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2화
내가 다시 태어난 곳은 볼스테아 왕국의 산도스 지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마을의 이름은 링스턴.
링스턴은 이 마을 촌장의 이름인데, 그분의 아버지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사냥과 목축, 그리고 목공예로 생활을 영위하는 가난하고 위험한 곳이다.
이곳은 정말 산간벽지에 위치해 있고, 가끔 마물들이 출현하기도 해서 마을 전체에 상당히 높은 목책이 세워져 있고, 자경대도 결성되어 있다.
나의 이름은 렌으로 죽은 어머니가 지어주셨다. 어머니는 나를 가진 상태에서 링스턴에 왔고, 마을 사람들의 호의로 정착해서 살다가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상당히 기품이 있는 분으로 아마도 귀족가의 하녀가 아니었을까 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쨌든 그녀는 이런 곳에서 혼자 사는 것이 익숙치 않은 모양이었고, 결국 몸이 버티지 못했다.
세 살 때 혼자가 된 나는 마을의 늙은 양치기 몰던이 맡았고, 다행히 열 살이 될 때까지 무사히 자라서 이렇게 몰던 대신 어린 양치기가 되었단 말씀.
“다행이지 뭐야. 어릴 때 죽었으면 환생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었는데. 후훗.”
나는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껏 환생을 했는데 어릴 때 죽어버리면? 다시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할 리는 없고 그냥 헛짓하는 게 되는 셈이지.
더군다나 10살이 되기 전에는 마법수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말이야.
왜 10살까지는 못 하냐고? 마나의 응집에 몸이 못 버티고 대부분 성장이 멈춰 버리기 때문이지. 딱 열 살은 아니고, 보통 8,9세 정도면 괜찮아 지는데 비전마탑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10살 이후에 수련을 하도록 정해놓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동안 조신하게 몰던이 주는 밥을 얻어먹으며 집에서 지냈다. 그리고 어제 몰던이 나보고 대신 양을 지키라고 말했을 때, 이제 정식으로 마도의 수련을 시작하기로 한 거다.
양 말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조용히 마나수련을 하면 누가 알겠어? 정말 수련하기 딱 좋은 상황이지.
“일 년 이내에 1서클의 벽을 깬다.”
나는 바위 위에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서 명상에 들어갔다.
1서클만 되면 커넥트 마법을 사용해서 내 전생의 마나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 1서클이지만 무한히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수련을 계속해서 2서클이 되면 2서클을 무한히 쓰게 될 것이고...
다른 마법사들처럼 깨달음을 얻을 필요도 없고, 마법을 쓸 때 필요한 마나를 축척할 필요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서클의 벽만 깨면 된다.
10년 정도만 수련하면 최하 7서클까지는 가뿐히 뚫을 수 있다는 말씀! 어쩌면 8서클도 가능할지 모르지.
9서클이야 뭐...궁극마법인 만큼 10년은 잡아야겠지만. 8서클만 해도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다.
여차하면 마법진을 만들어 9서클 마법을 실현해 낼 수도 있고 말이야. 9서클도 알기는 다 알거든.
“20세 대마법사란 말이지. 후후후후훗.”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역시 환생은 하고 볼 일이야.
메에에에에
내가 갑자기 웃자 양들이 제가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나는 축생의 시선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는 다시 명상에 들어갔다.
처음 마나의 감각을 느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난 이미 느끼고 있었고, 이제 그것을 몸 안에 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안개를 손으로 잡아 모으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안개가 뭉쳐 솜사탕이 되고, 그것이 다시 눈덩이가 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그게 1서클이다.
그걸 계속 뭉쳐서 눈사람이 되면 2서클이고, 대충 개념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스스스스
마나가 서서히 몸에 모였다. 생각보다 빨랐다. 아무래도 이 몸은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났나 보다. 재능이 없어도 전생의 깨달음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이처럼 재능까지 타고나면 이건 뭐 거칠 게 없다.
하루 종일 열심히 수련한 나는 해가 지는 것을 느끼고 일어섰다. 석양빛에 양들이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참으로 평온해 보였다.
양들도 신참 양치기인 나를 무시하지 않고 순순히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 일과와 수련이 끝나니 기분이 좋았다.
“이게 좋지. 역시 느긋하게 수련하는 게 최고야.”
엘시아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느긋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몇 년 전부터 무리해서 빨리 1서클을 뚫으려고 마나수련을 하다가 몸이 망가졌을지도 모르지.
“하아, 어쨌든 이제 엘시아는 없으니까.”
그렇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환생한 건 죽은 지 100년이 넘어서이다.
그 동안 세상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나보다.
우선 엘시아가 말했던 대로 마나뱅크가 세상에 퍼졌다. 모든 마법사가 당연히 마나뱅크에 마나를 저축한다.
마법사들의 힘이 몇 배나 강해져서 현재의 귀족 중 대부분이 마법사란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다. 엘시아의 야망은 바로 마나뱅크의 독점이었는데, 아직까지 그런 일이 없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해킹에 실패한 모양이다.
“쯔쯔, 불쌍한 것. 넌 결국 나를 넘지 못했구나.”
엘시아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그러나 가슴 한편으로는 연민의 정이랄까, 나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생긴다.
나 혹시 그녀를 정말로 좋아했던 걸까? 그깟 거짓고백 한 번 당했다고?
“잊자. 잊어. 현생을 사는 나는 렌이다. 더 이상 로엔이 아니니 과거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
렌은 현실로 눈을 돌리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몰던, 저 왔어요.”
마나 수련을 시작한 기념할만하지만 평온한 하루였다.
*
“몰던, 저 왔어요.”
“왔니? 식탁위에 치즈하고 빵 있다.”
몰던은 헤어진 옷을 바늘로 꿰매면서 대답했다. 아아, 혼자 사는 남자의 포스가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은 내가 양을 돌보기 때문에 몰던은 이렇게 가사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거지.
난 화로 위에 있는 스프를 그릇에 떠서 빵을 적셔 먹으면서 몰던에게 양들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늙은 양치기와 어린 양치기 사이에 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란 것이 참 빈약하다.
더군다나 몰던은 내가 말을 붙이지 않으면 하루에 한두 마디 말도 안 하는 성격이다. 내가 정말 신경 써서 부자간의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거고, 사실 거의 내가 떠들고 몰던은 가끔 응응 거리며 대답하는 시늉만 한다.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말을 붙인 보람이 있어서 요즘은 대화가 좀 되기도 한다. 잘 말은 안 해주지만 몰던이 나름 과거에 사연이 있었다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몰던의 몸에는 근육이 살아있다. 우락부락하지는 않아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날렵한 느낌이랄까? 이건 몰던이랑 목욕할 때 느낀 거다.
몸에 흉터도 몇 개 있는 게 아무래도 젊었을 때는 용병같은 일을 했나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는 한데,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누구나 가슴속에 말하고 싶지 않은 사연은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각자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부자지간인 셈이지. 이정도가 딱 좋다.
어! 그런데 난 왜 몰던을 아직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거지? 천애고아가 된 나를 거두어 주고, 나름 정성껏 보살펴 준 사람이다.
나는 스프에 치즈 조각을 넣어 녹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치즈와 빵, 스프,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아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더군다나 저렇게 헤어진 부분을 꿰매서라도 제대로 된 옷을 입게 해주니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개척마을의 아이 치고는 꽤 괜찮은 상황인 셈이다.
이게 다 몰던 덕분인데, 이상하게 아버지란 말이 안 나오네. 아버지라는 인식은 있는데 말이야. 친부가 아니라 양부라서 그런가?
몰던도 딱히 날 아들이라 부르지 않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는 있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이게 마음에 걸린다.
‘혹시 내가 전생에 늙은이였기 때문인 건가.’
몰던은 나이가 많다. 얼굴에 가득 참 주름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하다. 그러나 난 전생에 120살까지 살았다. 몰던이 연장자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래서 아버지라는 느낌보다 기껏해야 그냥 친구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거다. 그것도 많이 봐줘서다.
이거 문제네.
환생의 문제점을 찾았다.
전생은 전생이고, 현생의 난 어린아이여야 한다. 그런데 이성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감성까지 전생의 영향을 받으니 정상적인 아이가 되기 힘들다.
애늙은이. 그야말로 이 단어가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데, 이거 이래서 제대로 크겠어?
육체와 정신은 상호관계, 서로 영향을 받는 법이다. 이성적인 부분은 그렇다 치고 감성이 늙은이라면 아무래도 성장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현실에 적응해야지. 난 어린아이다. 애처럼 살자. 감정에 솔직하고 때로는 생각 없이 행동을 해도 된다.
“몰던.”
난 결심을 하고 다시 몰던에게 말을 붙였다.
“음.”
“아버지라 불러도 돼요?”
몰던은 바느질을 멈추고 날 보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쁘긴 한데, 익숙치 않구나. 그냥 이름으로 부르렴.”
이 양반이, 사람이 기껏 결심하고 말을 했는데 그걸 거절해?
난 가볍게 한숨을 쉬고 그릇을 씻으러 나갔다.
그래도 그날부터 몰던은 나에게 조금 더 잘 해주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기르고 보살핀다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양아들로 키운다는 걸 인식한 듯 하다.
이거 이러려고 아버지란 단어를 꺼낸 건 아닌데 말이야.
나도 지금의 나라는 존재로써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기억일 뿐, 현재의 내가 아이란 것을 잊지 말자. 아니, 그걸 의식하지 말고 마음껏 현생을 즐기자!
메에에에에
털을 깎이던 메리 3호가 내가 딴 생각을 하는 걸 알아차리고 항의의 울음소리를 냈다. 엉덩이를 움찔하는 게 일어나서 딴 데 가고 싶은 모양이다.
“이크, 메리 3호야. 미안. 빨리 끝낼게.”
난 집중해서 빠른 속도로 양털을 깎기 시작했다. 양치기가 한가한 것 같지만, 털 깎고 젖 짜고 하려면 바쁠 때는 정말 바쁘다.
기본적으로 양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성질이 안 좋은 편이고 참을성이 없기에 어르고 달래면서 털을 깎고 나면 손과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다.
그래도 해야지. 미래의 난 대마법사지만 현재는 양치기이니까. 그리고 사실은 마법수련보다 양털깎기가 훨씬 재밌다.
수북하게 쌓인 양털을 보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일을 하면 뭔가가 생기는 게 정말 좋구나. 마법사일 때에는 이런 걸 느껴보지 못했는데.”
매일 연구와 수련, 오직 몸 내면의 마나가 자라나는 것만이 유일한 낙인 생활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직을 해 보니 옛날에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이 가슴에 가득 찼다.
일을 하는 보람을 느껴진다고 할까? 이런 평범한 삶의 기쁨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다니. 후훗
털깎기를 다 끝낸 나는 정리를 하고 잠시 수련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수련은 매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이게 투잡의 어려운 점이지. 에효.
그래도 현실생활에 보람을 느껴서인지 마음이 안정되고 마나의 흐름에 더욱 집중이 잘 되었다. 마나의 흐름을 쫓다보면 피곤함도 잊게 된다. 무엇보다 난 한참 성장하는 아이가 아닌가. 체력의 회복이 빠르다.
해가 저물 때까지 수련을 한 나는 어느새 피곤함도 사라졌음을 느꼈다. 양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몰던에게 열심히 말을 건내며 식사를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