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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의 마나뱅크-12화 (12/250)

로엔의 마나뱅크 12화

“너, 보통 인간이 아니네.”

나는 마음속으로 바짝 경계하며 말했다.

“응, 나 마녀야.”

“그냥 마녀 수준이 아닌데? 예지 능력은 그렇다 쳐도 꿈속에 들어오는 건 뭐지?”

“그건 나도 몰라. 그냥 어릴 때부터 난 여기서 놀았거든.”

어릴 때부터라, 타고난 능력이라는 소리군. 단언컨대 미리아는 내가 지금까지 본 인간 중에 가장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다. 정말로 인간이라면.

“마탑에서도 이걸 아니?”

“아니, 마탑은 오늘 나왔어.”

“뭐라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정식 마법사 될 때까지는 못 나올 텐데.”

“나 원래 거기 학생 아니야. 너 보려고 잠시 들어갔던 거야.”

“나를 보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얼마 전 내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에 대해 점을 쳤는데, 마탑에서 만날 수 있다고 했거든. 그런데 널 보니까 느낌이 왔어. 너야말로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쩝.”

이놈의 예지능력은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다. 점을 쳐서 그렇게 나왔다는데 어쩌겠어.

무엇보다 미리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의 한계를 넘은 선천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말문이 막힌 내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서 있자, 미리아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선의의 미소, 그러니까 나에게 호감을 받고 싶어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막상 미소를 지었을 때 떠오르는 얼굴은...

“웃지 마. 나 그 얼굴 보기 싫으니까.”

“싫은 거야?”

미리아는 상당히 당황한 듯 했다. 이상형의 얼굴이 떠오르는 데 싫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나보지?

나도 설명하기 힘들다. 왜 하필이면 그 얼굴이 이상형인거야.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맞긴 맞는 거 같은데,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는 거지.

“그거 일종의 고급 현혹마법이지?”

“그럴걸. 그래도 너한테는 힘을 억제하고 있는 거거든.”

하긴, 이상형의 얼굴이 겹쳐서 떠오르는 게 아니라 아예 미리아가 내 이상형으로 나타나야 진짜 현혹마법이라 할 수 있지.

흠, 그럼 얘가 현혹의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거고, 그게 아예 안 나타날 수는 없는 걸 보니 제어가 완벽하지는 않다는 뜻이고.

꿈의 침투, 현혹, 딱 생각하는 게 있다.

“너 혹시 서큐버스와 계약했니?”

서큐버스는 몽마라는 이명을 지닌 마족으로 꿈에 침투해서 정기를 빨아먹는 능력이 있다. 미리아의 능력은 틀림없이 서큐버스의 그것. 아무래도 연관이 있지 않겠어?

미리아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나를 낳기 위해 마족과 계약을 했어. 그때 서큐버스를 제물로 썼다고 들었어.”

서큐버스를 제물로 썼다라...이건 또 뭔 소리야?

단순한 마족과의 계약이 아니다. 마족을 제물로 썼다면 계약의 대상은 상당한 고위마족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런 계약의 결과물치고는 미리아의 눈빛이 그다지 악해 보이지 않네.

살짝 겁먹은 눈으로 날 보는 표정은 내가 마족과 연관 있어서 싫어? 라고 묻는 거 같다.

좋을 수는 없지. 마녀가 마족하고 계약해서 낳은 애라면 당장 붙잡아서 화형시키거나 마탑의 마법사라면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쓸걸?

도대체 얘 엄마는 뭐하는 마녀길래 이런 미친 짓을 한 걸까.

“엄마는? 엄마는 지금 뭐하셔?”

“엄마, 죽었어. 그래서 지금 난 혼자 살아.”

“끄응.”

계약한 당사자가 죽었다면 진실을 알기 어려울지도. 내가 한숨을 내쉬자 미리아는 갑자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질문은 그만하고 우리 같이 놀지 않을래? 렉스도 데려오고 말이야.”

“렉스를 데려올 수 있어?”

“그럼, 주인인 네가 허락만 하면.”

“그럼 데려와 봐.”

“응, 기다려.”

미리아는 내가 순순히 승낙하자 기쁜 듯이 어딘가로 달려갔고 곧 진짜로 렉스와 같이 돌아왔다.

컹컹컹

렉스는 꿈에서 날 본 게 기쁜지 크게 짖으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신기하냐? 나도 신기하다. 설마 내가 개하고 꿈을 공유하게 되다니 말이야.

그럼 이게 사람 꿈이야. 개꿈이야.

내가 헷갈려 하고 있을 때 미리아는 렉스의 목을 어루만지며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나한테 말했다.

“얘가 말하기를 너는 얘를 탈 수 있다며? 어떻게 타는 지 보여줘.”

“렉스하고 대화할 수 있니?”

“그럼! 꿈의 언어는 국적과 종족을 초월하거든.”

아, 그러셔요? 그러니까 개도 꿈에서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거군요.

물론 난 렉스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그러나 미리아는 진짜 사람과 대화를 하듯 렉스와 대화를 주고받는 눈치다.

어쨌든 난 미리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렉스의 등에 올라탔다. 미리아는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정말 보통의 꼬마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내친김에 미리아도 같이 태우고 렉스에게 걸으라 말했다.

렉스가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자 균형이 막 흔들렸지만 이미 익숙한 나는 미리아의 허리를 잡아 떨어지지 않게 도왔다.

“여기에 발을 걸고 힘줘서 뻗어, 그러면 떨어지지 않을 거야.”

“꺄아! 무서워.”

난 네가 무섭거든? 마족의 힘을 지닌 마녀 아이라니.

그래도 같이 노니 재밌네. 내 평생 여자애랑 놀아 본 기억이 있던가? 있을 리가 없지. 있었으면 여제자한테 그런 식으로 당했겠어?

한참을 미리아와 같이 렉스를 타고 놀았다. 이게 상당히 힘이 드는 놀이라 미리아는 결국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고, 렉스도 옆에 앉아 혀로 털을 골랐다.

흠, 렉스는 미리아가 마음에 드는가보네. 얘가 이렇게 경계를 풀 정도면 진짜로 나쁜 애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설마 개가 현혹마법에 당한 건 아닐테고.

살짝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눈치를 보니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미리아는 정말 순수한 성격이고, 마족의 영향을 받아 사악해진 구석은 전혀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지.

그렇다면 이제 슬슬 이 기묘한 인연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결정해야겠지?

솔직히 미리아가 마족과의 계약에 엮여있다면 얘의 미래가 그다지 밝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 만큼 내가 마족과 엮이기 싫다면 이대로 인연을 끊는 게 옳다. 더 이상 꿈에 침투를 못 하게 조치를 취하고 다시는 미리아와 만나지 않는 거다.

하지만 만약 미리아의 미래에 관여를 한다면? 이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어떻게 할까?

쩝, 미리아의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사람이 나라는 예지결과가 나왔다고 했지? 아무래도 그게 맞는가보다.

꿈속에서라도 같이 놀았으니 가서 계약 내용을 살펴보고 파기를 하든 따로 해결을 해야겠지. 말하자면 첫 친구이기도 하니까.

마족과 계약 파기를 어떻게 하냐고? 간단해. 마족을 소환해서 합의파기와 소멸 중 하나를 고르라 하면 돼.

마음에 결정을 한 나는 조심스럽게 미리아에게 물었다.

“너 어디 사니? 내가 현실에서 찾아가도 돼?”

“아! 그건 안 돼.”

미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엄마가 죽기 전에 우리 집 근처에 강한 결계를 쳐 놨어. 나 아니면 아무도 못 들어와.”

훗, 결계라 하셨습니까? 지금 내 앞에서 결계를 말하는 겁니까?

나는 사정없이 웃어주려다가 괜히 미리아가 엄마를 무시한다고 삐질까봐 말을 돌렸다.

“그럼 그 근처까지라도 가면 안 돼?”

“우웅, 우리 집은 하이델 숲 한 가운데에 있기는 한데...올 수 있어?”

“하이델 숲? 그건 여기서 너무 멀잖아. 너 설마 거기서 우리 마탑까지 온 거였어?”

먼 수준이 아니다. 내가 지도를 정확히 안 봤지만 대충 옆옆옆 왕국에 있는 거대한 숲일걸. 국경을 세 번 넘어야 갈 수 있다는 거지.

“보름달이 뜨면 숲의 나무가 서로 연결 되거든. 근데 그 길은 나밖에 못 지나가.”

“아, 달의 길! 그게 실제로 있었구나.”

달의 길은 고대 엘프만이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전설로만 알려진 건데 미리아는 어떻게 된 게 마녀이면서 달의 길도 이용한다는 거지?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미리아를 보자 미리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울 엄마는 하프엘프야. 그래서 원래 아이를 못 낳는데 마족하고 계약해서 날 낳았데.”

“아하! 하프엘프.”

대략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하프엘프는 인간과 엘프의 혼혈로 뛰어난 재능과 미모를 지니지만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 그런데 미리아의 엄마라는 사람은 아이를 가지고 싶었나보다. 마족과 계약까지 하면서 말이지.

“하이델 숲은 국경 밖이라 내가 성인이 된 후에나 갈 수 있겠다. 나중에 찾아갈게.”

가서 어떻게 된 내용인지 직접 조사를 해 주지.

미리아는 내가 일부러 찾아간다는 말에 상당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기다릴게. 사실 엄마는 내가 클 때까지 결계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거든. 이번에 못 참고 나갔는데, 네가 언젠가 온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있을 거 같아.”

결계 밖으로 나가지 말랬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결계는 마족으로부터 미리아를 지키기 위한 거일 가능성이 크네.

나는 약간 안심을 하며 말했다.

“그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갈게. 그리고.”

“응, 뭔데?”

“미안한데 이제는 내 꿈에 들어오지 말아줘. 이거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거든.”

“아, 정말? 미안해. 난 몰랐어.”

“마족의 능력은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나. 네가 의도하지 않아도 꿈에 자주 침투하면 정신이 황폐해진다고.”

“그런 건가. 알았어.”

쓸쓸한 표정이다. 얘가 정말로 맨날 놀러올 생각이었나 보네.

이봐. 매일 이렇게 꿈을 공유하면 렉스는 일주일도 못 가서 백치가 되고, 나도 한 달 안에 신경과민으로 노이로제에 걸릴걸?

그래도 그런 표정을 지으면 괜히 미안해지잖아. 쩝.

“정 놀러오고 싶으면 한 달에 한 번 정도가 한계야. 그 이상은 내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가.”

“한 달에 한번은 괜찮아?”

“그래. 렉스는 안 되고, 난 돼.”

“응, 그럼 매달 보름달이 뜰 때 올게.”

“알았어. 그럼 이제 뭐하고 놀까?”

“우웅, 렌, 너 마법사지? 나한테 마법을 가르쳐 줄래?”

마법? 오호, 너 마법을 배우고 싶은 거니.

“마법은 가르쳐 줄 수 있어. 그런데 내가 아는 마법은 마녀의 마법과는 다른 룬마법인데 괜찮아?”

사실 마녀의 주술마법도 알긴 알지, 오크 샤먼이 쓰는 피의 마법도 아는데, 하지만 그걸 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룬 마법이 좋아. 엄마가 마녀의 마법은 마족과 연관이 깊어서 안 쓰는 게 좋댔어.”

“알았어. 그럼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마법을 가르쳐 줄게. 넌 이제부터 내 제자야. 알았지?”

“와아앙! 알았어요. 스승님.”

미리아는 기뻐서 폴짝폴짝 뛰며 나에게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얘가 지금 마법 배우는 걸 소꿉장난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후훗, 이게 얼마나 빡센 수련인데, 피눈물을 쏘옥 뽑게 해주마. 여제자야.

마법은 신성한 거라서 대충 가르치고 대충 배우는 그런 건 없거든. 고생할 각오를 하는 게 좋아. 타협은 없다.

난 진짜로 미리아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딱히 여제자와의 불륜적인 사랑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얘가 이쁘긴 한데, 내가 지금 열 살 겨우 넘은 애에게 눈독을 들일 생각은 없다고. 못 믿겠다고?

진짜야. 내 취향은 20대 중후반의 늘씬한 글래머 여전사라고. 소년 마법사와 섹시한 여전사와의 사랑이 지금 내 목표 중 하나거든. 믿어.

그럼 10년 뒤에도 관심이 없을 거냐고? 큼, 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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