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0화
계약을 맺은 다음 계약자가 정령을 위해 해 줘야 하는 의무조항은 바로 살 집을 정해 주는 거다.
그런데 이게 각 정령마다 좋아하는 게 달라서 잘 정해줘야 한다. 싫어하는 데 들어가 살라고 하면 애가 삐지고, 그러면 기껏 정령을 써도 그다지 효율이 안 좋다.
정령이라는 게 의외로 삐지기를 잘 한단 말이야.
나는 몰던이 준 스태프 스피어를 꺼내들고 말했다.
“이거 어때? 대나무로 만들어서 바람 속성하고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우웅, 안에가 비어있지 않아서 좀 그렇긴 한데, 나쁘진 않당.”
“그럼 여기서 살아라. 이거 내가 마법용 지팡이로 쓸 건데, 네가 들어가 있으면 아무래도 서로 좋을 거 같으니까.”
“좋당. 마나를 두 배로 준다는 뎅 지팡이가 아니라 빗자루라도 들어가 살아준당.”
빗자루는 좋아하는 거잖아.
이상하게 대기의 정령들은 빗자루를 선호한다. 그래서 정령의 가호를 받은 마녀들이 우연히 대기의 정령과 계약을 하게 되면 대부분 빗자루에 정령을 살게 하고, 그럼으로써 마녀들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 외에는 대나무 재질의 물건을 좋아하고, 부채나 옷도 좋아하는 쪽이다. 보석을 집으로 정해주려면 에메랄드가 좋다.
어쨌든 뿌우는 내 스태프에 들어갔다. 일단 그곳을 살 집으로 정하자 대나무 자체가 약간 푸른빛을 띄우게 되었다.
나는 시험 삼아 스태프의 금속 고리를 돌려 창날이 튀어 나오게 했다.
철컹
창날에도 역시 푸른 바람의 기운이 서려 있다.
슈슉, 파지직
중단 찌르기를 해 보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거의 샤프니스 마법으로 강화한 수준이다. 거기가 은근히 스파크도 튀는 게 전격의 기운마저 담았다.
아무래도 뿌우의 특성이 전격 쪽인가 보군. 포트라는 아공간을 자유롭게 다루는 대신 전격은 거의 못 썼지.
“좋은데?”
“좋징. 정령이 깃들었는데 나쁜 무기도 있냥?”
뿌우가 창에서 머리만 내밀고 말했다. 이놈아, 지금 모습은 상당히 괴기스럽거든. 사람 머리가 달린 창이라니 말이야.
“그런데 이 창 좋당. 생각보다 정성들여 만든 거라 마음에 든당.”
그렇지? 이정도 창이면 마법무구 이외에는 거의 최고라 할 수 있거든. 내가 나중에 인챈트 마법으로 강화도 할 거란 말이야. 그때 되면 너에게는 거의 호화주택 수준일걸.
“들어가 있어 봐. 마법도 좀 써보게.”
“알았당. 마나 좀 팍팍 넣어봐랑.”
나는 창날을 집어넣고 스태프를 두 손으로 잡았다.
“스트랭스!”
부우웅
근력을 강화하는 주문이 시전 되면 나의 근육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단순히 근육의 양만 느는 게 아니라 근밀도가 최적화되면서 힘이 거의 세배쯤 강해지는 느낌이다.
“집중하기 편하네. 이거 웬만한 마법사의 지팡이보다 좋군.”
마음에 들었다. 역시 정령이 좋긴 좋아. 급할 때는 보디가드가 되고, 대놓고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마법강화나 무기 강화가 되니 말이야.
그런데 마나가 주욱 빨리네. 마나 두 배 계약을 괜히 했나? 유지마나도 두 배지만 뿌우를 매개체로 마법을 쓰면 마나가 두 배 빨린다. 그 대신 효과도 상당히 강해지니 손해 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점을 노리고 선심 쓰듯 마나 두 배의 계약을 한 거니까. 두 배의 효과라면 거의 한 서클 위급이라 볼 수 있거든. 그러니까 난 정령을 이용해 3서클 공격마법으로 4서클의 파괴력을 낼 수 있는 거지. 특히 뿌우의 능력이 전격 쪽이라면 라이트닝 같은 걸 쓰면 장난 아니겠는데?
아무래도 나는 뇌전의 마도사로 유명해질 것 같다. 나쁘지 않아. 화염과 뇌전이 공격마법 중에서 효율이 제일 좋잖아.
아, 안 되겠다. 일단 빨리 전생의 마나부터 옮겨야지.
이대로라면 난 미이라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 3서클 마법사가 정령을 소환한 채로 유지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거든.
“커넥트. 살레안 그로스미어.”
우우웅
검은 공간이 내 손을 통해 정신과 연결된다. 내 코드가 아니기에 두통이 몰려왔지만 나는 집중을 유지하며 다시 중얼거렸다.
“마나 전이, 바리오스 페이모.”
그오오오오오오
“어억!”
거대한 마나의 흐름에서 무서울 정도의 압력이 발생했다. 로엔의 마나가 내 의식을 통해 현생의 마나뱅크로 들어가는데, 정신이 송두리째 같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급한 김에 입술을 깨물어 흘러나오는 피를 삼켰다. 그리고 손가락에 피를 묻혀 지팡이에 급히 안정의 주문을 썼다.
“크으.”
피의 주문식까지 사용하니 겨우 버틸 만 해졌다. 생각지 못했던 현상이다. 거대한 마나의 흐름에는 정신적인 압력이 발생하는구나.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이게 단순한 두통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고통인 만큼 자칫 잘못하면 트라우마처럼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된다.
아, 이거 언제 끝나지.
내 전생이 얼마나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는지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장난 아니네. 잘못하면 평생 편두통에 시달리겠는데.
도중에 링크를 끊고 쉬고 싶은데, 압력이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없다. 지금 이걸 강제로 멈추면 내 머리가 충격으로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팍, 푸싯
코피가 터졌다. 혈관이 반응을 하는구나. 이거 눈도 충혈 되는 게 잘못하면 눈 혈관도 터지겠는데.
사태가 심각하다.
고통 속에서도 나는 냉정하게 나의 몸 상태를 관조했다. 이대로 놔두면 얼마 안 가서 내 몸이 못 버틴다는 결론이 나왔다.
“뿌우. 내 몸 좀 치료해줘.”
나는 이를 악문 상태에서 가까스로 뿌우에게 요청을 했다. 뿌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팡이에서 나와 내 몸속으로 들어갔다.
“뿌우, 물의 정령 아니라 치유에 특기 없당. 그래도 열심히 한당.”
그래, 너 대기 정령인거 알아. 근데 지금 모기 뒷다리만큼의 도움이라도 필요한 상황이거든. 그러니까 아무거나 좀 해봐.
푸악
코피가 더 심하게 흘렀다. 거의 폭포수처럼 코피가 쏟아져 나온다.
이놈이! 치료를 안 하고 뭐하는 거야!
“머리 혈관 터지는 거보다 그냥 코로 피를 뿜는 게 낫당.”
뿌우가 내 배에서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그런 짓 하지 말랬지. 괴기스럽다고.
으으, 두통이 너무 세서 히스테리가 생기네. 그래도 뿌우가 나름 대처를 잘 하고 있다. 이 녀석 말대로 이정도 압력이면 뇌혈관이 터질 수 있다. 죽지 않을 정도로 피를 뽑아서 압력을 낮추는 게 현명할지 모르지.
피가 쏟아진 김에 난 무릎을 꿇고 손가락으로 피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리는 마법진은 재생, 4서클 마법으로 지금 상태에서 고위 마법을 쓰는 것은 모험에 가깝지만 출혈과다로 죽을 수는 없잖아.
“발동!”
파사사사사
다행히도 마법진이 발동하며 피가 붉은 안개가 되어 나를 감쌌다. 원래 오크 샤먼들이 주로 쓰는 피의 마법은 기존의 서클 마법과는 조금 달라서 시전자의 마나대신 피를 제물로 쓴다. 평소에는 알아도 잘 안 쓰는데, 이럴 때 도움이 되네.
여전히 상당한 피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피는 한번 완성된 마법진의 경로를 따라 흐르며 기화되어 다시 내 몸에 흡수되었다.
재생에는 당연히 피의 재생산도 포함되고, 마법의 힘으로 나는 흘린 피와 거의 비등할 정도로 새 피를 얻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전혀 쓸데없이 보이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생명을 구해주는 고마운 마법이다.
압력이 확 줄었다.
두통도 좀 가라앉는 듯하다.
묶은 피가 전부 쏟아져 나가고, 새로운 피가 몸속을 채우자 머리가 맑아졌다. 몸속의 불순물이 같이 빠져나간 느낌이다.
“으으, 기왕이면.”
사람이 고생을 하면 얻는 게 있어야지. 재생까지 쓴 마당에 조금 더 힘을 내자.
나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다시 주문을 외웠다.
“정화!”
내 마나뱅크에 커넥트를 안 하고 몸속의 마나로 주문을 쓰니 힘이 좌악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잘 됐지 뭐. 상대적으로 압력이 조금 더 줄어드네.
어차피 지금 자세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무릎을 꿇고 있어서 기절만 안 하면 쓰러질 일은 없거든.
내 몸속에 있는 독소가 주문의 효과에 의해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허하다. 안이 텅 빈 느낌.
나는 그 빈 공간에 로엔의 마나가 흘러들어가도록 경로를 조절했다. 이건 내가 마나뱅크를 창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험이다. 마나전이 주문의 이치를 완벽하게 알고 있거든.
로엔의 마나는 내 몸을 한 바퀴 돌고 현생 코드로 들어간다. 내 몸이 마나전이의 경로에 포함된 것이다.
피를 바꾸고, 몸의 독소를 뽑는다. 그리고 그 깨끗한 몸을 막대한 마나가 흩고 지나간다.
내 세포 하나하나가 마나를 느끼게 된다.
마나친밀도가 계속 올라가고, 몸이 저절로 마나의 흐름에 최적화가 되어간다.
드드득
“어억, 뼈구조까지 변하면 곤란한데.”
혹시 사람이 아닌 이상한 존재가 되는 거 아냐? 머리 위로 큰 뿔 같은 혹이 생긴다던가 하면 곤란한데.
나는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내 육체는 내 의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저 내부적으로 뼈의 구조를 완벽하게 조정했을 뿐이다.
뼈가 움직이고 근육이 재조정되니 근육통이 사정없이 밀려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무통감 마법을 써서 고통을 끊었다.
고통은 몸의 상태이상을 나타내는 신호의 일종이라 웬만하면 그냥 아픈 게 좋지만, 두통과 근육통이 같이 있으면 정말 죽을 거 같거든.
무통감 주문이 완성되자 두통도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는 약간의 이질감 같은 부담감만 느껴질 뿐이다. 이러다가 잘못되면 머리가 터지는 수가 있겠지? 그냥 아픈 게 나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머리쪽만 무통감 주문을 풀었다. 역시 머리는 함부로 막으면 안 된다. 팔다리 잘못되는 거는 나중에 어떻게든 복구가 되겠지만 머리는 잘못되면 안 되잖아.
“으으으.”
다시 두통이 밀려오자 저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참을 만 했다.
그 사이 뿌우가 내 몸속에서 나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미친 마나라닝! 너 도대체 뭐 한 거냥?”
“시끄러, 너한테 줄 마나 확보하고 있는 거잖아.”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다시 입을 악 물었다. 머리 아픈데 말 걸지 말란 말이야.
로엔의 마나는 거의 해가 뜰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겨우 마나전이가 끝나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큰 대자로 누우며 뿌우에게 말했다.
“뿌우야.”
“뭐냥?”
“핏자국 좀 흔적 없이 지워줘.”
“뿌우는 물정령이 아니라니깡. 그래도 시킨 거니 열심히 한당.”
뿌우는 투덜대면서 테이블보를 접어서 걸레를 만든 후 꽃병에 담긴 물에 적셔 핏자국을 닦기 시작했다.
짜식, 능력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기도 하네.
나는 뿌우가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