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71 Game No. 571 나 이런 사람이야. =========================================================================
Game No. 571
아이고, 머리야.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조금 아팠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그동안 술을 마시지 못한 울분을 제대로 토해 내리라!
먹고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똑똑히 보여 주리라!
이번 회식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중간중간 자리를 떠났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모든 이가 끝까지 함께할 기세다.
물론 미성년자인 애들은 신데렐라처럼 땡 하는 순간 숙소로 복귀해야겠지.
역시 회는 바닷가에서 먹어야 진리다.
아주 쫄깃쫄깃한 것이 술과 함께 술술 넘어갔다. 연호는 미숫가루까지 챙겨 오는 성실함을 보여 줬다. 평소에도 그렇게 성실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
내가 뭐라고 하자 연호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 무대에서 샴페인을 너무 뿌려 감기 기운이 온 것 같다고 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바로 기침을 콜록거렸다.
회식 장소로 이동하면서 기사를 확인했다. 사진을 확인한 우리는 그대로 뒤집어졌다.
연호 혼자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보면 혼자 올킬한 사람인 줄 알겠네〉라는 댓글과 〈그러게. 실상은 경기 나오지도 않았는데〉라는 댓글을 보며 연호는 굉장히 억울해했다.
본인이 원해서 샴페인 샤워를 한 게 아니었으니까.
투덜대는 연호를 보며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불난 집에 기름을 통째로 붓는 거나 마찬가지다. 예상치 못한 복수를 당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우승이 확정되었을 때보다 연호에게 샴페인을 뿌렸을 때 더 짜릿했다. 이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갈 생각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하도 많이 시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막 입에다 집어넣었다.
“크. 살살 녹는다. 녹아.”
“우승해서 더 맛있네요.”
“진짜 최고다. 최고.”
음식을 먹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우승한 후 회식은 꿀맛이다. 꿀맛.
“그나저나 저희 진열장 새로 사야 하지 않아요? 공간 비좁은 거 같은데.”
“그게 벌써 다 찼나?”
숙소 복도에 커다란 진열장이 있다.
내 개인 우승 트로피부터 프로리그 MVP 트로피, 프로리그 우승 트로피에 연말 시상식 때 받은 각종 상까지.
아스트로란 이름으로 받은 모든 상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다. 작년 시상식 이후 큰 걸로 바꿨는데 벌써 꽉 차게 되었다.
그게 다.
“승우 때문이죠. 이번 시즌에 우승 6개 해 왔잖아요. 프로리그도 통합 우승 차지했고 선수들 성적도 전체적으로 다 좋고. 이번 시상식 때까지 생각하면 지금 진열대는 너무 작아요. 제가 조금 더 큰 거 사자니까.”
“이렇게 빨리 우승컵 채울 줄은 몰랐지. 6회 우승하라고 했는데 진짜 6회 우승 할 줄은 몰랐다.”
흠. 제가 뭐 잘못한 건 아니죠?
신나게 회 먹다가 순간 움찔했다.
“이번엔 제가 저번에 말씀 드린 걸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올해만 끝이 아니고 내년, 내 후년도 있으니까요.”
작년에 도 수코님이 고른 진열대는 복도 끝부터 끝까지 이어진, 보는 순간 입이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진열장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모두 손사래를 쳤다. 커도 너무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렇게 큰 건 아닌 듯싶다. 이번 시즌까지 얻은 트로피를 장식해 놓으면 거의 반이 찬다.
“그럼 그렇게 하자.”
진짜 전부 채워 놓고 보면 장관이겠다. 장관.
S1에 있을 때 트로피 진열대 앞에 서서 무한 감탄을 발사하곤 했다.
과거 임주혁 감독님을 시작으로 정명혁까지 이어진 개인리그 우승 트로피와 프로리그 우승 트로피. 그리고 연말 시상식에서 받은 각종 상까지.
그 어느 팀보다 화려한 진열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전혀 꿀리지 않는다고 본다. 당연히 트로피 숫자는 우리가 무족하다. 하지만 S1은 10년 넘게 모아온 것이고 우리는 겨우 2년 동안 모은 것이다.
뿌듯한 건 지금이 훨씬 더 크다.
S1 진열장엔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다른 이들이 이룬 결실. 프로리그 우승 역시 마찬가지다. S1에서 출전 기록은 겨우 1전 뿐이었으니까.
아스트로는 다르다. 내가 아니 우리들이 함께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저 우승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을 넘어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트로피를 볼 때면 그때 있었던 일과 감정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더 뜻깊다.
음식을 넣으며 함박웃음을 짓는 팀원들이 보인다. 그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다. 그만큼 이들이 소중하다는 의미겠지?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평생을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
선수 생활은 물론이고 그 후 인간적인 삶까지 전부 다.
처음 음식과 술이 들어갈 때만 해도 올 시즌을 돌아보는 이야기와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남자들끼리 모인 곳이 그렇듯 어느새 대화 주제가 여자로 바뀌었다.
주제가 바뀌는 순간 목소리를 높이는 팀원들.
아니 방금까지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또 돌아온 거야?
아주 그냥 열변을 토하네.
“진짜 승우가 대단한 거야. 경기력도 유지하고 여자 친구도 만들고.”
어라? 어쩌다 화살이 나한테 돌아온 거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보다. 딱 내가 지금 그 모양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자연스레 집중되는 질문. 이건 집중이 아니라 폭격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개 능력자예요. 승우는.”
“부럽다. 부러워. 우승도 밥 먹듯 하고 연애도 하고. 으. 난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 도대체 언제 여자 친구는 또 만든 거야?”
“아이고. 배 아프다. 배 아파. 나는 연습실에 박혀서 연습할 때 누구는 데이트하러 놀러나가고. 아이고. 배 아파.”
모두 부러운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얼마 전에 여자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 나조차 몰랐다. 여자 친구는 용처럼 세상에 없는, 전설의 존재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근데 그거 농땡이 아니냐? 기자랑 인터뷰하라고 보내 놨더니 연애질이나 하고.”
“에이. 농땡이라뇨. 이런 건 인연이라고 해야죠.”
“아. 누가 저 새끼 입에도 버터 발랐냐? 자수해라.”
“누구겠어요. 김채하 기자님이지.”
“와. 이름밖에 안 나왔는데 입 벌어지는 거 봐라. 참나 누군 여자 친구 한 번도 못 사귀어 본 줄 아나.”
“형 한 번도 없었잖아요.”
“……닥쳐.”
연호를 향해 팩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하는 승대.
안 그래도 오늘 연호 힘든데 그거 너무 묵직한 거 아니냐?
그러다 연호 울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그나저나 여자 친구 생각하면서 좀 웃을 수 있지. 겁나 뭐라고 하네요. 생각하니까 갑자기 보고 싶다.
“저 잠깐만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취기가 올라와서.”
“……폰은 놓고 가라.”
이야. 연호 감 좋네?
미안하지만.
“폰 잃어버리면 어떡해? 손에 꼬옥. 들고 갈 거다!”
“이 색!!”
“크하하. 그럼 전 다녀오겠습니다!”
“쟤 나가면 안 온다니까? 무조건 잡아야 해!”
뒤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호의 절규가 들렸지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까.
채하랑 사귄 지 이제 막 23일이 되었다. 12시 넘었으니까 이제 24일인가?
아쉽게도 제대로 된 고백을 하지 못했다.
11월 4일.
여느 때처럼 만나 식사를 하고 맥주 한 잔을 할 때였다. 아. 참고로 난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다. 어쨌든 금주령이 떨어진 상태였으니까.
가만 보면 나도 참 말 잘 듣는다. 맥주 한 잔 정도야 마시고 들어가고 티도 안 날 텐데 말이지. 감독님도 검사하지 않으실 테고. 그때 나도 한잔할 걸 그랬나?
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때 술에 취한 채하가 나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그것도 아주 묵직한.
-저 어떻게 생각해요?
이 말에 난마시고 있던 물을 그대로 내뿜었다. 사레가 들켜 케켁거리는 내 얼굴이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술을 마신 채하보다 훨씬 더 벌겋게.
동시에 열이 화악 올랐다.
지금 김채하 기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지금 들은 게 맞나?
순수하게 그냥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물은 건가?
아니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뜻이 맞는 건가.
순식간에 찾아온 혼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게 당황할 만한 일이었나 싶다.
-난 이승우 선수. 아니 오빠 좋아하는 거 같은데. 오빠는 저 별로예요?
돌직구를 넘어선 철직구.
그 후 내가 사귀자고 고백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론 채하가 고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채하가 나에게 호감이 있는 줄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프로게이머, 그것도 현 시대 가장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선수기에 기자로서 가지는 호감이라고 생각했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상처받을 게 두려워 먼저 선을 그어 버린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올해 가장 기분 좋은 일을 누군가 물어본다면 승률 90% 달성도, 개인리그 6회 우승을 추가하며 플래티넘 마우스와 배지를 얻은 것도, 프로리그 통합 2연패를 차지한 것도 아니라 채하와 사귀게 된 것을 말할 거다.
그 정도로 행복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오빠!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채하가 전화를 받았다.
술을 마셨는지 목소리가 업 되어 있다.
“난 오늘 경기 나서지도 않았는데. 뭘.”
-아니에요. 오빠가 짱짱맨이었어요!
큼큼한 사내놈들 목소리를 듣다 애교 석인 채하의 목소리를 들으니 살살 녹을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채하가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지만 그럴 수 없다.
“뭐해?”
-아. 저희도 따로 회식하고 있어요. 좀 조촐하긴 하지만.
우리가 회식을 하 듯 기자단들도 모여 회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면 보자.”
-난 지금 보고 싶은데.
“지, 지금?”
윽. 그렇게 애교 있는 목소리로 하지 말아 줘.
심장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네. 지금!
“흠. 어딘데?”
결국 내가 무너졌다.
-저 ‘회밀리가 떴다’요!
목소리가 확연히 밝아진 채하.
‘회밀리가 떴다’면 어? 아까 오다가 본 곳 같은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이다.
잠시만. 아주 잠깐만 보고 올까?
아직 결론을 내리기도 전인데 이미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내가 그 앞으로 갈 테니까.”
-넵!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무조건 가야지.
연호야. 미안하다. 어쩔 수 없는 거 알지?
억울하면 너도 연애하든가.
****
‘짜식. 보기 좋네.’
통화를 하며 실실 웃는 이승우를 보던 이재명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여자 친구와의 통화겠지?
이재명 감독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았다.
‘좋구나.’
응답이라도 하듯 별들이 반짝였다.
작게는 자신부터 크게는 이 스포츠 판도까지.
2년 전과 모든 것이 달라졌다. 더 이상 비운의 감독이란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예전처럼 자본이 부족해 여기저기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이젠 최고의 감독이란 말이 자동으로 붙는다.
아직은 낯간지러운 소리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챙겨 줄 수 있겠구나.’
이번 우승을 통해 가장 기쁜 건 4회 연속 우승을 한 팀을 이끈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다. 선수들과 스탭들에게 보다 많은 연봉을 챙겨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얼마든지 더 퍼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간 힘들었을 텐데 군말 없이 따라 준 그들이 너무 고마웠다.
작년에 거둔 성과는 실력보다 운이 더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했다. 올해는 다르다. 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실력이 훨씬 더 절대적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9:1 쯤?
전 시즌에 밑그림을 완성했고 이번 시즌에 채색을 끝났다.
지금 아스트로가 역대 최강의 팀이라고?
천만의 말씀.
다음 시즌 아스트로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다.
“춥구나. 추워.”
가벼운 산책을 마친 이재명 감독이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그런 그를.
“감독님. 어디 가셨었어요?”
“한참 찾았어요!”
“감독님! 감독님!”
“제 술도 한 잔 받으셔야죠!”
아스트로 팀원들이 격하게 반겼다.
========== 작품 후기 ==========
승우도 연애하는데 ㅠㅠㅠ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