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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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를 타는 게 익숙해져서 기사의 랜스돌격 흉내를 낼 수 있게 되면서, 난 스태프 전투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꼭 페얀의 스태프 전투술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무기술을 하나 꾸준히 연습할 필요가 있어.
지금 난 1서클을 뚫어서 자체 강화 마법인 보호와 근력강화를 걸 수 있거든.
이거 둘 다 걸면 성인이 가죽 갑옷 입은 수준이 된다는 말씀. 공격마법도 좋지만 아직 내 자신의 마나뱅크 코드가 없어서 내 전생의 코드로 커넥트를 해야 하는데, 이게 잡음이 많다고 해야 할까? 집중하기가 어려워.
이정도로 어려울 줄은 몰랐거든. 옛날에 남의 코드로 접속을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어쨌든 현생의 마나뱅크 코드를 뚫어서 전생의 마나를 옮길 때까지는 급한 상황에서 마법을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래서 공격마법 쓰다가 집중을 실패하면 망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강화마법을 쓴 후 몸으로 때우는 것을 생각하게 된 거지.
마검사랄까?
음,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네.
생각끝에 난 몰던에게 말했다.
“몰던, 저한테 무기 쓰는 법 좀 가르쳐 주세요.”
“마법사가 무슨 무기냐?”
“마법사도 운동을 해야 하는데요. 기왕이면 유사시에 몸을 지킬 수 있었으면 해서요.”
“음, 하긴, 넌 창으로 웨어울프를 찔러 죽인 경험이 있지.”
무기술은 기본적으로 살상을 위한 전투술이지 단순한 운동은 아니다. 몰던은 내가 이미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그날부터 창술을 가르쳐 주었다.
몰던이 가르쳐 주는 창술은 그야말로 실전용의 전투술이었는데, 한 번 찔러서 반드시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저 적이 있어야 할 곳에 힘을 실어 찌름으로써 공간을 제압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공간을 제압하면 우선 나의 안전이 확보되고, 그 다음에 적을 치는 것은 마음먹은 대로라는 설명이다.
우와, 이거 제대로 된 창술이잖아.
개인전에도 쓸 만하고, 집단전이나 난전에서도 충분히 제몫을 할 수 있는 고급창술이다. 심지어는 말을 타거나 방패를 들고 한손으로 창을 쓰는 법도 있었다.
“넌 어차피 마법사니까 제대로 수련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일단 배우는 거니 기초부터 착실히 하거라.”
“예.”
저도 대충 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나중에 대마법사가 되서 가디언을 만들게 되면 가디언에게 이 창술을 주입할 거거든요.
요즘 와서 느끼는 건데, 마법사가 무술에 대한 심득이 있으면 이게 꽤 좋다. 보통 골렘같은 가디언을 만들 때 마법사는 대충 힘으로 부수고 몸으로 막는 수준의 동작밖에 주입을 못 하는데 지금의 나라면 조금 더 복잡한 동작의 주입이 가능하다.
창술을 하는 청동골렘! 이거 셀 거 같지 않아? 한 열 대쯤 만들어서 연구실 복도에 일렬로 세워 놓으면 기사단을 하나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겠지.
그래봐야 암살당하면 끝이지만. 에효.
또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갑자기 기분을 확 잡치네.
나는 잡념을 털어버리고 몰던이 만들어 준 목창으로 중단찌르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얍, 얍!”
기합을 지르며 창질을 하니 파우스 스승님이 어느 새 나와서 신기하다는 듯 몰던에게 물었다.
“뭔가 그럴 듯 해 보이는데? 혹시 렌이 무술에도 재능이 있나?”
몰던은 시선을 나에게서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오늘 처음 찌르기를 가르쳤는데 마치 십년쯤 수련한 창사처럼 자세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대단하군.”
훗, 천재라는 거지. 그런데 몰던, 내가 이 찌르기를 60년간 했거든요. 예, 60년이요. 10년이라니! 아무리 운동 삼아서 한 거지만 기왕이면 30년쯤이라고 해주면 안 되나요?
어쨌든 몰던은 무술에도 재능이 있는 나에게 열심히 창술을 가르쳤고, 난 얼마 안가서 과거 폐얀의 스태프 전투술을 응용한 창술을 마음껏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
렉스를 타든 창술을 연습하든 난 마법사다. 다른 것은 그냥 취미생활 내지는 운동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난 누구보다도 빠르게 2서클을 뚫었다. 하지만 아직 그걸 파우스 스승님께 말할 수는 없다. 스승님은 아직 내가 1서클도 뚫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파우스 스승님이 좋은 게, 이분은 날 엄청난 마법사로 만들겠다는 생각이 없다. 마법사라고 해서 마법에 모든 것을 바쳐야 된다고 강요하지도 않고 그냥 재능이 있으니 마법을 가르친다는 느낌이다.
덕분에 난 하고 싶은 딴 짓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거지. 마법 수련은 그냥 내가 정한 적당한 수준으로만 하고 말이야.
그래도 대충 마법에 대한 기초이론 부분은 다 배웠다. 한 번 설명하면 모두 이해하고, 듣기만 하면 모두 외우는 나의 재능에 파우스 스승님은 연신 감탄했고, 당신이 지닌 모든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연금술하고, 약제술도 배우고 싶어요.”
“그래라. 연금술은 물질에 대한 이해력을 돕고, 약제술은 생물에 대한 지식을 넓혀주니 마법을 연구할 때도 도움이 될 거다.”
파우스 스승님의 말씀이 맞다. 마법은 단순히 마나를 느끼고 수련을 하는 게 다가 아니다. 고위 마법의 이론을 이해하고, 이것을 주문으로 정립해서 숙달되게 연습해야 한다.
연금술과 약제술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건 맞지. 그런데 난 이미 다 이해하고 있어서 그 도움은 필요 없고, 그냥 연금술과 약제술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배우려는 거다.
“그런데 스승님은 마나수련을 안 하세요?”
이게 전부터 궁금했다. 마법사는 항상 마나수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파우스 스승님이 명상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혹시 밤에 몰래 하시나?
그러고보니 마법을 쓰는 것도 못 봤다. 그러니까 스승님은 지금 약제술로 사람들 치료하고 연금술로 마물들 사체를 연구하는 것뿐, 실제 마법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
사이비가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이야. 5서클 정도 되시거든. 아깝게 6서클 마도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정도면 어디 가서도 푸대접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수준인데 왜 은거해 계시는지도 좀 이상하네.
내친김에 대놓고 물어보니 파우스 스승님은 씁쓸하게 웃으시며 이유를 말씀해주셨다.
“난 마나홀이 파괴되어 더 이상 마나를 모을 수가 없단다.”
“헉, 정말요?”
“그래, 마나뱅크에 마나를 저장해 둔 게 있으니 아직은 마법을 쓸 수 있지만, 그 마나를 다 쓰면 그때는 정말 마법사라고 할 수도 없게 되는 셈이지. 허허허.”
에고, 잘 못 물어봤네. 설마 마나홀이 파괴되셨을 줄이야.
파우스 스승님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난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안다.
보통 마나홀이 파괴된 마법사의 대부분은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마나홀은 마법사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이니까.
“죄송해요.”
“아니다. 옛날에는 마음이 좀 아팠는데, 이제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파우스 스승님은 사과하는 나를 오히려 위로했다. 그 바람에 난 스승님의 마나홀이 왜 파괴되었는지까지는 묻지 못했다.
마나홀이 파괴되는 경우는 주로 자신이 속한 마탑이나 스승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해서 파문을 당할 때인데, 파우스 스승님은 이게 아닌 것 같다.
만약 파문이었다면 마나뱅크의 마나를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어떻게든 마법을 아예 못 쓰게 만들었겠지.
사고로 파괴되신 걸까? 마나홀이 파괴될 정도의 사고면 보통 충격으로 사람이 죽을 텐데.
뭘까?
궁금해 죽겠는데 물어볼 수는 없으니 참 답답하다.
대신 난 딴 생각을 했다.
한 번 파괴된 마나홀은 고칠 수 없는 걸까?
전생에는 그런 생각을 거의 안 했다. 사실 마나홀이 파괴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어서 굳이 그럴 때를 대비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고칠 수 있을 것도 같다. 막대한 마나가 들겠지만 그거야 뭐 신경 안 써도 되잖아.
5서클? 6서클?
대충 6서클 마법을 응용하면 될 거 같다는 결론이 났다.
‘좋았어. 스승님, 10년만 기다려요.’
역시 전생에 대마법사였던 건 좋은 거다. 지금은 말 못하지만 마나홀이 복구된 스승님이 기뻐하는 모습이 상상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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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과는 다르게 약제술은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난 스승님을 대신해서 마을 사람들이 쓸 약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내가 만든 약은 효과가 뛰어나 마을에 들린 상인 중 한명이 나에게 생각이 있으면 자신이 추천해 줄 테니 도시의 마탑으로 가서 전문 약제사가 되라고 제안했을 정도다.
“렌, 넌 정말 재료의 상태와 양을 민감하게 아는구나.”
파우스 스승님은 내가 대충 집은 약초의 양이 항상 일정하다는 것을 알고 감탄하셨다. 글쎄 한 번 고위 마법사가 되면 감각이 예민해진다니까요.
그 뒤로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약은 모두 넘겨받았다.
덕분에 시간이 남게 된 파우스 스승님은 연구실에서 개인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게 무슨 연구인지는 나에게도 말씀하지 않았다.
덕분에 난 약제실을 거의 혼자 쓰다시피 하게 되었고, 파우스 스승님이 그동안 연구한 연구서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었다.
난 약제술에 대해서는 별로 지식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연구서를 보다보니 파우스 스승님이 약을 이용해 마나홀의 복구를 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연구서의 대부분이 마나홀의 강화에 대한 것이었다.
쯔쯔, 연구 방향이 좀 잘못 되셨네. 강화는 제대로 된 것을 더욱 강하게 하는 건데, 이미 깨어진 마나홀을 강화하면 오히려 깨진 게 더 산산조각이 나지 않겠어?
그날 밤, 난 식사를 하다가 은근슬쩍 파우스 스승님께 말을 했다.
“스승님, 제가 약제 연구서를 보다가 느낀 건데요. 마나홀 강화 효과가 있는 약은 이미 깨어진 상태에서 쓰면 역효과가 나지 않나요?”
“허, 그걸 깨달았느냐? 난 그걸 내 몸에 직접 시험해 보고서야 알았다.”
많이 아프셨겠네요. 상처 난 곳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을 텐데.
“그런데요. 제가 다시 생각해보니까요. 한판 파괴된 마나홀을 완전히 녹여 버리고 새로 생성할 수는 없나요?”
“마나홀을 녹인다고?”
“강화약을 써서 마나홀이 더 큰 타격이 왔다면, 그걸 계속 써서 아예 마나홀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흐음, 그건 생각해 볼만한 문제구나.”
“단지 그러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를 거라서...”
“그건 일시적으로 감각을 못 느끼게 만들면 되니 상관없다.”
“그렇군요.”
그렇죠. 고통이 올 줄 미리 알고 있다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잖아요. 우린 마법사니까요.
파우스 스승님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한 방법대로 마나홀을 완전히 녹이면 이론적으로는 새로 마나홀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1서클부터 수련을 해야 하지만 파우스 스승님의 경우도 전생한 나처럼 이미 다 알고 있는 길을 다시 걷는 상황이니 훨씬 빠르게 갈 수 있는 것이다.
10년 정도면 5서클을 다시 쌓아올릴 수 있겠지.
뭐, 그렇게 안 해도 그때 되면 내가 고쳐 드리겠지만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나수련이라는 것은 정신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가진다. 매일 해야 하는 게 지겹기는 해도 몸속에서 마나라는 힘이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게 얼마나 큰 도락인가!
그리고 1서클부터 다시 수련을 한다는 게 파우스 스승님께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칠까? 처음에는 급해서 길만 보고 걸어온 곳을 이제는 주변 광경까지 천천히 살피면서 올 수 있다.
이게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한 단계라는 것을 파우스 스승님은 아직 모르시겠지. 그러니까 6서클 마도사가 되려면 1서클부터 5서클까지의 마법들을 모두 되돌아보고 다시 연구해야 하는 거다.
그래서 5서클까지는 마법사이지만, 6서클부터는 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마도사라고 불린다.
“가능하겠구나.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파우스 스승님의 눈에 활기가 가득 찼다.
그래요. 그런 눈빛이 보고 싶었어요. 스승님.
오늘 따라 스프에 담근 빵과 치즈의 맛이 세 배쯤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