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8화
*
의식이 끝난 후, 파우스 스승님은 머물다 가라는 본의 제의를 거절하고 브로스마이어 가문에 가겠다고 하셨다.
난 뒤뜰에 있는 렉스를 데리러 갔는데, 막상 가보니 어린 마법사들이 렉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렉스는 웅크리고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아이들을 무시하고 있다가 내가 다가오자 얼른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컹컹
렉스가 두어 번 짖자 아이들은 놀라서 뒤로 화들짝 물러났다. 자식들, 그 정도에 겁먹으면 훌륭한 마법사가 못 된단다.
“렉스야, 가자.”
내가 렉스를 부르고 몸을 돌려 입구로 가려는데, 아이들 중 하나가 나를 불렀다.
“잠깐, 이 괴물 개 네가 기른 거니?”
여자애다.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렀는데, 꽤 귀여운 인상이다. 그런데 눈이 좀 이상하다. 초점이 안 맞는다고 할까?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나보다 수백 미터 뒤쪽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아이는 렉스가 일어난 순간 가장 멀리 도망갔었던 듯 아이들 뒤쪽에서 작은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내가 기른 건 아닌데, 지금 내 친구인 건 맞아.”
나는 보란 듯이 렉스의 목과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렉스는 기분이 좋은 듯 내가 쓰다듬기 좋게 고개를 숙여 코를 들이댐으로써 자신의 소속이 나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걸 본 여자애가 용기를 냈는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정말 대담하게 손을 뻗어 렉스의 코를 쓰다듬으려 했다.
크르르르
잘한다. 우리 렉스. 나 말고 딴 사람이 손을 뻗으면 그렇게 째려봐 주라고.
여자애는 움찔 하면서 뒤로 후다닥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나에게 말했다.
“나도 만지게 해줘.”
“미안, 렉스는 코가 예민해.”
“만지게 해주면 내가 점을 쳐 줄게.”
“너 예지력이 있니?”
예지력은 특이한 능력이다. 마법사의 재능이 일만 명에 한 명 나온다고 보면, 예지력은 그 마법사들 천 명 중에 한명이 있다고 한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여자애를 보았다.
여자애는 내가 관심을 가지자 얼른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난 미리아 드림해그야. 동물을 좋아하는데, 이곳에선 애완동물 기르는 게 금지거든. 그러니 만지게 해줘.”
“하아, 알았어. 렉스야. 미리아가 네 코 좀 만지잔다.”
끄으응
렉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미리아 앞에 코를 내밀었다. 미리아는 렉스가 내 말을 너무 잘 알아듣자 신기하다는 듯 보면서 조심스럽게 코를 만졌다.
“나도 만질래!”
“나도!”
미리아가 성공하자 아이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난 내친김에 서비스 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10살 때 마탑에 들어와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 아이들에게 괴물이긴 해도 개인 렉스는 대단히 관심이 가는 존재인 것 같았다. 고생하는 애들에게 이 정도는 해 줘도 되겠지.
“렉스야. 미안.”
렉스는 내가 허락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 아이들이 달려들어 만진다 털을 뽑는다 난리를 쳤다. 그러나 렉스의 털은 칼로 짤라도 안 잘리는 수준이라 다행히 뽑히지는 않았다.
미리아는 주로 나처럼 렉스의 코와 목을 쓰다듬었는데,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상당히 정성스럽게 애정을 표현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 개를 길렀던 것 같다.
“아, 이제 그만.”
끝나지 않는 서비스 타임은 없다. 난 소리를 치며 렉스의 등을 툭 두드렸고, 렉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아이들은 놀라서 얼른 뒤로 물러났지만 미리아만은 그 자리에 서서 묘한 눈으로 렉스를 보며 말했다.
“나중에 인연이 되면 또 보자. 야수의 왕.”
뭔 야수의 왕. 예지인가?
미리아는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폭풍과 눈보라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애늙은이.”
뭐라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 예언인데.
내가 뭐라고 하려는데 미리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중에 놀러가도 되니?”
네가 나한테?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고?
“인연이 되면.”
약간 노인같은 대답을 했네. 애늙은이라는 소리가 정말 마음에 거슬렸나 보다.
난 그대로 몸을 돌려서 렉스와 함께 마탑의 입구로 갔다.
파우스 스승님은 내가 늦었는데도 별 말씀 없이 같이 브로스마이어 가문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스승님은 거의 혼잣말을 하는 식으로 나에게 말했다.
“헬렌은, 내 이복동생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내가 그녀를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게 될 정도로 말이야.”
헛, 금단의 사랑?
“다행히도 헬렌은 그걸 눈치 채지 못했고, 본과 결혼했어. 그런데 하필이면 스펠 플래그에 걸리고 말았지.”
“......”
“그녀가 마탑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는데, 스펠 플래그가 재발했다니, 하아, 운명이란 게 참 가혹하구나.”
그게 이상하단 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스펠 플래그가 재발 된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거든요. 치료에 희생이 따르는 만큼 일단 치료되면 오히려 마나가 늘어나고 몸도 좋아지는데 말이죠.
세월이 흐르면서 신종 스펠 플래그가 나타난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아는 척을 할 수도 없고.
*
브로스마이어 가문은 시라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인데, 과거 전쟁이 있었을 때 가문 사람들 대부분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원칙에 충실히 따라 전원 전쟁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래서 국왕이 직접 치하할 정도의 명예를 얻었지만 결국 대부분이 전사하고 파우스 스승님의 아버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파우스 스승님이 브로스마이어 가문의 계승자인 셈인데, 파우스 스승님은 은거하면서 여동생인 헬렌 경에게 계승자 권한까지 넘겼고, 몇 년 후 헬렌 경이 가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헬렌 경이 죽었으니, 또 다시 파우스 스승님이 브로스마이어 가문의 유일한 적자로써 가주가 된 셈이다.
문제는 스승님은 성혼을 안 해서 자식이 없다는 것이고, 매제인 본 경에게 말한 대로라면 내가 차기 후계자란 소린데.
우와, 나 알고 보니 대박 난 거잖아!
자자, 상황을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속사정을 빼고 보면 난 천애고아야. 개척마을에서 양치기 양부와 자란 평민이지만 사실 천민에 가까운 신분이지.
그런데 우연히 마법사의 제자가 됐어. 그런데 그 마법사가 알고 보니 가문이 빵빵하고 또 가주가 된 거야.
덕분에 자동으로 후계자가 된 거고.
후후훗, 이거 참. 되는 사람은 되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이라니까.
“저기가 브로스마이어 가문의 본가다. 앞으로는 그냥 네 집이라고 생각해라.”
“네, 스승님.”
당연하죠. 제가 주는 걸 못 받아먹는 성격은 아닙니다.
이미 가주인 파우스 스승님이 돌아오셨다는 전갈이 있었는 듯 입구에 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 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이 파우스 스승님께 정중히 인사를 했다.
“도련님, 어서 오십시오.”
“집사, 아직 살아 있었군.”
파우스 스승님은 약간 감동한 듯 눈시울을 붉히며 노집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노집사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노집사의 이름은 젠트.
젠트는 내가 유일한 제자가 될 거라는 파우스 스승님의 말을 듣고는 무슨 뜻인지 바로 감을 잡은 듯 고개를 숙이며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파우스 스승님께는 칭호를 바꿔서 가주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젠트는 우선 그동안 가문이 벌인 사업의 보고를 했다. 헬렌 경이 돌아가신 후 젠트가 주축이 되어 가문의 운영을 한 모양이다.
브로스마이어 가문은 영지는 없지만 왕국으로부터 연금이 나온다고 한다. 그 연금이라는 게 웬만한 자작령의 수입보다 크고, 가문에서는 그걸 밑자금으로 시라스에서 몇 개의 상회를 운영했다.
파우스 스승님과 헬렌 경이 마법사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가문의 위상은 더욱 커졌고, 두 분이 낭비를 안 하는 성격이어서 재산은 계속 불어났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많군. 모두 집사 덕이네.”
“천만에요. 전 헬렌 경의 지침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이제 파우스 가주님께서 돌아오셨으니 가문의 사업도 직접 관리하시지요.”
젠트의 말에 파우스 스승님은 잠시 임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보고 물었다.
“렌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앞으로 이집에서 살면서 가문의 일을 배울래?”
아항, 스승님. 지금 가문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고민하시는군요. 그리고 나에 대한 배려도요.
마법사는 마법이 되면 다른 일은 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사실 이번에 스승님의 연구가 성과를 거둬서 곧 마나홀 재생성에 들어갈 거 같거든. 그러니까 이미 마나홀을 거의 다 녹였다는 거지.
그런만큼 스승님은 다시 마나를 수련하고 마법을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문의 경영을 맡으라고 하면 하고 싶겠어?
거절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것은 책임감, 그리고 제자인 나에게 귀족의 생활을 하게 하고 싶으신 거지.
“스승님, 전 마법 수련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요.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당분간 마법수련에만 전념하고 싶은데 안 되나요? 그리고 집에는 몰던도 기다리고 있고요.”
으윽,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려다 혀를 깨물 뻔 했네.
파우스 스승님은 대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젠트에게 말했다.
“렌은 지금 중요한 시기지. 완전히 마법사로서 성장할 때까지는 가능한 한 외부와의 접촉을 금해야 하거든. 당분간은 렌과 함께 링스턴에 있을테니 사업은 이대로 집사가 맡아줘. 아니면 탈라스에게 맡기던가.”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필요한 마법시약을 구해서 나한테 보내줘.”
파우스 스승님은 미리 준비한 쪽지를 꺼내 젠트에게 건냈다. 약제술로 마나홀을 완전히 부순 후 재생성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 필요한 시약이다.
젠트는 쪽지를 받아들고 내용을 살핀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장 구하기 어려운 재료가 좀 있군요. 하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구해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렌아.”
“예, 스승님.”
“너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있니?”
“가지고 싶은 거요?”
“모처럼 정식 마법사가 됐으니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을 하나 주마.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라. 아니면 내가 마법사의 지팡이를 하나 구해줄 테니.”
“아, 그러면 혹시 아공간 주머니를 구해 주실 수 있나요?”
난 크게 질렀다. 준다고 할 때 제대로 질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공간 주머니는 물건을 넣어도 무게를 느끼지 않는 마법의 아티팩트인데, 이게 좋은 것은 용량의 한계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정말 비싸고, 내가 원하는 것은 최하급이라도 아공간 주머니라면 상관이 없다.
파우스 스승님은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공간 주머니는 마법을 배우고 쓰는 데에는 별 쓸모가 없다. 오히려 스승님이 말씀하신 마법지팡이 좋은 거라면 확실히 집중을 하고 마법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저는 몰던이 준 스태프가 있잖아요. 마법지팡이 말고 그거 들고 다니려고요.”
“그래, 양부가 준 거니까 소중히 해야겠지. 알았다. 네가 원하니 아공간 주머니를 구해주마.”
파우스 스승님은 내가 원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승낙하셨다. 어린 아이가 원하는 물건이 꼭 효율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신 듯 하다.
하지만 아니거든요. 저에게 아공간 주머니가 있으면 전 진짜 잘 나갈 수 있어요.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