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5화
이것들은 전생에 내가 쓰던 물건들 중 일부다.
그 중 하나는 황금으로 장식된 붉은 색의 엘레멘탈 정령석인데 이건 전생의 내가 9서클이 되기 전까지 쓰던 스태프의 코어가 되는 부분이다.
몇 가지 방어마법을 자동으로 걸어주고, 마나를 모을 때 도움이 되는 효과가 있지. 가장 중요한 건 들고만 있어도 대부분의 독을 정화시켜 준다.
나는 이걸 내 스태프 끝에 박았다. 창날이 튀어 나오는 반대쪽인데, 일단 정령석을 받은 스태프는 완전히 마법사 용 지팡이처럼 보였다.
철컹
창날을 뽑아서 무게중심을 가늠해 보니 생각했던 데로 상당히 좋았다. 창날만 있을 때에는 한쪽이 너무 무거워 힘이 들더란 말이지. 근육질의 전사라면 크게 상관 안 하겠지만 난 마법사잖아.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좋군. 컨실!”
스스스스
엘레멘탈 정령석이 모습을 바꾸며 대나무의 일부분처럼 변했다. 이 정도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 할 거다.
“뿌우, 그거 인챈트 할 거냥?”
뿌우가 기대에 찬 눈으로 엘레멘탈 정령석을 보며 물었다. 이걸 마법 인챈트로 완전히 스태프와 결합시키면 이거야말로 고급 아티팩트 수준의 물건이 될 것이다.
“나중에, 지금은 고급 인챈트를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우왕, 좋당. 뿌우, 기다린당.”
좋겠지. 눈앞에서 초호화 궁전이 하나 지어지는 기분일 테니.
난 뿌우에게 씨익 웃어보이고는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여니 회색의 고운 가루가 가득 담겨있다.
꿈틀
가루가 공기에 닿자 미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오랜만에 잠에서 깨어나니 흥분을 했군.
나는 입고 있던 로브를 벗어 탁자 위에 잘 펴고 그 한가운데 가루를 부었다.
스스스스스스
가루는 마치 염색약처럼 로브를 회색으로 물들이며 로브 속으로 스며들었다.
강식장갑 파라뇰. 이건 살아있는 금속이다.
일반 천에 이놈을 씌우면 마법의 풀 플레이트 아머보다 더한 강도로 바뀐다. 그러면서도 부드러움은 여전하니 마법사가 입고 다닐 수 있는 옷 중에 가장 뛰어난 방어력을 지닌 물건이라 할 수 있다.
아, 내가 죽기 전에 입고 있던 결계로브는 빼고 말이다. 그건 옷 속에 아공간 결계를 쳐주는 물건으로 어떤 공격도 안쪽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내가 대마법사가 되고 가장 처음으로 만든 게 그 결계로븐데, 그거 믿다가 암살까지 당했으니 이제는 어떤 방어도 완벽하다고 안심하지 않을 거다.
“어쨌든 이놈을 입고 다니면 꽤 든든하긴 하거든.”
난 완전히 회색으로 변해버린 로브를 집어 들어 입었다. 곧 로브에서 회색이 빠지며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 몸에서 미세하게 흐르는 마나에 반응해서 나를 주인으로 인식한 증거다.
다음은 반지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싸구려로 보이는 은반지. 남자용이기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감쌀 정도의 넓이인데, 별다른 문양도 없고 마법적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왼손 중지에 반지를 끼자 안으로부터 작은 바늘 같은 것이 튀어나와 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으윽.”
나는 따거움에 신음성을 흘렸다. 반지가 피를 빨아먹는 게 느껴졌다.
많이 먹어라. 그리고 나중에 10배로 돌려줘.
재생의 정수라는 이름의 이 은반지는 평소 매일 조금씩 소유자의 피를 빨아먹는다. 그러다가 소유자가 상처를 입으면 트롤 수준의 재생능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한마디로 난 이제부터 목과 왼팔이 잘리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소리지. 그런데 강식장갑 로브는 주문 하나로 머리까지 보호가 되니까 이로써 사실 상 내 몸 하나는 확실하게 지킬 수 있다는 거야.
방어력으로 따지면 마도사와 싸워도 충분히 버틸 수준이라는 뜻이지.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벨트다. 약간 굵은 은색의 실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만든 벨트. 그런데 이 은색 실의 정체는 바로 스톰 자이언트의 수염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 벨트야 말로 스톰 자이언트 거들이라는 최고급 아티팩트라는 말씀. 후후훗.
효능이 뭐냐고? 간단해. 힘이 세지는 거야. 뼈와 근육도 단단해지고 말이야.
마법으로 거는 스트랭스와는 차원이 다른, 자이언트의 힘을 소유자에게 주는 거지. 그것도 상급 자이언트인 스톰 자이언트의 힘이야.
철컥
허리에 벨트를 차니 전신에 묘한 느낌이 들면서 근육이 잠시 동안 부르르 떨렸다. 딱히 힘이 세진 듯한 느낌은 없다. 하지만 난 이걸 써 봐서 안다. 난 이미 자이언트와 동급이라는 것을.
나는 시험 삼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살짝 눌러보았다.
빡
탁자가 둘로 쪼개져버렸다.
다시 탁자 다리 중 하나를 쥐고 힘을 주었다.
부지직
팔뚝만한 탁자다리가 부스러졌다.
“좋았어.”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과거의 감각을 되살리려 했다.
힘 조절, 이 벨트의 가장 큰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용자가 알아서 힘 조절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 과거 여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한 달 정도 걸렸는데, 그 사이 내가 부순 주변의 집기들을 모으면 따로 집 한 채는 지을 수 있었을 거다.
그래도 한번 얻었던 감각이라 서서히 느낌이 되살아났다. 자이언트의 힘을 지닌 채 보통 인간처럼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지만 적응하면 다 된다.
한쪽에 있던 양초를 집어 들고 손가락 자국이 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술만 안 마시면 어디 가서 사고치지는 않겠군.
“우왕, 너 이제 보니 훌륭한 마법사였구낭.”
뿌우가 감탄해서 눈을 세 배쯤 크게 뜨며 말했다. 얘는 흥분하면 정말 눈이 커지네. 눈동자도 아니고.
“아직 3서클이라 약하거든. 아이템 빨이라도 받아야지. 안 그래?”
“니가 짱이당.”
“아직은 아니야. 몇 년 지나면 그렇게 되겠지만.”
현재 최강이 8서클이라고 했지? 모르긴 몰라도 그 자 역시 지금 내 수준의 장비는 있을 거다. 장비가 없어도 8서클이면 지금의 난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고.
그래도 이 정도면 이번에 올 놈들 정도는 확실하게 잡을 수 있겠지.
싸울 준비는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작은 손거울이다. 이것의 이름은 진실의 이면. 거울로 어떤 물건을 비추면 거울 표면에 마법의 분석 효과가 떠오른다. 동시에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은 물건의 진면목이다.
그러니까 분석과 진실의 시야의 효과를 같이 발휘하는 거울이지.
나는 품속에서 작은 시약병을 하나 꺼냈다. 파우스 스승님을 치료할 때 살짝 뽑아놓은 스승님의 피다.
“스펠 플래그에 대한 분석은 끝냈었지. 진짜라면 피에 흔적이 나타날 터. 한 번 보자고.”
나는 진실의 이면으로 피를 담은 시약병을 비추었다. 그러자 황금색 글씨가 손거울의 표면에 떠올랐다.
“어디 보자. 확실히 스펠 플래그의 균이네. 그런데 이건 뭐야. 왜 분류가 독으로 나오는 거지?”
스펠 플래그는 병이고, 피에 병균이 섞이게 된다. 그런데 원래는 병균이라는 분류로 떠야 하는데, 이건 독이라고 뜬다.
이름은 같은 스펠 플래그의 균인데!
“이게 뭐지? 어떻게 균이 독으로 바뀔 수 있지?”
이건 나도 모르는 이야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감기균이 감기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독을 써서 사람의 체질을 약화시켜 감기에 걸리는 게 하는 것은 말이 되는데, 감기 자체가 독이라는 게 무슨 의미일까?
“아 놔, 생각보다 일이 심각해지겠군.”
이게 정말 독이라면, 이 독을 지닌 자는 세상의 마법사를 모두 다 독살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마도사 이하의 수준이라면 절대로 피해갈 수가 없는 독이다.
만약 이게 대량생산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일개 마탑의 탑주가 쓸 수준의 물건은 아니다. 난 이일에 대해 확실하게 대비하고 파헤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삼일이 지났다.
파우스 스승님은 아직까지 의식이 없지만 숨소리가 편안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곧 깨어날 것 같다.
그 사이 난 스펠 플래그의 균 이라는 독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분석을 해 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었다. 마법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는 사건이다.
“결국 이 독의 정체를 제대로 알려면 9서클 완전분석 마법을 써야 한다는 소린데…….”
완전분석을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잖아.
아니지. 8서클 마법사라면 마법진을 이용해 완전분석 마법을 쓸 수 있으니 이걸 그 아론 체프코트라는 마법사에게 보여주면 분석을 해 줄지도.
“그게 좋겠군.”
나는 파우스 스승님의 피를 아론 체프코트에게 보내기로 했다. 내가 직접 분석하고 싶지만 그러려면 10년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이걸 분석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아주 시급한 문제이니 어쩔 수 없다.
독 자체에 대한 문제는 현존하는 최강 마법사에게 맡기고, 난 나에게 독을 쓴 흉수만 잡아 족치는 거다.
결정을 내린 나는 시약병에 담긴 피를 둘로 나누어 하나를 상자에 넣고 포장했다. 파우스 스승님이 깨어나면 이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도시로 가서 용병단에 의뢰를 할 생각이었다.
띠링, 띠링
맑은 종소리가 허공중에 울려 퍼진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왔군.”
3일 동안 마을 외곽 요소요소에 쳐 놓은 알람 마법 중 하나이다. 원거리 알람은 막대한 마나가 필요한데, 이걸 수십 개씩 치고 3일간 유지하는 건 마나가 남아도는 드래곤이나 하는 짓이지. 아니면 드래곤 부럽지 않은 나나 말이야.
“가자, 뿌우.”
“싸우러 가는 거냥? 뿌우는 싸움을 좋아한당.”
“투명 상태로 있다가 도망가는 놈만 제압해.”
“알았당.”
나는 스태프를 들고 밖으로 나가 렉스에게 손짓을 했다. 조용히 따라오라는 신호다.
알람이 울린 곳은 숲 쪽이다. 길이 아닌 숲으로부터 오는 것을 보면 보통 놈들은 아니다. 그쪽에는 마물도 가끔 나온다.
“렉스야. 냄새 좀 맡아 봐. 이상한 놈들 있니?”
킁킁
렉스는 몇 번 킁킁대더니 코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얘가 몸이 커지면서 코도 더 예민해졌단 말이야. 그 때문에 근처에 늑대가 나오면 바로 달려 나가서 잡아오거든.
“사일런스.”
나는 소리를 지우는 마법으로 우리의 기척을 없앴다. 바람이 역풍인 만큼 들킬 염려는 없을 거다.
“아울 사이트.”
밤에도 볼 수 있는 마법까지 거니 사방이 훤히 보였다.
조금 가니 드디어 사람들 몇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여섯 명, 그 중 하나는 로브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법사다.
나는 수신호로 뿌우와 렉스를 그들의 반대편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공격준비를 한 채 조심스럽게 따라가니 곧 그들 중 하나가 몸을 낮추며 외쳤다.
“멈춰. 야수의 냄새다.”
오호, 렉스의 체향을 맡다니. 전문가군.
나는 그들이 렉스쪽을 보는 순간 사일런스 마법을 해제하고 공격마법을 시전했다.
“핫 레이!”
슈우웅
붉은 광선이 세 갈래로 갈라져 날아갔다.
“이런! 뒤쪽이다.”
“마법!”
늦었거든. 공격 마법 중 제일 빠른 레이 계열로 기습당하면 피할 수 없다고.
파파팍
둘은 쓰러졌다. 그러나 마법사로 보이는 자는 방어마법을 써놨는지 핫 레이가 튕겼다.
방어마법의 수준으로 보면 5서클, 진짜 스승님을 상대할 수 있는 마법사를 보냈군.
나는 망설이지 않고 뒤로 돌아 뛰었다. 뒤쪽에서 마법사가 주문을 시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디스펠.”
스스스
몸에 걸려 있는 방어 주문이 해제되는 게 느껴졌다. 공격마법이 아닌 해제마법을 쓰는 걸 보면 일행 중에 믿을만한 전사나 암살자가 있다는 소리네.
난 누군가가 무서울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접근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 속도는 암살자군.
내가 전투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싸움에 아예 쑥맥은 아니거든. 특히 이론에는 빠삭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