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4화
-스승님이 나에게 진명을 알려 주셨다. 아직 돌아가시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나에게 마나를 넘긴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다. 왜 본이 아닌 나를 후계자로 지명하셨을까? 4서클에 먼저 도달한 것은 본이다. 스승님은 나에게 하루라도 빨리 마도사가 되라고 재촉하신다.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마도사가 되어야 새로운 마탑주로 임명해 줄 수 있다고.-
-안타깝게 내 재능이 스승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제 겨우 5서클을 뚫었을 뿐인데 스승님께서 돌아가셨다. 그래도 스승님의 막대한 마나 덕분에 조금은 수월했다. 본이 나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내가 그를 추월했는데도 전혀 질투를 하지 않았다. 좋은 친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에게 질투를 느낀다. 헬렌, 내 귀여운 여동생을 차지한 놈이니까.-
-이제 곧 6서클이 된다. 스승님의 유언으로 10년간 정식 마탑주를 뽑지 않고 중앙탑에서 임시탑주가 와 있었는데, 내가 마도사가 되면 이곳의 마탑주가 될 것이다.-
-헬렌이, 스펠 플래그에 걸렸다. 그녀가 죽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남의 처가 된 지 몇 년이나 된 아이인데…….-
숨겨진 페이지의 내용은 주로 헬렌에 대한 감정표출 부분이었다. 스승님께서는 이 부분을 부끄러워서 숨겼던 모양이다.
뭐,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스승님이 마탑주가 되기 직전에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셨고, 그 뒤 우애곡절 끝에 스승님께 전대 마탑주의 진명까지 얻은 헬렌 경이 마탑주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 헬렌 경이 죽고 지금은 처남인 본이 마탑주이다.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하군. 곧 알게 해 주지. 나와 스승님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를.”
나는 복수를 기약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마탑으로 달려가 나의 분노를 보여주고 싶지만, 지금은 스승님을 살리는 데 집중하자.
그리고 본을 단순히 때려죽인다고 이 분노가 사라질 거 같지는 않거든. 단순한 죽음 이상의 파멸을 생각해 봐야겠군.
나는 스승님의 일기장을 되돌려 놓고 헬렌 경의 마법진 도면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갔다.
이 정도를 보완해서 완성시키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걸 너무 세련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최대한 조금 고쳐야 한다.
“이건 그냥 놔두면 스승님이 불구가 되실 지도 모르겠군. 고치자.”
“이건, 마법진 발동 확률이 낮아지겠네. 놔두고 몇 개 더 그리지 뭐.”
안 되면 될 때까지. 난 미완성 마법진 세 개를 그렸다. 다 조금씩 다르게 그렸는데, 누가 봐도 어설픈 부분이 섞여 있어서 발동하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도 치명적인 부분은 고쳤고, 세 번 시도하면 한 번 정도는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식으로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준비가 끝난 난 밖으로 나와 몰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해가 질 무렵 몰던이 모든 약초를 구해왔고, 난 급히 그것과 이미 가지고 있던 약재를 섞어서 마나홀 파괴의 약을 만들었다.
“됐다.”
약제술은 전생에 별로 배우지를 않아서 좀 자신은 없지만 일단 원하는 대로 배합이 된 것 같다. 독성이 심하긴 해도 당장 죽지만 않으면 나중에 치료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난 파우스 스승님을 깨웠다. 스승님은 힘없이 눈을 뜨고 내가 억지로 먹이는 약을 받아 삼켰다.
“크윽! 쓰구나.”
예, 써요. 사정없이 쓸 거에요. 그래도 정신이 번쩍 나죠?
“스승님, 마법진을 그렸으니 가셔서 발동해 주세요.”
“으음, 정말 그렸느냐?”
파우스 스승님은 아직도 못 믿겠다는 듯이 나를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한 번 해보자.”
나는 파우스 스승님을 부축해서 연구실로 들어갔다. 스승님은 바닥에 그려진 세 개의 마법진을 놀란 눈으로 보았고, 난 변명하듯 말했다.
“될지 안 될지 몰라서, 일단 세 개만 그려봤어요.”
“훌륭하구나. 그럼 우선 이것부터 시도해보자.”
완성된 마법진을 보니 잘 하면 발동할 거 같긴 하죠? 그래도 확실히 안목이 있으시네요.
파우스 스승님은 그 중 가장 안정적인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다른 두 개는 안 될 가능성이 아주 높고, 이게 진짜다. 그런데 파우스 스승님이 한 번 보고 이쪽을 고른 걸 보면 마법진을 파악하는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듯하다.
“그럼 시작하마.”
파우스 스승님은 고통을 참으며 커넥트를 하고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우우우웅, 파지지직
역시 불협화음이 심하구나. 스승님이 좀 고생을 하시겠는데.
마법진이 불완전해도 시전자가 뛰어나면 어떻게든 몸으로 때울 수 있다. 파우스 스승님은 스펠 플래그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마법진을 무사히 발동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 지금 사용하는 마법진은 유지하는 부분을 고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불협화음이 일어나며 스파크 같은 것이 튀었다.
더군다나 마나홀이 녹아들면서 급속도로 마법력이 줄어드는 상황이다. 스승님의 팔과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인내와 집중력만큼은 이미 마도사의 경지에 오르셨군요. 스승님.
난 내심 감탄하며 거의 마나고갈 상태에 빠졌으면서도 버티고 서 있는 파우스 스승님을 보았다. 때로는 고통이 성장에 필요요소가 되기도 한다.
난 언제든지 도울 준비를 했지만 실제로 돕지는 않았다.
이윽고 마법진이 완전히 활성화 되었다. 유지부분마저 개선된 것이다. 오렌지색의 빛이 마법진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파우스 스승님의 몸을 휘어감았다.
“크으으, 성공이다.”
스펠 플래그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과 마나홀이 녹는 고통이 밀려오는 게 겹쳐지니 저런 기묘한 표정을 짓게 되는군요. 난 절대로 저 상황에 안 빠지고 싶다.
파우스 스승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법진 안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이미 발동이 된 마법진의 힘은 저절로 스승님의 몸에 파고들어가 마나홀을 완전히 녹였다.
그리고 텅 빈 자리에 새로운 마나홀의 기초가 될 만한 마나가 모였다. 난 그걸 깨닫고는 얼른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스승님의 등에 손을 대고 마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필요할 때 의식을 잃어 줘야 해. 파우스 스승님이 끝까지 버텼으면 내가 이런 짓도 못 하잖아.
깨어나도 내가 뭔 짓을 했는지 모르실테니 맘 잡고 손을 쓰자.
내친 김에 난 막대한 마나를 동원해 파우스 스승님의 몸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몸 안에 쌓여 있던 독소가 빠져나가고 피부의 주름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아까 먹인 약제 중 독성이 있는 게 많았는데 이참에 모두 정화해 버렸다.
그야말로 파우스 스승님은 마법사로써 다시 태어나고 있는 셈이다. 깨어나면 왜 이리 몸이 개운한지 모르시겠지. 그냥 다시 태어난 기분일 거고.
우우우웅
마법진의 파워가 떨어져간다. 할 일을 끝내고 소멸하는 것이다. 일회용 마법진이 다 그렇지 뭐. 곧 마법진의 코어가 되는 부분들이 사라지며 완전히 발동이 멈췄다. 잔재가 남아있기는 해도 분석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두 개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파우스 스승님이 마법진을 연구하실 때 도움이 되긴 하겠지.
난 파우스 스승님을 침대로 옮기고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몰던이 전전긍긍하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니?”
“다행히 성공했어요. 아마 사실 거에요.”
“잘 되었구나.”
“그런데 마나홀이 완전히 사라져서 마법을 처음부터 다시 수련해야 되요.”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난 파우스 선생님을 믿는다.”
그렇죠. 이 정도로 무너지실 분은 아니에요. 나도 몰던의 말에 동의하며 다시 몇 가지 약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파우스 스승님의 원기회복 용 약제의 재료이다. 기왕이면 나도 좀 나눠먹어야지. 확실히 스펠 플래그의 치료를 받은 이후 몸에 기운이 좀 없긴 하다.
몰던은 내 부탁을 받고 다시 나갔다.
“자, 그럼 이제 싸울 준비를 해 볼까.”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상대는 우리에게 인위적으로 스펠플래그에 걸리게 했다. 그렇다면 곧 따로 사람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
죽기 전에 잡아가던가. 죽은 걸 확인하던가 말이야.
어떤 놈들이 올지 모르지만 그놈들을 잡아 족치면 확실하게 적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스승님이 마법을 못 쓴다고 생각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적어도 스승님 수준의 마법사를 상대할 자가 올 가능성이 있어.”
난 지금 3서클이다. 뿌우가 있어도 그냥은 힘들 수도 있다.
난 내 방으로 돌아와 스태프에 있는 뿌우를 불러냈다.
“좀 나와 봐라.”
“뭐냥?”
대나무 스태프 끝으로부터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뿌우의 머리는 역시나 기괴하다. 나는 뿌우가 완전히 나올 때까지 기다려 말했다.
“필요한 마법 아이템이 있는데 포트라의 창고에서 좀 가져와라.”
“미쳤냥? 거기서 금화 한 닢이라도 빼돌리면 난 즉소멸이당.”
“빼돌리라는 게 아니라, 원래 내가 필요한 건 가져다 쓸 수 있게 되어 있어. 계약이 그러니 그냥 가져 오면 돼.”
“사장님이 어떤 분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하겠냥? 난 남의 허풍에 내 목숨을 걸고 싶지 않당.”
아, 이놈이 확인도 안 하고 대놓고 거절하네. 하긴, 확인하러 갔다가 아니면 죽도록 맞겠지. 포트라 성격이 그러니까.
난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포트라에게 편지를 쓰지. 그거나 전해 줘.”
“우웅, 그거도 겁나긴 하는뎅, 알겠당.”
자식, 그래도 이 정도는 거절 안 하는구나. 이거도 잘못하면 얻어맞을 텐데 말이야.
나는 포트라에게 창고의 물건 좀 쓸 수 있게 뿌우에게 말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굳이 밀봉도 안 하고 내용을 뿌우에게 가르쳐 주었다.
뿌우는 편지를 든 채 비장한 각오로 사라졌다.
잠시 후, 뿌우는 손에 몇 가지 물건을 들고 돌아왔다.
“놀랐당. 사장님이 진짜 물건 가져가라 하시더랑.”
“날 믿어. 난 허튼 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사장님이 옛날 계약은 로엔하고 한 거라 너 하고는 관계없으니 로엔이 맡긴 것만 꺼낼 수 있다고 했다. 억울하면 자격을 갖춘 후 다시 계약하라고 하더라.”
으윽, 이 물욕에 미친 변태 정령이! 그동안 얻은 재물을 다 혼자 먹겠다고?
나는 순간적으로 포트라에 대한 쌍욕을 입 밖으로 내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직원 앞에서 사장 험담을 하는 건 좋지 않아.
생각해보니 어차피 내가 대마법사가 되면 포트라와 다시 계약을 하게 될 거고, 그때에는 혼자 먹으려던 재물을 다 토해내라 할 수 있거든.
왜냐고? 난 포트라의 진명을 알고, 포트라는 내 현재 진명을 모르니까. 전생의 계약을 지속시키는 조건이 아니면 상당한 불공정 계약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래도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네. 으, 참자.
“그리고 사장님이 넌 평소엔 안 그런 척 하다가 가끔 중요한 순간에 사기를 치니까 조심하라고 하셨당.”
아 놔, 포트라 이놈!
애한테 무슨 교육을 시키는 거야.
쩝. 솔직히 내가 꾸민 일이 좀 약삭빠른 부분이 있기에 포트라가 심술부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에효, 그냥 넘어가자. 포트라랑은 안 싸우는 게 좋겠다.
말문이 막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뿌우에게 물건을 넘겨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