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엔의 마나뱅크 1화
프롤로그
마나뱅크란?
역사 상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는 로엔 프로시안이 창조해낸 아공간 아티팩트로 마나를 완벽하게 저장할 수 있다.
마나뱅크가 이후 마법사들은 마나를 몸이 아닌 마나뱅크에 축척하기 시작했고, 마법을 사용할 때에는 즉석에서 커넥트 마법으로 마나뱅크의 마나를 끌어다 썼다.
마나뱅크의 마나는 커넥트 코드를 공유함으로써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후 세월이 갈수록 선조의 마나를 상속받은 마법사들의 힘은 점점 강해져갔고, 10대 가문이 탄생하면서 마도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장 환생
푸욱
“크악, 엘, 엘시아!”
내 심장 속으로 무엇인가 날카로운 이물질이 파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비수, 최강의 방어구라는 결계로브도 비수의 칼날을 막지 못했다.
사상 최강의 마법사라는 나 로엔 프로시안이 칼에 맞다니? 아마 사람들은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호호호, 설마 사부님이 이렇게 쉽게 빈틈을 보이다니요.”
엘시아가 나를 비웃는다. 내 제자, 부끄럽지만 120년 만에 처음으로 내 가슴을 뛰게 한 여자다.
방금 전 그녀는 갑자기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내 품에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당황한 내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대로 비수를 꽂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솔직히 고백을 받았을 때 내 가슴은 격하게 뛰었다. 이래도 되나 하는 망설임과 함께 느껴지는 희열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 사부가 평생 연애를 안 해봐서 당황했구나.”
“역시 남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자인 건가요.”
비아냥 거리는 엘시아의 목소리에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으으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을 관통 당했는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비수의 날에서 묘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데, 이게 전신의 힘을 빼앗고 있다. 마법도 사용할 수 없다.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인가?
이런 지독한 물건이 있다니!
“그런데 왜 날 찌른 거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자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던가?
“사부님의 마나가 탐나서요. 그게 있으면 전 10년 안에 제가 최고의 마법사가 되지 않겠어요?”
“커넥트 코드를 넘겨달란 말이냐?”
커넥트 코드는 나 로엔의 진명이다. 처음 마법사가 되면서 스승에게 받은 이름, 죽는다 해도 남에게 말하지 않을 나만의 비밀이다.
“발데스 스팅이 심장에 박힌 이상 사부님은 죽지도 살지도 못해요. 코드를 전해주실 때까지 제가 정성들여 사부님을 모실게요. 호호호호.”
“내가 마족을 키웠구나.”
기가 막혔다. 10살이 된 엘시아를 탑에 데려와서 제자로 받은 지 이제 20년, 그동안 난 엘시아가 착하고 순종적인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고보니 이상했다. 발데스 스팅이라는 비수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정도 물건이면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설마!
“이거 혹시 마족의 물건이냐?”
“아, 역시 사부님답게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아요. 마왕 발데스의 다리털을 가공해서 만든 최강의 암살구라고 하더군요.”
“으으, 마족과 계약을 하다니. 어떻게 네가?”
“전 사부님처럼 마도에 평생을 바칠 생각은 없어요.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가 되어 세상을 지배할 거에요.”
“대마법사가 되어도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다.”
그저 존경 좀 받다가 제자에게 칼 맞고 죽는 인생이 다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단순한 대마법사가 아니에요. 전 사부님의 마나뱅크를 모든 마법사에게 공개할 거에요. 이런 획기적인 아티팩트를 혼자 쓸 수는 없잖아요. 호호호.”
“네가 꾸미는 게 뭐냐?”
“별 건 아니에요. 모든 마법사가 마나뱅크를 사용하게 되면 전 마스터의 권한으로 나 이외의 마나뱅크에 대한 링크를 모두 끊을 거거든요.”
“뭐라고!”
“세상의 마법사들이 모두 사라지는 거지요. 그리고 저는 그들 모두가 모은 마나를 독점한 전무후무한 최강의 대마법사가 되고요. 어때요? 이정도면 세상을 지배할 만 하지 않을까요?”
“으으으, 독하구나.”
가능하다. 엘시아의 음모가 성공한다면 그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마나를 손에 넣고 강력한 마법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그녀를 막을만한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게 되니 그야말로 초월자가 될 수 있다.
엘시아는 사악하게 웃었다.
“어때요? 훌륭한 계획이지요? 그러니 제자를 위해서 순순히 코드를 넘겨주세요. 제가 사부님을 마도황국 초대 여황의 사부로 역사에 기록을 남겨 드릴게요.”
“세상 일이 그렇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이판사판, 살아날 길은 없다.
“커넥트!”
“흥, 소용없어요. 1레벨이기는 해도 커넥트도 엄연히 마법, 스승님은 지금 어떤 마법도 쓰지 못해요.”
이 커넥트는 그 커넥트가 아니지.
우우웅
“아앗!”
엘시아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방안의 룬문자가 빛을 발하자 금새 일그러졌다. 그녀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난 마법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이곳은 내 연구실, 말을 할 수 있으니 마법진을 발동시킬 시동어를 외칠 수는 있다.
“에잇!”
엘시아의 상황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즉시 나에게 달려들어 심장에 박힌 비수를 뽑았다. 발데스 스팅은 뽑히는 순간 대상을 즉사시킨다.
내가 마법진을 발동시킨 이상 그녀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난 로엔 프로시안이니까.
그래서 엘시아는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
“크윽!”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엘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뀌는 것은 없어요. 내 마나뱅크를 해킹해서라도 꼭 사부님의 마스터 코드를 찾아낼 테니까!”
과연 그게 쉬울까? 나는 엘시아를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엘시아는 나도 감탄할만한 진짜 천재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정말 마나뱅크를 분석해서 해킹에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아야 해.
나의 의식은 그 생각을 끝으로 완전히 끊겼다.
*
죽음은 삶의 끝이다. 그러나 일설에서는 죽음은 다음 삶의 시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환생,
난 원래 이쪽을 믿지 않았는데 대마법사가 되어 사라진 궁극마법들을 재건하다 이 마법을 발견했다.
마법 이름 자체가 환생이다. 마도용어로 라인카네이션.
정말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수십여 년에 걸쳐 이 마법을 재현해 놓은 것은 현재의 내 인생에 아쉬움이 많아서이다.
하얀 공간, 그곳에 나는 존재했다.
육체는 없지만 영체로써 분명히 의식을 가지고 있다.
“환생마법이 성공했군.”
마지막 순간 발동시킨 환생마법진이 정말로 성공할지 확신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 보면 확실한 듯 하다,
“이건 뭐지?”
몸에서 붉은 실 같은 것이 나와 공간 너머로 이어져 있었다. 이 붉은 실은 뭘까하고 환생마법의 이치에 대하 한참 고민을 하다 보니 집히는 게 있었다.
“엘시아에 대한 원한과 미련인건가. 이 실이 나를 원래 태어난 세계에서 멀어지는 것을 잡아주는군.”
환생마법에서도 의식을 성공시키려면 남에게 죽는 게 좋다고 했다. 생에 대한 미련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엘시아!”
그녀를 생각하니 분노에 영혼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나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0세 때 사부님의 손을 잡고 비전마탑에 들어왔다.
그때 분명 사부님은 내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틀림없이 대마법사가 될 것이라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 한 10년 죽어라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20살이 되고, 다시 10년이 지나 30살이 되었을 때, 대마법사의 길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또한 절망했다.
비전마탑의 규율은 엄격하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기 전에는 탑을 나갈 수 없다. 아니면 스승이 죽거나.
스승은 당대 최고의 마법사였고, 궁극마법을 쓰지 못할 뿐 거의 대마법사의 영역에 들어선 분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궁극마법을 쓰지 못하는 것이 평생 한이었고,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내 나이 50때 스승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그때 스승은 거의 죽기 직전이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내가 마법수련을 그만두고 탑을 나갈까봐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수명을 연장하기 시작했다. 그 뒤 40년, 내 나이 90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궁극마법을 깨달았고, 스승은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은 채 돌아가셨다.
전무후무한 대마법사, 시공간과 영혼의 조작마저 가능하다는 궁극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초인적인 존재!
그러나 실상은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본 채 탑에 갇혀 평생을 지낸 90살의 노인이다.
나에게 청춘은 없었다.
연인도! 부인도! 아이도!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을 희생해 얻은 궁극마법, 그런데 먹고 죽지도 못하는 궁극마법 좀 쓴다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더라.
마법이 내 인생을 망쳤다!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적당한 마법사로 세상에 나가 잘난 척하며 살다가 착하고 이쁜 연인도 만나고, 명성만큼 부귀영화도 누리며 살고 싶었다.
특히 딴 건 몰라도 남들이 다 해본다는 연애는 꼭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물 건너갔다.
“아니야,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나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대마법사다.
그 후로 나는 어떻게 하면 내 청춘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연구하기 시작했다.
몸이 다시 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50살만 됐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 터인데, 이미 노화가 너무 진행됐다. 그나마 노화를 멈추고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가능하기에 시간의 여유는 있다.
그때 찾아낸 것이 환생 마법이다.
환생을 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젊은 나이에 대마법사가 되어 내가 꿈꾸던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해보니 기억을 잃지 않고 다시 태어나도 육체가 새것이니 마나는 사라진다.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것이다.
마법주문은 다 알아도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마나를 모으는 것은 하루아침에 안 된다.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시킨다 해도 50살은 넘어야 현재의 수준이 된다는 의미다. 그것만 해도 대단하지만 수십 년 동안 또 마나수련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마나를 저장하는 아공간 ‘마나뱅크’를 개발했다. 나의 마나를 이곳에 넣어두면 언제든지 커넥트 마법으로 연결하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마치 마나가 부족한 마법사가 아티팩트의 마나를 빌려 고위 마법을 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게 만들어 놓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였다,
평소에 열심히 마나를 넣어두면 유사시에 계속해서 마법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저축의 중요성이 마법에도 나타났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치지도 않고 연속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
반칙이라고 할 만 한 아티팩트 공간이다.
처음에 시험 삼아 제자인 엘시아에게도 사용하게 했는데, 그녀는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바로 알고 미친 듯이 마나를 저장했다.
몸에 마나를 쌓으면 건강에도 나쁘고 가만히 있으면 서서히 소실되어 좋지 않다. 또한 마법을 사용하면 급격히 마나가 빠져나가면서 탈력감을 느끼게 된다. 마법을 연속해서 쓰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마나뱅크에 저장을 하면 그런 문제점이 사라진다.
엘시아는 젊은 나이에 다른 사람들의 몇 배나 되는 마나를 쌓았고, 나의 후광까지 받아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비록 비전마탑의 규칙 상 엘시아는 내가 살아있는 한 정식으로 세상에 나가지는 못하지만 난 내가 경험한 억울함을 그녀가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런 저런 심부름을 시켰고, 나중에는 몰래 빠져나가는 것도 다 눈감아 주었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나 보다. 엘시아는 세상에 나가 야망과 욕망, 그리고 배신을 배워온 모양이다.
“시간이 된 건가.”
몸에 이어진 빨간 줄이 서서히 당겨지기 시작했다. 하얀 공간의 어느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제 곧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리란 것을.
“엘시아야, 이제 내가 돌아가니 너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마지막으로 강하게 결심하며 나는 하얀 공간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