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엔의 마나뱅크-9화 (9/250)

로엔의 마나뱅크 9화

4장 소정령 뿌우

자, 여기서 아공간 주머니의 이론에 대해 말을 해 보자.

이게 성능이 간단하다고 만들기도 쉬울까?

아공간 생성이란 건 바로 9서클의 궁극마법의 영역이다. 그런데 역사상 9서클에 든 마법사는 로엔 프로시얀, 즉 전생의 나밖에 없다.

감이 오지?

세상에 존재하는 아공간 주머니는 모두 다 내가 만든 거다.

물론 내가 그걸 혼자서 다 만든 것은 아니다. 아공간 주머니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대기의 대정령 포트라, 바로 나의 사업파트너다.

대정령은 반쯤 신적인 존재로 그들마다 궁극마법에 필적하는 특기가 있는데, 포트라는 바로 아공간 생성과 공간이동에 특화된 능력의 소유자였다.

내가 9서클에 도달한 기념으로 대규모 마법진까지 동원해 포트라를 소환했을 때, 그는 그 능력으로 재물을 모으고 싶어 했다.

대정령의 욕심이 인간 이상이라는 것을 난 그때 알았다.

그러니까 포트라가 나에게 제안한 사업 내용이 바로 아공간 대여업이었다.

아공간 주머니를 세상에 뿌려서 사람들이 그 안에 보물을 저장할 수 있게 서비스를 한다. 그런데 아공간 주머니 자체는 그다지 튼튼한 물건이 아니다.

어떤 사고로 아공간 주머니가 파괴된다면 안에 있는 물건들은 어떻게 될까?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생각한다. 아공간 어딘가로 물건이 사라져서 영원히 못 찾게 된다고.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주머니가 파괴되면 안에 있는 물건들은 포트라의 집 창고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즉, 포트라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아공간 주머니에 물건을 넣어둔 사람이 죽거나 건망증으로 무슨 물건이 들어있는지를 모르게 되어도 마찬가지다. 30년간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은 물건은 모두 포트라의 소유가 된다.

난 사업파트너로써 포트라의 물건을 확인하고 공유할 권한이 있다. 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아공간 주머니를 팔아서 막대한 재물을 챙기기도 했는데, 그건 또 다 따로 챙겨 놨다.

그런데 이런 아티팩트들을 대정령씩이나 되는 포트라가 마구 만들어서 세상에 뿌리는 것은 정령계의 자체규약에 저촉되는 행위이기에 포트라는 이에 대응하는 규칙을 만들어야 했다.

아공간 주머니에는 보통 사람이 볼 수 없게 마법으로 숨겨진 글씨들이 있다. 이것은 물질계의 것이 아니라 정령어인데, 내용은 바로 아공간 대여업 거래규약에 대해서이다. 말하자면 아공간 주머니를 쓰는 사람은 포트라와 간이 계약을 맺는 셈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정령어를 읽을 수 있는 존재는 물질계에서는 드래곤이나 고대엘프 정도뿐이고, 그것도 9서클인 내가 은폐마법으로 감추어 놓았기에 이 글이 읽힐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하지만 난 읽을 수 있잖아. 그 안에 내용도 다 알고 있고 말이야.

아공간 주머니의 규약 중에 소비자 불만 콜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게 포트라를 소환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공간 주머니가 파괴되어도 포트라를 소비자 불만 콜로 포트라를 불러서 돌려달라고 하면 돌려주게 되어 있다. 규약을 읽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

그런데 일단 불러내기만 하면 난 포트라의 진명을 알고 있으니까 내 능력과 관계없이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거지. 유지하는 데 막대한 마나가 들긴 하는데, 그걸 감당할 마나는 있잖아.

후훗, 난 이제 3서클이지만 대정령의 계약자가 되는 거지. 9서클도 재수가 좋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대정령의 계약자가.

*

난 행복한 상상에 잠겨 브로스마이어 가문에서 3일을 지냈다. 그 사이 파우스 스승님은 헬렌 경의 유품을 확인했고, 젠트는 스승님이 요구한 마법재료와 내가 원한 아공간 주머니를 구하러 다녔다.

3일 째 되는 날, 젠트는 최하급의 아공간 주머니를 하나 구해왔다.

“재료 중 몇 가지는 지금 구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구하는 대로 나중에 링스턴으로 보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 렌아. 네가 원하던 아공간 주머니다.”

파우스 스승님은 포장지로 곱게 싼 상자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환한 웃음을 지으며 포장지를 뜯고 안에 든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거야! 틀림없이 진품이네. 이게 최하급이라고 해도 도시의 저택 열채 정도의 가격은 나갈 텐데 말이야. 스승님, 부자 스승님, 감사합니다.

“하하, 녀석, 그렇게 좋으냐?”

“아공간 주머니는 정말 신기해요. 다른 아티팩트들은 대충 이론이라도 알겠는데, 이건 어떻게 만들었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흠, 듣고 보니 정말 그렇구나.”

그렇죠? 이거 대정령씩이나 되는 포트라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힘을 남발해서 만든 거라니까요.

“제가 언젠가는 꼭 이 주머니의 이치를 연구해서 새로운 아공간 주머니를 만들어 낼 거에요.”

“오호,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너의 이름을 온 대륙이 알게 될 거다.”

“헤헷, 그러면 좋겠네요.”

나는 적당히 스승님의 기분을 맞춰드리다가 아공간 주머니를 들고 내 방으로 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격하게 뛴다.

아아, 이게 바로 선물을 받은 아이의 심장박동인 거지. 누가 뭐래도 난 지금이 좋다. 노년기의 기억이 있는 나에게 있어서 성장기의 젊은 육체가 주는 느낌은 그야말로 마약이나 다름없다. 너무 기운이 넘쳐서 제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 또한 축복 아니겠는가.

나는 문을 잠그고 경계 마법까지 펼친 후 조심스럽게 아공간 주머니를 뒤집었다. 이렇게 뒤집어도 안에 든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직 파란색과 녹색의 비단 같은 속감이 드러날 뿐이다.

“컨실 해제. 살레안 그로스미어.”

살레안 그로스미어는 전생의 진명이다. 이 컨실 마법은 로엔이 친 것이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같은 9서클 마법사가 아닌 한 해제하기 힘들다. 그러나 진명을 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9서클 마법사의 결계를 나 같은 3서클 마법사가 뚫을 수 있는 것이다.

파앗

주머니의 속감이 살짝 빛나며 은색으로 된 문양이 나타났다. 룬어와도 다른 정령어이기에 보통 사람은 봐도 그냥 바람 모양의 무늬로 보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계약서로 보인다.

난 천천히 마지막에 있는 소비자 불만 콜 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내용 자체가 소환 주문으로 대상이 되는 정령은 무조건 소환에 응해야 한다.

자, 나와라. 나의 전생의 친구 포트라.

“소환!”

우우우웅

아공간 주머니가 떨리면서 하얀 색의 공간이 열렸다. 난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거대한 지니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아차, 여긴 실낸데, 포트라가 나오다가 머리로 천정을 부수는 거 아냐?

역시 나중에 숲에서 소환했어야 했나? 대기의 대정령씩이나 되는 놈을 집 안에서 소환하는 건 좀 아니잖아.

실수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 드디어 구멍 안에서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둥근 대기의 정령이 튀어나왔다. 그놈은 두 팔을 하늘로 뻗어 올리고 멋지게 하늘로 치솟아 오르다 천정에 쿵 하고 부딪치고는 바닥에 철푸덕 하고 떨어졌다.

“잉, 뭐야?”

포트라는 어디가고 이런 어린 애가 튀어나오는 거지? 내가 실망감에 눈살을 찌푸리는 데 나타난 놈은 뭐가 그리 기쁜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실눈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뿌우님이시당, 무슨 문제가 있는 거냥?”

“넌 뭐냐?”

“뭐긴, 아공간 주머니 불만 센터 담장 지니징. 바쁜 몸이니 용건만 간단히 말해랑.”

“포트라는?”

“오옹, 너 어떻게 사장님 성함을 아냥?”

아, 이놈들이 그새 조직적 경영을 도입한 건가. 그러니까 포트라는 사장 직함 달고 놀면서 소정령들을 부하직원으로 혹사시키고 있다는 거군.

“됐고, 포트라 좀 오라 그럴래?”

“불만 신고에 사장님이 직접 나오실 거라 생각하는 거냥?”

기가 막히네. 이거 어떻게 하지?

포트라가 직접 나와야 진명을 대고 새로 계약을 하던가 하지.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르고 말이야.

내가 말을 안 하고 대책을 생각하는 동안 뿌우라는 소정령은 별로 재촉을 하지 않고 방안을 이러 저리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이게 인간이 보는 책이라는 거냥. 와, 이게 침대라는 거구낭. 인간은 이런 데서 자야 잠이 잘 온다면성?”

나는 잠시 뿌우를 지켜보다 물었다.

“너, 지금 처음으로 소환 된 거지?”

“당연하당. 우리 아공간 주머니는 완벽을 자랑하기 때문에 여태까지 불만 콜은 단 한 건도 없었당.”

완벽 같은 소리 하네. 일부러 잘 찢어지게 만든 거 알거든. 칼로 힘줘서 내려찍으면 바로 파괴되는 아티팩트는 세상을 다 뒤져도 이거밖에 없을걸.

아무래도 이놈은 포트라로부터 세뇌를 당했나보다. 하긴, 소정령에게 있어 대정령은 절대적 지배자인 만큼 뭐라고 해도 믿겠지. 안 믿으면 바로 소멸되니까.

“주머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나 포트라의 계약자인 로엔의 후계자거든. 그러니까 포트라 좀 잠깐 불러봐.”

“아항! 로엔의 후계자라공.”

뿌우는 알았다는 듯 허리춤을 뒤적이더니 한 장의 편지를 꺼내 나한테 내밀었다.

“이건 뭐냐?”

“사장님이 혹시 로엔의 후계자가 나타나면 전해주라는 편지당. 읽어 봐랑.”

얼라? 포트라가 로엔의 후계자가 나타날 것을 예상했다고?

나는 불길한 예감에 얼른 편지의 봉인을 뜯고 펼쳐보았다.

-자칭 로엔의 후계자에게.-

이 위대하신 포트라님의 유일한 인간 친구이자 거룩한 계약의 상대인 로엔 프로시안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후, 본좌는 계약의 정리를 위해 친구의 집과 연구실을 방문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랍게도 환생의 기적이 실현 된 흔적을 보게 되었지.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넌 후계자가 아니라 로엔의 환생체일 것이다.

커커커커, 본좌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계약을 어기지 않고 진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환생 사기는 확실히 본좌도 미처 예상 못한 부분이지만, 이미 상황을 파악한 이상 당하고 있을 본좌가 아니다.

내가 나타나면 넌 분명히 내 진명을 이용해 정당하지 않은 계약을 맺으려 하겠지. 하급 마법사 주제에 감히 위대하고 지고한 대기의 대정령인 본좌와 말이야.

헛생각은 집어치우고, 네놈이 9서클에 도달해 궁극마법을 시전하게 될 때까지 날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허접한 마법사를 만나줄 정도로 본좌는 너그럽지 않다.

내 옛정을 생각해서 소정령 하나는 붙여줄 테니, 그놈이랑 놀아라. 그게 지금 네 수준일 거다. 암, 그놈이라도 없는 거보다는 훨씬 낫겠지.

-옛 친구라고 사기를 치려는 괘씸한 마법사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위대하고 지고한 진 크로마루스 포트라-

“아 놔, 망했네.”

설마 포트라가 환생 마법진을 알아봤다니. 아무도 모르는 나의 비밀이, 비밀이!

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한 방에 강해지려는 나의 계획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확실히 포트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 어디 가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놈은 아니다. 대신 계약 관계는 워낙에 확실하게 이행해서 오히려 인간과 거래하는 것보다는 포트라와의 거래가 깔끔하고 신경 쓸 게 없긴 하다. 사실 이번에도 사기를 치려는 쪽은 나였고 말이야.

“이제 어떻게 하지?”

나는 아직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안을 돌아다니는 뿌우를 보았다. 포트라 말대로 지금 내 수준은 저놈도 과분하긴 하다. 소정령이라도 소환을 하려면 최소한 마도사는 되어야 하니까.

그런데 저놈, 정말 시골뜨기 같은 느낌이란 말이야. 좀 어리버리 해 보이고 말이야.

“이봐, 뿌우.”

“나 불렀냥?”

“이 편지에 보니까, 포트라가 너랑 계약을 맺으라는데, 어떻게 할까?”

“계약? 좋다아아, 가 아니고, 계약 조건이 뭐냥?”

어리버리는 취소다. 이놈도 포트라 계열이구나. 절대 손해 보는 성격이 아니야. 하지만 내가 너하고 밀당 할 수준은 아니지 않겠어?

“포트라가 시켜서 하는 건데, 조건이 어디 있어? 수당은 포트라한테 받아. 나 지금 불만 많다고.”

“이잉, 사장님께 수당 얘기 했다가는 소멸 직전까지 맞는당.”

“그건 네 사정이고, 아니면 포트라 불러오던가.”

“사장님 불러도 안 온당. 그러지 말고 계약금 조금이라도 달랑.”

“으음, 알았어. 그럼 마나를 표준 계약의 두 배로 지불할게. 그럼 됐지?”

“오옹, 좋당. 두 배면 두 배 일한당. 그게 나 뿌우의 소신이당.”

겉보기와는 다르게 성실한 성격인가 보군.

나는 뿌우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아쉬운 대로 뿌우와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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