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8화
*
볼스테아 왕국의 수도 락티움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과거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왕국이라 수도부터가 거의 요새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그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이동했기에 말도 사람도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거의 부랑민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도중에 만난 야수나 마물들과 싸우는 사이에 피가 좀 튀어서 냄새도 상당히 났다.
렉스를 먼저 풀어놓고 숲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렉스의 몸냄새까지 났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당당하게 귀족들이 이용하는 관문으로 향했다. 누가 뭐래도 파우스 스승님은 귀족이니까.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도 우리의 겉 행색을 보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정중하게 마차를 정지시키고 신분을 물었다.
“브로스마이어 가문의 가주인 파우스 브로스마이어일세. 마탑의 탑주를 만나러 왔으니 통보해주게.”
“아, 전쟁 영웅 브로스마이어 가문이시군요. 바로 통보하겠습니다. 지나가시지요.”
사람이 둘이나 따라붙는다. 전에 시라브에 갔을 때와 비슷하다. 과연 브로스마이어 가문은 단순한 지방귀족이 아니라 왕국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명예로운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네.
“스승님, 일단 여관에 들러 목욕이라도 해야 될 거 같아요.”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파우스 스승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안내인에게 말했다.
“가까운 여관으로 안내해주게. 이대로는 너무 남루해 보이는구먼.”
“알겠습니다.”
여관으로 가는 이유는 씻는 것 이외에 나와 몰던을 남겨두기 위한 이유가 있다. 물론 나와 몰던은 그대로 여관에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따로 몸을 숨기기로 했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 도망가기로 스승님과 약속을 했다.
물론 난 그러지 않을 거지만 말이야.
계획대로 파우스 스승님은 혼자 마탑으로 가셨다. 나와 몰던은 스승님이 떠나신 후 여관에서 마차도 그대로 놔둔 채 밖으로 나왔다.
몰던은 뒤를 쫓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거리 한쪽으로 가서 나한테 물었다.
“그래서, 네 진짜 계획이 뭐냐?”
“마차와 말을 다시 사서 마탑 뒤쪽에서 기다리는 거에요.”
“파우스 선생과 미리 약속이 된 거냐?”
“아니요. 하지만 스승님이 위험에 빠지면 빠져나올 수 있게 해 놨어요.”
“정말이냐?”
“예. 그러니 우리는 같이 도망갈 준비만 하면 되요.”
“그래, 그럼 서둘러 준비하자.”
몰던은 바로 시장으로 가서 말과 마차를 샀다. 며칠 동안 같이 오면서 느낀 건데, 몰던은 쫓기는 생활에 익숙하다. 고향을 떠나 다른 왕국까지 와서 산골에 양치기로 살게 된 사연이 있는 듯하다.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마탑 뒤쪽으로 갔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경계당하지 않을 적당한 거리다.
나는 마차 안에서 집중을 하고 뿌우와 의식을 연결했다. 엘레멘탈 정령석을 빼서 스승님의 지팡이에 달아 놨거든, 뿌우는 거기에 들어가서 숨어 있는 거고. 정령이 집에 들어가 있으면 탐지가 거의 불가능 하다는 건 정령을 소환해 본 사람이나 알지.
그리고 엄밀히 말해 스승님은 아직 마나홀이 안 생겼기에 마법사라 할 수 없어. 마법사의 지팡이도 그냥 습관적으로 들고 다니는 거고. 그러니 내가 지팡이를 손 볼 걸 모르지.
“텔레파식 링크!”
지지직
아 잡음 심하네. 역시 마탑답게 마법에 대한 방비가 센가보다.
그래도 이게 반쯤은 뿌우의 정령력으로 작동하는 거라 일반 마법으로 보기는 힘들지. 통신 정도는 마법장벽을 뚫을 수 있단 말이야.
[왔냥?]
[그래, 어떻게 됐어?]
[마탑주가 곧 나올 거 같당. 기다리는 중이당.]
[무슨 일로 왔는지 얘기는 했어?]
[했당.]
[기다린 지는 얼마나 됐어?]
[한 시간쯤 지났당.]
나쁘진 않네. 적어도 상대가 고민하고 있다는 소리니까.
스승님을 앞세워 시라브 마탑을 뒤집어엎을 것이냐. 아니면 본과 손을 잡고 스승님을 제거한 후 시라브 마탑을 암중에 조종할 것이냐.
어느 쪽도 일장일단이 있지.
빈츠 레이윰이라는 자가 스승님을 본과 손을 잡으려 해도 바로 스승님을 제거하지는 않을 터, 일단 스승님이 감옥에 갇히면 뿌우가 구출해 낼 거야. 뿌우의 존재가 드러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잖아.
추적을 당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럴 정신이 없을 걸.
난 유사시엔 엘레멘탈 정령석을 폭파시킬 거거든.
엘레멘탈 정령석은 전생에 내가 비장의 한 수로 지니고 다녔던 거야. 저거 터지면 마탑 절반은 날아갈 테니까 빈츠 레이윰은 물론이고 악티움 마탑은 끝장난다고 봐야 해.
스승님을 해하려 하는 놈들은 폭탄 맛을 봐도 싸지. 암.
자, 빈츠 레이윰. 알아서 잘 판단하라고.
난 집중을 유지한 채 기다렸다. 지직 거리는 잡음이 신경을 거슬렸지만 참았다. 잡음 정도로 보아 확실히 콘돌스핀 마탑은 그다지 강한 마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8서클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고, 7서클도 마법진에 능한 자는 나오지 않았나 보다.
고정 마법이나 대형 마법은 아무래도 마법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기본적으로 7서클에서 8서클이 되려면 마법진의 이치에 정통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약하다면 앞으로도 콘돌스핀 가문에서 8서클이 나오기는 힘들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9서클은 어떻게 되냐고? 그건, 하늘이 내는 거야. 암.
9서클이 되면 마법진을 이용해 궁극마법을 쓸 수 있어. 혹자들은 9서클 마법이 궁극마법이라고 착각하는데, 진짜 궁극마법은 말하자면 10서클 마법인 거야.
마법의 틀을 벗어난 진짜 기적인 셈이지. 신의 영역에 살짝 발을 걸쳤다고 할까?
대정령인 포트라를 소환하는 거나, 환생 같은 기적 말이야.
[왔당.]
[그래, 스승님과 그자의 대화와 행동을 그대로 옮겨줘.]
[알았당.]
뿌우는 충실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나에게 알렸다.
*
빈츠 레이윰은 적갈색 머리카락의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는데, 파우스 스승님을 보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스펠 플래그에 걸렸다가 벗어났다고?”
“예, 마나홀이 파괴된 것을 치료하기 위해 아예 마나홀을 녹여서 없애는 연구를 했는데, 스펠 플래그에 걸리게 되자 모험적으로 시도를 해서 성공했습니다.”
“호오, 그것 참 특이한 발상이로군. 그럼 자네는 지금 마나홀이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다시 수련해서 마나홀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크흠,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과감하고, 단호하지만 무모하지는 않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스펠 플래그가 의도적으로 감염된 거 같다고 했나?”
“예, 제 여동생인 헬렌은 두 번이나 스펠 플래그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저와 제 제자도 걸렸지요. 가문의 핏줄 문제라면 제자까지 걸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흠, 딱히 증거는 없는 거군. 그냥 심증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내 자네 스승과 동기였고, 가문의 수장으로써 방계 마탑의 일을 해결해야 할 의무도 있지. 그런데 말이야. 심증만으로는 시라브 마탑에 수장의 권한을 행사하기가 쉽지 않아. 더군다나 자네가 의심하는 건 현 마탑주인 본 빌스검 경 아닌가.”
“그래서 빈츠 경을 찾아온 겁니다. 무조건 본을 어떻게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저와 제 제자를 보호하고, 스펠 플래그가 인위적으로 감염될 수 있는지를 조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본이 범인이라면 빈츠 경 말고는 저희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는 가능하지.”
“스펠 플래그 문제는 꼭 저만의 문제가 아니니, 제가 정식으로 마탑에 의뢰를 하는 것으로 해 주십시오. 다른 마탑에서도 같이 연구와 조사를 할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흐음,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걸.”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일단 좀 쉬고 있게. 다른 사람들과도 상의를 해 봐야 하니까.”
“그렇게 하지요.”
*
대화가 끝나고 빈츠 경이 나갔다고 뿌우가 말하자 난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고 잠시 연결을 끊었다.
스승님이 저런 생각을 하고 계셨군. 보호라. 이거 말이 보호지 스승님이 말한 대로라면 우리는 스펠 플래그의 조사를 위한 생체표본이 될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스승님은 그것까지 각오하신 거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중요한 건 이걸 다름 마탑에 알리고 공동으로 조사를 하게 해달라는 부분이다. 과연 빈츠 경이 이걸 허락할까?
본의 일은 말하자면 가문 내의 치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스펠 플래그를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잘만 하면 엄청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감염을 막는 방법을 알아내도 또 무기로 쓸 수 있는 거고.
“아무래도 스승님의 요청은 묵살되겠네. 스승님은 잡힐 거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스승님의 경우 마법은 몰라도 정치적인 감각은 부족하신 거 같다.
순수하게 스펠 플래그의 위험을 생각해서 마탑과 가문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조사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 것은 좋은데, 그걸 자신의 가문에 대고 말하면 허락이 나오기 어렵지 않겠어? 더군다나 빈츠 경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손익계산에 따라 움직인다고 당신께서 말씀하실 정돈데 말이야.
내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쯤 빈츠는 본 빌스검과 수정구로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고 있겠지.
더 늦기 전에 스승님을 구출하고 마탑을 폭파시키자.
아니지, 기왕이면 본이 온 다음에 폭파시키면 일석이조잖아. 그럼 며칠 기다려야 하나?
나는 결론을 내리고 뿌우에게 연락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하늘 저편에서 붉은 점이 하나 나타나더니 점점 커지는 게 보였다.
크오오오오
“어엇, 레드 드레이크!”
드래곤의 아류종이라는 드레이크는 가장 흉악한 마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걸 타고 마탑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곧바로 마탑 안으로 들어가 마당 쪽에 내려앉았다. 마법사들이 호들갑을 떠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방어마법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은 아닌가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지지직하고 노이즈가 끼었다.
뿌우로군. 나는 다시 텔레파식 링크를 시전했다.
[뭔데?]
[마탑주가 왔당. 화를 낸당.]
[왜?]
[스펠 플래그에 대한 일을 왜 다른 마탑에 알렸냐고 한당.]
[잉, 무슨 소리야?]
[체프코트 가문에서 사람이 왔다고 한당.]
[아항, 아까 드레이크 탄 사람이 바로 체프코트 가문 사람이었군.]
8서클 마법사라면 드레이크 한 마리 정도는 길들일 수도 있지. 그자가 바로 사람을 파견해서 진상을 조사하려 하는 모양이군.
아차!
나는 급히 뿌우에게 말했다.
[얼른 거기서 나와.]
[갑자기 왜 그러냥?]
[체프코트 가문에 불의 정령이 있다면서? 그 정령이 같이 왔다면 네가 있는 거 들킬 수 있잖아.]
정령은 정령을 알아보거든. 집에 숨어 있어도 소용이 없다고.
[아, 맞당. 지금 나간당.]
[밖으로 나오려 하지 말고 마탑 구석에 잘 숨어 있어. 일단 스승님하고 붙어있지만 않으면 되니까.]
[알았당.]
뿌우는 내 말대로 스승님의 지팡이에서 나와 마탑의 옥상까지 올라갔다. 투명화가 될 수 있는 대기의 정령이라서 경계막 내부에서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스승님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잖아.
“뭐, 크게 상관은 없나? 일단 체프코트 가문이 개입한 이상 빈츠 경도 이 사건을 묻을 수는 없을테니까.”
잘 됐다. 이로써 스승님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이제는 기다리면 된다.
나는 몰던에게 말했다.
“우리가 묶었던 여관으로 돌아가죠.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에요.”
“그러냐? 그것 참 다행이구나.”
“아, 몰던. 내가 스승님 대화를 도청한 건 비밀이에요.”
“알았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 염려 말거라. 하하하.”
고마워요. 몰던이 이 사실을 말하면 스승님은 내가 어떤 방법으로 마탑 내부에 들어간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지 알아내려 하실 거라 곤란하거든요.
나는 몰던과 함께 여관으로 돌아가 스승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우리는 곧 락티움 콘돌스핀 마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