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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 No. 568
이정훈 감독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럴 수가…….’
1세트부터 3세트까지.
시작부터 경기가 져 있었다. 빌드 차가 너무 심했다. 날고 기어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이정훈 감독이 떨리는 눈으로 이재명 감독을 바라봤다.
완패다.
하나같이 생각도 못한 전략을 들고 나왔다.
정석만을 주야장천 사용하던 선수들이 모두 비수를 하나씩 품고 나왔다. 한민규부터 박현우까지. 전부 허를 찌르는 전략을 선보였다. 한민규야 간혹 전략적인 수를 사용하는 선수지만 박현우와 김승대는 아니었다. 습관은 바꾸기 힘들다. 프로리그에서 20승에서 30승씩 꼬박 챙기는 박현우와 김승대가 개인리그에서 4강 이상을 데뷔 이래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경기를 위해 특별히 전략을 준비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수를 쓸 줄 몰랐다. 조금 더 완화된 수, 그러니까 운영을 기반으로 한 뒤가 있는 공격을 준비해 올 줄 알았다. 이렇게 미친 듯이 공격만 하는 빌드 그리고 한 번 막히면 거기서 경기가 끝나는, 아니 들키기만 해도 질 수밖에 없는 답 없는 빌드를 준비했을 줄이야.
경기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흐르고 있다.
2:1로 이기거나 최소 2:1로 지고 있는 걸 생각했지 지금처럼 3:0으로 밀릴 줄 꿈에도 몰랐다.
이제 믿을 카드는 하나뿐이다. 이정훈 감독이 이영우를 바라봤다.
이영우는 다른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며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3:0으로 밀리고 있음에도 흔들림이 없다.
이정훈 감독과 이영우가 눈이 마주쳤다. 대화는 필요 없다. 서로 무얼 원하는지 이미 눈빛으로, 표정으로 전부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
임동주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무대를 올려다봤다.
프로게이머들이 으레 그렇듯 임동주 역시 학교에서 신들의 전쟁을 가장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중 소규모 대회를 나가게 됐고 우승을 하며 새로운 꿈이 생겼다.
프로게이머라는.
나름 재능이 있었던지 17살에 프로 자격증을 따고 18살에 프로 팀에 입단하게 됐다.
수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았다.
가족, 친구.
이름도 잘 모르는 다른 반 친구까지 찾아왔을 정도였다. 또래 아이들에게 프로게이머는 최고의 직업 중 하나였다.
처음 숙소에 들어오던 날을 그는 잊을 수 없다.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룬 날이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다.
하지만 그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꿈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현실을 머지않아 대면했으니까.
실력이 있으니까, 재능이 있으니까 금세 개인리그 예선을 뚫고 프로리그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모두 착각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실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살고 있던 동네의 이야기였다. 프로게이머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그의 재능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선수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그때 임동주는 깨달았다.
프로라는 이름의 무게를.
개인리그 예선 탈락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간간이 프로리그 경기를 나가긴 했지만 중요한 세트에 승부처로 나가기보단 대부분 경험을 쌓기 위해 출전했다.
그런 임동주가 프로리그 결승전, 그것도 4세트에 출전하게 됐다.
‘이길 수 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다. 이번이 첫 번째일 수도 있고 두 번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평생 최고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임동주는 더욱더 놓치고 싶지 않다. 팀원들의 믿음을, 감독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당당히 아스트로의 일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이길 수 있다.’
이영우.
큰 산이다.
마수에게 넘을 수 없는 마의 벽이기도 하다. 다른 종족에게도 강하지만 특히 마수에게 더 강하다.
‘이길 수 있다.’
신 천공의 눈.
환국을 상대로 마수의 무덤인 전장.
뒷마당이 있지만 금광이 없는 확장이라 환국전에선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2금광으론 마견이 얼마나 있건 상관없다.
환국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뒷마당 철광으로 다수의 궁병을 생산할 수도 있고 화차를 생산할 수도 있다. 마수전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유닛을 양산할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3금광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그게 관건이다.
마수가 힘을 발휘하려면 최소 3금광이 있어야 하고 안정적인 운영을 하려면 4금광이 필수다. 그 후 견제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둘 확장을 늘려 나가면 경기를 잡을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임동주가 장비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임동주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
-아. 정신 차려 보니 3:0! 3:0입니다. 아스트로가 CT를 3:0으로 찍어 누르고 있어요!
-이승우 선수가 나온 것도 아닙니다. 아직 이승우 선수가 뒤에 버티고 있음에도 3:0입니다.
-아스트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네요. 변했어요. 이제 이승우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본인만의 색깔을! 팀의 색깔을 완벽히 찾아가고 있어요.
-1,2,3세트 전략도 굉장히 훌륭했습니다. 완벽히 상대를 숨기는, 단 한 경기를 위한 전략. 그 뛰어난 전략을 경기 중에 녹여내는 선수들의 경기력도 일품이네요.
CT 입장에선 어? 하는 사이에 모두 패배했다.
눈깜짝할 새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자. 이제 CT에서 끝판 왕이 등장합니다.
-무조건 이겨야죠. 패배하면 4:0으로 경기 끝납니다!!!
4:0.
결승에서 4:0이라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치욕적인 스코어다.
-플레이오프 혈전 끝에 결승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절대 밀려선 안 되죠!
-분명 선수 간의 비교에선 확실히 이영우가 우위에 서 있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이 나올 겁니다. 이건 이견이 없어요. 쌓아 온 것 그리고 지금 보여 주고 있는 것이 확연히 다르거든요! 하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앞선 세 경기로 확실해졌습니다. 임동주도 품에 날이 잔뜩 선 비수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요!
객관적으로 둘을 비교하면 이영우가 크게 앞선다. 사실 비교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의미 없을 정도다.
하지만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앞서 출전한 선수들이 모두 전략에 당했다. 완성도 높은 단 한 경기를 위한 전략.
이영우가 출전할 것으로 예상되는 신 천공의 눈에 임동주가 왜 나왔는지 이제 밝혀졌다.
제물 카드가 아니다.
확실한 저격 카드다.
이영우라도 당할 수밖에 없는 전략을 들고 나왔을 거다. 날을 바짝 세워야 한다.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일거수일투족,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요! 아스트로에게 우승을 4:0으로 넘겨주는 건 진짜 자존심 엄청 상하는 일이죠.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할 수 있다고 팬들은 믿을 겁니다. 4세트 출전하는 선수가 이영우니까!
CT 팬들의 이영우 믿음은 절대적이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 CT를 구해낸 이영우다. 소년 가장이라는 웃지 못 할 별명을 들었을 때도 있지만 결국 신이 되어 CT를 최정상에 올렸다.
지금은 이승우의 포스에 살짝 밀리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성적과 경기력을 보여 줬던 것이 이영우다. 그것도 이승우가 훨씬 어린 나이에.
최근 이승우에게 패배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서 그렇지 다른 선수들에겐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올해 역시 세 종족 승률이 모두 70%를 훌쩍 넘었다. 용족전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종족전은 80%를 넘을 정도였다.
-이기고 팀원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에이스 결정전까지 가서! 이영우가 또 나와 승리를 거두면 아스트로를 완벽히 극복하게 되는 겁니다!
에이스 결정전까지 가 CT가 승리를 한다?
그건 이승우가 2패한다는 이야기와 거의 같다. 6세트에 나오는 이승우가 패배해야 에이스 결정전을 갈 수 있으니까. 이변이 없는 한 에이스 결정전에서 이승우가 나올 거다.
이승우를 두 번 잡고 우승을 차지한다면 적어도 CT는 아스트로 공포증, 정확히 하면 이승우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할 가능성이 높다.
-양 선수 경기 준비 시간이 확실히 길어지네요.
-아. 신중한 게 당연한 거죠. 양 팀에게 굉장히 중요한 경기 거든요. 아스트로 입장에선 여기서 확실히 경기를 끝내는 것만큼 좋은 건 없을 겁니다. 용족과 환국은 주전급 선수가 두 명, 그리고 그들을 받쳐 주는 서브 선수가 한 명씩 있어서 굉장히 층이 두텁거든요? 근데 마수는 그런 역할을 해 주는 선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임동주가 이영우를 잡는다면 그런 역할을 해 주는 선수가 나타나는 겁니다! 프로리그 결승에서! 이영우를 잡는 선수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렇죠.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죠. 흔히 말하는 깨달음을 얻어 쭉 치고 나갈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CT는 이영우 선수가 승리를 거두며 역전의 기반을 마련해야겠죠. 다른 작전 같은 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경기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양 선수 경기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 바로 4세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반대로 역전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4세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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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겼으면 좋겠다.”
“그러면 대박이지.”
“전략만 잘 맞아떨어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지 않나?”
“그럴 거예요. 그 과정을 만들기 힘들어서 그렇지.”
드디어 4세트 경기가 시작되었다. 긴장으로 인해 살짝 얼어 있는 동주의 얼굴이 보인다.
오늘 아침 동주가 찾아왔었다.
많이 떨린다고.
어떡하면 좋겠냐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당장 경기에 출전하는 동주의 마인드가 별로라서?
에이. 설마.
적어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거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동주의 모습에서 딱 일 년 반 전, 프로리그 첫 경기를 기다리던 내가 보였다.
“너무 흥분하면 안 돼. 그러다 제 실력하나도 보여 주지 못하고 내려올 수가 있어. 실제로 그런 경우 진짜 많다? 지금 네 앞에도 그 경우의 사람이 서 있잖아?”
나름 웃으라고 던진 농담인데 동주는 웃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겠지.
“반대로 평소 땐 그저 그런데 방송 경기, 지금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경기력이 폭발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것까진 바라면 마음의 부담이 있을 테니 여기까진 요구하지 않을게. 다만 적어도 네 온전한 실력은 꼭 보여 주고 내려왔으면 해. 아스트로 마수에 김승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임동주도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
떨고 있던 나에게 박성훈 코치님이 해 주셨던 말이다.
많은 위안을 얻었었다. 동주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연습실에서 동주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감독님과 코치님, 다른 팀원들을 감탄시킬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기에만 나가면 본 실력의 반도 나오지 못했다.
이 부분만 개선된다면 주전급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동주의 4세트 출전.
이건 모두에게 모험이었다.
감독님에게도, 팀에게도, 동주 본인에게도.
반대로 기회이기도 했다.
이 기회를 동주가 잡기를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