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3화
6장 병과 독
링스턴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했다. 파우스 스승님은 여행용 마차와 말 두 필을 준비했기에 난 마차에 타다가 가끔씩 말을 타는 연습도 하며 이동을 할 수 있었다.
렉스는 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동물을 타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으르렁 댔지만 따로 준비한 송아지 뒷다리 육포를 입에 물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링스턴까지 하루 이틀 정도 남았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순간, 내 몸에서 열이 나고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감기몸살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몸 안의 마나가 엉키고 있었다.
“스승님, 저 마나가 엉키는 듯해요.”
“뭐라고?”
스승님은 놀라서 나의 몸을 진찰했다. 그리고는 곧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역시 스승님의 진찰결과가 내 생각과 같구나.
스펠 플래그, 내가 그 병에 걸린 것이다.
“아으으윽.”
신음소리가 악 다문 이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거 실제로 경험해보니 고통이 장난 아니네.
전신의 혈관이 꼬이는 듯하다. 마나가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은 아니지만 느낌은 비슷했다.
스펠 플래그는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병이다. 그리고 마도사 수준이 되면 마나의 흐름이 꼬여도 즉시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에 거의 걸리지도 않는다.
그런데 스승님의 여동생인 헬렌은 한 번 걸리고 두 번째에는 마도사일 때 재발했다. 그리고 나도 걸렸다.
이건 뭐가 이상하지 않은가?
“염려 마라. 내가 치료할 수 있을 거다.”
스승님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이미 마나의 성장이 멈춘 몸,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오히려 남은 마나를 제대로 쓸 기회가 생겼구나.”
마나의 성장이 멈췄다는 것은 더 이상 마나를 모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스승님은 기존에 마나뱅크에 모아두었던 마나를 다 쓰면 아예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 된다. 그래서 마나를 쓰지 않아도 되는 연금술의 연구를 했던 것이고.
그런데 내가 스펠 플래그에 걸리니 남은 마나를 쏟아 부어 치료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요 스승님, 저 이거 스스로 치료할 수 있거든요. 이거 마도사 경지에 들어서면 어떻게든 치료할 수가 있어요. 헬렌 경은 몰라서 당한 거고요.
아 놔, 어떻게 설명하지? 쩝.
“스승님, 전…….”
“괜찮다. 마법을 거의 안 쓰고 산지 20년 가까이 됐으니 이제 와서 미련은 없다.”
마법을 안 쓰는 것과 못 쓰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그래도 파우스 스승님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치료의 준비를 시작했다.
당황한 난 일어나서 파우스 스승님을 말리려 했다.
스펠 플래그가 걸렸다고 당장 죽는 병도 아니고, 일단 링스턴으로 돌아가자고요. 아프긴 더럽게 아프지만 이삼일은 참을 게요. 길에서 이러는 건 좀 아니잖아요.
입속에 많은 말들이 맴돌았다.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딱 떠오르지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머리가 핑 하고 돌면서 심한 현기증에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파우스 스승님은 얼른 내 몸을 잡아 마차 안에 누이며 말했다.
“마음을 가라앉혀라. 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마나가 흘러들어가 꼬인 마나의 흐름을 단숨에 바로잡을 테니 놀라면 안 된다.”
“스승님.”
“차라리 1서클일 때 걸렸으니 다행이 아니겠느냐, 이 병은 마법사의 수준이 높을수록 고치기가 힘들다.”
아, 잠깐, 스승님, 저 1서클 아니거든요.
늦었다.
스승님은 커넥트를 한 후 바로 내 척추 부분에 두 손을 대고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5서클 마법사의 강력한 마나가 폭풍처럼 내 몸을 휘저으니 엄청난 고통이 전신에 밀려 들어왔다.
미친다. 이게 뭔 고생이냐. 마나로 몸을 씻는 건 며칠 전에 했다고!
“으으으.”
난 이를 악물고 참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고 참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
곧 스승님의 안색이 변했다. 1서클 마법사라면 벌써 끝났어야 되는데 내 몸은 여전히 스승님의 마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채셨겠지?
그래도 5서클 마법사가 3서클 마법사를 치료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다. 난 스승님한테 어떻게 변명할까 궁리를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스승님의 마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으윽!”
스승님?
파우스 스승님의 몸이 옆으로 기울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겨우 치료가 끝난 시점이다. 나 역시 힘이 하나도 없어 몸을 가누지 못했기에 스승님과 함께 쓰러진 상황이다.
고개를 돌려서 스승님을 보니, 입에서 피를 흘리고 계셨다.
“스승님!”
“어째 이상하다 했더니, 나도 걸렸었구나. 쿨럭.”
스펠 플래그! 스승님의 얼굴이 고열로 인해 붉게 변해 있었다.
“병에 걸린 걸 모르고 마나를 급격하게 쏟아 부으려 했으니 탈이 날 수밖에. 쿨럭.”
“스승님, 정신 차리세요.”
“괜찮다. 그나마 네 치료는 끝난 것 같구나. 그런데 너.”
“예, 제가 스승님을 속였어요. 저 3서클이에요.”
“허허허, 믿을 수가 없다. 3서클 이라니. 마법을 가르친 지 3년 만에 3서클이라니.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저도 그럴 거 같아서 말씀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괜찮다. 이건 기뻐할 일이 아니겠느냐. 쿨럭.”
평소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성취 속도에 놀라셨겠지만, 지금은 당신의 생명이 위독하니 오히려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변명은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겠군.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가슴속에 뜨거운 분노가 차오른다. 전생에 칼 맞고 죽은 느낌이 되살아났다.
감히 나와 스승님을 암살하려 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철저한 파멸을 경험하게 해 주지.
나는 일단 아무것도 모른 척 하고 파우스 스승님께 말했다.
“스승님, 다시 마탑으로 가요. 본 님에게 치료를 부탁해요.”
“소용없다. 헬렌도 구하지 않았던 본이 나를 구하겠느냐?”
“......”
“그리고 이상하다. 내가 아는 스펠 플래그는 전염되는 병이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헬렌과 나, 그리고 네가 다 이 병에 걸렸을까?”
다행이다. 이쯤 되니 파우스 스승님도 의심을 하기 시작한 거다.
이게 자연현상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병을 퍼뜨리는 방법을 알아내서 우리에게 사용했다는 거고, 그게 누군지 모르는 이상 마탑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치료를 받기는커녕 확실하게 죽게 될 거다.
그런데 누굴까? 헬렌, 스승님, 나. 모두를 죽이려는 자는.
“렌아,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다.”
내 눈에 떠오른 분노를 읽은 스승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짓을 인위적으로 벌일 수 있는 자는 보통 사람이 아닐 터, 내가 죽고 너 혼자 남게 되면 증거인멸을 위해 또 다른 수작을 벌일 거다.”
“그렇겠죠.”
“그러니 우리는 마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냥 너와 난 죽은 것으로 하자. 몰던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넌 떠나라.”
“알겠어요. 그런데 스승님, 누가 그랬는지 짐작 가는 사람이 있나요?”
“모르겠다. 난 평생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았어. 나와 내 여동생을 죽이고, 제자인 너까지 손을 뻗칠 정도로 나쁜 자는 만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제가 찾아내죠. 꼭 찾아낼 겁니다.”
“복수를 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하지만 서두르지는 마라. 난 복수보단 네가 무사하기를 원한다.”
“충분히 힘을 얻기까지 참겠습니다. 그게 10년이든 20년이든.”
“그래, 넌 세상이 놀랄만한 재능을 지녔으니 틀림없이 크게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스승님은 정신을 잃었다. 고열로 인해 전신이 펄펄 끓어올라 의식이 있어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부탁해, 렉스.”
컹컹
렉스는 대답을 하고 우리 대신 말들을 이끌고 링스턴으로 향했다. 얘가 미리아랑 한 번 놀더니 머리가 더 좋아진 거 같다.
몰던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맞이했고, 나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법사만 걸리는 병이란 말이지. 으드득, 내 가족들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죽여 버리겠다.”
몰던이 분노하는 건 처음이다. 몰던이 이렇게 지독한 살기를 뿜어낼 수 있구나. 웬만한 기사보다 기세가 강하다.
“몰던, 일단 스승님을 구해야 해요.”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니?”
“있어요. 다른 경우라면 힘들겠지만, 스승님은 가능해요.”
“그럼 서둘러라. 내가 할 일이 뭐냐?”
“약초가 몇 개 필요해요. 가능한 한 빨리 구해주세요.”
나는 몇 개의 약초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다 이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고 몇 가지는 독성이 심하다. 원래대로라면 파우스 스승님이 가문에 주문했던 희귀 재료를 써야하겠지만,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이 독초라도 써야지.
“그래, 당장 나가서 찾아오마.”
몰던은 내가 적어준 약초를 구하기 위해 나갔다.
나는 일단 파우스 스승님을 깨웠다.
“으으으,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스승님, 이 병이 그리 빨리 죽는 병이 아니고요. 적어도 한 달 이상 걸려요.
의외로 파우스 스승님도 엄살이 좀 심하시다. 이미 죽을 거라고 확신하고 계셔서 그런가? 이크, 정신이 포기를 하면 육체는 스스로를 죽이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힘없는 스승님의 눈을 보며 말했다.
“스승님, 이 참에 스승님의 마나홀을 완전히 녹여버리죠. 헬렌 경의 마법진을 이용해서 말이에요.”
“으으, 그게 가능하겠느냐?”
“안 되도 해야죠. 마나홀을 완전히 녹이면 아마 스펠 플래그가 나을 거에요.”
“그럴 지도 모르겠구나.”
스펠 플래그는 마법사만 걸리는 병이다. 마나홀이 사라지면 파우스 스승님은 일시적이지만 마법사가 아니게 되니 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지.
“몰던이 약을 구해올 거에요. 독이 있긴 해도 일단 그걸 먹어서 마나홀을 완전히 깬 후에 마법진을 가동시키면 가능성이 있어요.”
“한 번 해 보자. 쿨럭.”
“아, 일어나지 마세요. 제가 마법진을 그릴게요.”
“네가....마법진을....”
파우스 스승님은 고통과 싸우면서도 고민을 했다. 헬렌 경이 남긴 마법진은 미완성품이다. 그런데 그걸 어린 내가 그려서 발동시키겠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나 하는 느낌이 들겠지.
교본에 있는 완성된 마법진을 그대로 그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니까.
그래도 스승님, 희대의 천재 제자를 믿어보세요.
혹시 알아요? 미완성 마법진을 아주 우연히 잘 보완해서 제대로 발동시킬지.
솔직히 스승님이 그리면 발동 안 되잖아요.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 데 이것저것 따질 게 아니다. 일단 파우스 스승님을 살리고, 그 다음에 난 천재라 운도 하늘을 찌른다고 우기는 거다.
난 반 강제적으로 스승님의 품속에 있는 헬렌 경의 마법진을 꺼냈다. 그런데 그 마법진은 한 권의 책자 뒤쪽에 끼어 있었고, 내용을 살짝 보니 파우스 스승님의 일기장이었다.
이크, 남의 일기장을 보면 안 되지.
나는 얼른 일기장을 다시 스승님의 품속에 넣으려 했는데, 스승님의 눈이 감겨 있었다. 또 의식을 잃으신 거다.
“보면 안 되는데, 좀 볼게요.”
나는 생각을 바꿔서 일기장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일기장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와 같은 거라서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까운 내용이 담겨있다.
파우스 스승님은 남에게 원한을 산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본인 생각이시고, 남의 입장이 되면 다를 수 있잖아.
생각보다 별 내용은 없었다. 스승님의 일기장을 맘대로 읽은 죄책감이 옅어질 정도로 한가한 생활과 약초에 대한 내용들뿐이다.
하지만 마법사의 일기장이라는 게 그냥 보이는 내용만 있는 게 아니다.
“커넥트, 디스펠.”
파싯
마법으로 숨겨져 있던 일기장의 일부분이 나타났다.
“역시.”
누구나 마음속에 남에게 말 못하는 이야기가 있는 법이지. 그런데 그걸 또 말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거든.
나는 숨겨진 페이지의 내용을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