은 미스틱 엑스를 찾자 였지만, 그걸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어디까지나 내 마음 아니겠어? 빈츠 경, 헛짓거리 좀 하시겠군요.
“그리고, 본 경이 정말 이 일에 연관이 되어 있다면 그대로 마탑주의 자리에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 이후에는 자네가 당분간 시라브 마탑을 맡아주게.”
“전 이제 겨우 다시 마나홀을 만들려는 상황인데, 어떻게 마탑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임시 마탑주로는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겠네. 자네는 실무를 담당해주고, 나중에 자네가 마도사가 되면 그때 정식으로 마탑주가 되게.”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허허, 자네 스승님께 부탁받은 것을 지금에서야 이행하는 셈이 되었군. 전에는 자네가 은거해 버리는 바람에 자네의 동생을 마탑주로 세웠었는데 말이야.”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께서 감동하신 모양이네. 쩝. 스승님, 빈츠 경의 눈빛을 잘 보세요. 결코 호의나 선의로 잘 해주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전생에 좀 오래 살다보니 사람 속을 약간은 꿰뚫어 본다. 저자는 지금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식이 쩐다고 할까? 스승님을 제대로 이용해 먹겠다는 음흉한 시선이거든.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스승님이 마도사가 되려면 빨라도 10년, 늦으면 20년 이상 걸리지 않겠어? 그 사이에 시라브 마탑은 실질적으로 빈츠 경이 보낸 임시 마탑주의 손에 들어가는 거잖아. 기존의 마법사들의 불만을 막을 대의명분으로는 스승님을 내세우고 말이야.
뭐, 상관없겠지. 그 정도는 좀 빨려도 될 거야.
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자리를 잡고 나와 스승님이 편안하게 수련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난 수련 말고도 다른 활동도 할 거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