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15 Game No. 515 복수의 칼날. =========================================================================
Game No. 515
좋았어!
판 짜기가 제대로 먹혔다.
이런 식으로 승리를 거둘 때 가장 짜릿하다.
상대방의 전략을 예상하고 그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을 때!
1세트에 이어 2세트까지, 내가 생각해 왔던 그대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1세트가 승리했을 때부터 2세트 승리는 이미 따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스킬 없이 아주 깔끔하게, 빌드 싸움에서 완승을 거뒀다. 이러면 남은 체력을 3세트에 사용하면 된다.
1세트처럼 [폭풍]을 써도 되고 [투신]이나 [승부사]로 경기를 마무리 지어도 된다.
뭘 해도 되는 상황.
반대로 이영우의 부담감은 상당할 거다. 뭘 해도 안 되고 있었으니까.
조금 여유를 가지고 플레이를 하면 된다.
살짝만 자극해도 이영우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이미 판은 내 것으로 넘어왔으니까.
****
2세트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이영우가 뭉친 목을 손으로 주물럭거렸다. 부스에서 벗어나는 순간 짙은 피로감이 그를 덮쳤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말렸다.’
말려도 제대로 말렸다. 자신의 장점을 단 하나도 보여 주지 못 한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패배했다.
1세트도 충격적이었지만 2세트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발가벗겨진 기분.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대에게 완벽히 파악 당했다.
이보다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은 없다.
그간 이승우와의 경기 중 가장 절망감이 느껴지는 경기였다.
선수로서 이영우는 굉장히 훌륭하다.
역대 최고의 선수, 환국 최고의 선수라는 말을 몇 년간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그에 맞는 성적과 포스를 냈으니까.
근데 1년 만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승우는 쭉쭉 치고 나가는데 자신은 6회 우승에 머무르고 있다. 출발선이 달랐는데 이제 나란히 걷고 있다. 언제 자신을 지나쳐 저 앞으로 달려 나가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아.”
이젠 결승 진출조차 쉽지 않다. 그러는 사이 새로운 선수들까지 나타나 위협을 해 온다.
‘쉽지 않구나.’
한 해 4회 우승을 했을 때 이제 자신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너무 자만했었나?’
그런 감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자만은 자신감으로 충분히 포장할 수 있는 정도였다. 실제로 나갔다하면 거의 모든 경기를 이겼으니까.
프로리그와 개인리그의 부제가 ‘이영우를 이겨라!’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사실 지금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긴 하다.
개인리그 4강이나 결승에 단골처럼 이름을 올리고 있고 플프로리그에서도 다승 2위에 올라있다.
승률 역시 80%.
누군가에겐 꿈에 가까운 수치들이지만 이영우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설사 승률이 90%라 해도 마찬가지다.
이승우가 있는 한.
승률이 5할까지 떨어져도 상관없다.
이승우만 이길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짙은 어둠뿐이다.
어디로 가야 이 길의 끝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끝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최악의 기분.
불쾌한 무언가가 온몸을 감싸고 옥죄는 것 같다.
답답함에 이영우가 대기실 천장을 올려다봤다.
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지 조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하루다.
****
-태평의 시대에서 3세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영우 선수 진짜 큰일 났거든요? 이번에도 패배하면 3:0! 완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승우 선수의 판 짜기가 압도적입니다. 그냥 경기력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매 경기 새로운 컨셉을 들고 나옵니다.
-상대방의 생각을 완벽히 읽고 있다는 것이 크죠. 요즘 누가 앞마당 신전보다 용의 신전을 먼저 올립니까? 이 자체가 상대의 허를 찌른 거죠. 실제론 있는데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빌드 아닙니까?
-이승우라면 이영우가 2총통 FD를 안 했어도 그 경기를 승리로 가져가는 법을 알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지금 이승우는 최강이에요!
경기장의 분위기는 이미 이승우의 것이었다.
이승우의 포스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천왕랑도 한 번 모습을 보여 주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태평의 시대. 천왕랑 쓰기 아주 좋은 전장이거든요? 언덕도 많고 뭐 그냥 더 좋은 전략이 있다면 그걸 쓰겠지만 한 번쯤 생각해 줬으면 좋겠네요.
김태영 해설이 자신의 바람을 노골적으로 말했다.
본인은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이미 얼굴 가득 아쉬움이 묻어 있었으니까.
마치 상사병이 걸린 10대 소년처럼.
-이번엔 이영우 선수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빌드를 꺼내 듭니다.
-그렇죠. 바로 이거죠! 도감 더블! 이영우 선수가 도감 도블 장인 아닙니까? 알고도 막지 못하는 도감 더블이 오늘 나와 줘야 해요.
이영우는 자원전으로 넘어갔을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선수다. 단기전보다 장기전에 어울리는 선수. 상대의 공격을 다 막아 내고 후반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상당히 좋다.
그렇다고 단기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위협적인 빌드를 섞어 상대를 무너뜨리는 경우도 꽤 있다.
이런 장점이 유일하게 통하지 않는 선수가 바로 이승우다.
-이승우 선수도 이번엔 무난하게 할 생각 같습니다. 3용혼 더블을 할 생각 같죠?
-아무래도 태평의 시대는 용족이 전략을 걸기 좋은 전장은 아니죠.
앞선 두 세트와 달리 이승우도 무난한 시작을 보였다.
서로 정찰에 성공하며 빌드를 확인했다.
-가로인데 서로 가장 늦게 발견합니다.
-보통 세로 서치를 많이 하거든요. 일꾼이 용혼에 잡히긴 했지만 본진 솟대 개수를 확실히 확인해 줬기에 일꾼으로서의 임무는 다했다고 봅니다.
본진에 솟대 3개가 있는 걸 모두 확인했다.
지룡이나 흑완이 올 가능성이 매우 적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영우는 일꾼을 추가로 내보며 자신의 본진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혹시 전진 건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돌다리를 제대로 두드려 보고 있는 이영우!
-절대 전략에 당하지 않겠다는 거죠. 시작 좋습니다. 초반부터 압박받은 것도 없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요. 박 터지는 경기가 제대로 나오겠는데요?
앞마당에 건설 된 망루.
그리고 그 망루를 두드리러 온 용혼.
환국과 용족의 경기라면 응당 나오는 장면이었지만 이승우의 경기다 보니 이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망루 툭툭 치면서 압박을 시작하는 이승우!
-아. 이영우 선수 또 일꾼 내보내네요. 이승우가 뭘 하는지 봐야겠다는 거죠!
-일꾼이 잡히지 않았습니까? 본진에서 어떤 건물을 올리는지 궁금한 거예요!
아까 본진을 빠져나가있던 일꾼.
용혼이 망루를 치는 걸 보자마자 바로 이승우의 본진으로 달렸다.
용혼이 망루 쪽에 있는 이상 본진을 지키는 용혼은 없을 테니까.
-아직 화통도감이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대장간이 올라갑니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완성되겠는데요?
-미리 지어 놓는 거죠. 혹시 모르니까. 지금 같은 경우 다행히 정찰에 성공해서 화살탑을 짓지 않겠지만 만약 일꾼이 중간에 끊겼다면 주요 위치에 한두개 쯤은 건설해 줬을 겁니다.
화살탑을 마구 두르면 손해다. 하지만 도감 더블을 아무 피해 없이 성공시켰기에 지금 대장간 하나 정도 짓는 건 상관없었다.
빌드에서 이번 경기에 임하는 이영우의 각오가 느껴졌다.
절대 전략에 당하지 않겠다.
빌드가 갈려 허무하게 GG치는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정말 감탄을 자아냅니다. 단순히 몇 초 후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몇 분 후, 아니 아예 경기 전체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 나갑니다. 이게 절대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정상에 선, 최고수들만이 풍기는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재미없어 보이고,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그들만의 긴장감이 있는 거죠!
-이승우 선수 제단 하나에서 용혼 꾸준히 찍으면서 바로 트리플 지역에 신전 소환합니다.
-물량전 한 번 제대로 해볼 생각인데요?!
-근데 이게 위험한 판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영우 선수가 대장간을 짓긴 했지만 화살탑 하나 짓지도 않고 두 번째 화통도감 바로 올렸거든요? 그리고 일군으로 1제단에서 트리플까지 가져가는 걸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병력과 함께 충분히 진출 할 수 있다 이겁니다!
태평의 시대는 중간에 능선이 많다.
특히 트리플 지역이 언덕 아래에 위치해 있어 골목을 잡히면 밀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세로나 대각선이면 환국의 진출을 저지할 언덕이 여럿 있지만 지금과 같은 가로는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이승우의 도발일 수도 있습니다. 너 도감 더블했지? 그럼 나 트리플 한다? 근데 이거 그냥 주면 너 힘들어질 걸? 한 번 나와야 할걸? 이렇게 진출을 유도한 후 나온 병력을 싸먹어 승기를 잡으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근데 괜히 도발했다가 잡아먹힐 수도 있어요. 가로거든요! 가장 가까운 가로거든요!
-비록 이영우가 2:0으로 뒤지고 있긴 합니다만 이영우가 누굽니까? 최종병기, 신, 최연소 골든 마우스, 골든 배지의 주인 아닙니까?! 이제 겨우 20대 초반이에요! 언제든지 다시 정상을 찍을 수 있는 선수입니다.
-현재 프로리그에서 미친 활약으로 팀을 3위에 올려놓았거든요? 다 져도 이영우만은 지지 않으며 최고의 활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제 팀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면 됩니다!
이영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영우! 두 번째 화통도감에도 바로 부속건물 답니다.
-이건 한 번 찌를 생각입니다. 이승우 이제 용의 신전 완성되었거든요? 이제 제단 2개 더 늘려 주고 있거든요?!
세 번째 신전이 완성될 때까지 완성된 제단은 하나였다.
적어도 2번 정도 제단이 돌아가 용혼 6기가 추가 생산돼야 안정권이 접어든다.
이영우가 노릴 수 있는 틈은 충분히 있다. 부속건물 달린 화통도감에서 부지런히 천자총통을 찍어주는 이영우.
용혼이 6기인데 천자총통이 벌써 4기다.
-나갑니다! 이영우 선수 나가요!
-2세트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땐 앞마당도 없었고요. 화통도감도 하나였습니다. 근데 지금은 먹을 만큼 먹고 있고! 병력도 아까보다 질적으로 훨씬 뛰어납니다!
-이승우 선수도 이런 상황 충분히 예측했을 겁니다. 일꾼이 트리플까지 확인하는 거 봤거든요! 그럼 대처해야죠. 함정 파놓고 거기에 자기가 걸려 죽으면 안 되죠!
6궁병. 4총통.
그리고 일꾼 2기까지.
이영우는 이승우의 상황을 봤지만 이승우는 이영우의 빌드를 확인하지 못했다.
현재 확장을 지키기 위해 용혼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현룡 역시 나오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한 상황.
전장 중앙까지 환국 병력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진출했다.
-너무 쉽게 가는데요?!
-마중 나가서 컨트롤하면서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면 궁병이 전부 살아서 도착하거든요?
-궁병 1기를 앞마당 쪽에 보내 용혼 대부분이거기 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이러면 트리플로 가죠. 트리플 언덕으로 가서 바로 자리 잡는 거죠!
-이영우!! 1, 2세트의 복수를 제대로 해 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