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05 Game No. 505 승부를 내자. =========================================================================
Game No. 505
PP와 함께 경기가 멈췄다.
양 선수의 부스로 바쁘게 이동하는 심판진.
부스 안에서 선수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정말 치열한 경기였습니다.
-보는 내내 손에서 땀이 아주 그냥.
-지금 이 경기가 무승부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거든요? 김영민 선수가 정말 잘한 겁니다. 욕심 한번 부리지 않고 진짜 묵묵하게 버티기만 했거든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론 전혀 쉬운 플레이가 아니었다.
상대 상황을 모르기에 어느 한곳에 병력을 집중시키면 안 된다.
적절하게 분산시켜야 한다.
어떻게?
아주 적절하게.
“재경기 가겠지?”
“설마 여기서 더 한다고 하진 않겠지. 답이 없는데.”
“그러게.”
어느 한쪽의 자원이 남아 있다면 모를까 양 선수 모두 자원이 떨어진 상태.
더 경기를 지속하는 건 의미 없었다. 그래도 판정은 있어야 한다. 그 전까지 결정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모두 심판이 부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판정하겠습니다.
의견을 종합한 심판이 무대 중앙에 마이크를 잡고 섰다. 모두의 시선이 심판의 입에 집중되었다.
-두 선수의 공격 의사가 서로 없고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무승부 판정하고 재경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의 예상대로 되었다.
재경기.
무승부가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올 확률이 극히 드물다.
양 선수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재경기가 결정 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죠.
-두 선수 모두 재경기를 원했던 것 같네요.
-이제 몇 분간 휴식시간을 갖고 다시 경기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
<ㅎㄷㄷ 지린다. 이승우 무승부 뜸?>
<헐. 초반 치즈 막히는 거 보고 걍 밥 먹으러 갔는데 그게 무승부가 났다고? 그게 무슨 말임? 아니 ㅅㅂ. 거의 9:1이었는데;;; 누구 디스라도 뜸?>
<ㄴㄴㄴ 경기 제대로 진행됐음. 그냥 김영민이 미쳤음. 그걸로 끝임.>
<이승우 최초 무승부 상대가 김영민이 될 줄이얔ㅋㅋㅋ 존나 예상못했닼ㅋㅋㅋㅋ>
<이거 또 무승부 나오는 거 아님?ㅋㅋㅋㅋ>
커뮤니티가 들썩인다.
이승우와 김영민의 경기 결과로.
무승부.
참 보기 힘든 결과가 나왔다. 모두 최선을 다했다.
그렇기에 무승부가 나온 거다.
누군가 그랬다.
완벽한 축구선수들끼리 경기를 치르면 0:0 무승부가 나올 거라고.
이 경기가 그렇다.
둘 다 잘했다. 서로 실수를 한 번씩 주고받았지만 그 이후로 빈틈이 없었다. 이상적인 용족과 환국의 모습을 잘 보여 줬다. 입을 떡 벌리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기력.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재경기엔 또 어떤 경기가 나올 것인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얼마나 멋진 경기로 즐겁게 해 줄까?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TV,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
맙소사.
무승부가 나올 줄이야.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경기가 이렇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치즈 러시가 실패했을 때 무승부를 계획했던 것 같다. 어차피 공격을 갈 수 없으니.
너무 상대를 과대평가하는 건가?
아니야. 이건 확실히 노렸어. 이길 순 없더라도 지지는 않는 방법을 찾은 거야.
수비라는 환국의 가장 큰 장점을 활용해서.
드러눕는다는 게 말은 되게 쉽지만 실제로 운영하기엔 굉장히 까다롭다.
당했군. 당했어.
2운룡이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고집을 피워 보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체력을 계속 깎이고 있거든.
장기전에 접어들면서 체력 소모가 급격하게 늘었다.
40분 이후의 1분과 10분 대의 1분은 같은 1분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체력 소모양이 다르다. 차라리 빠르게 재경기를 치르는 것이 나았다.
오늘 내 목표가 1킬이 아니잖아. 4킬이 목표잖아?
그러려면 체력 아껴야지.
체력을 워낙 많이 소모한 탓에 더 이상 스킬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체력양이 아슬아슬할 것 같다.
“김영민도 장난 아니네.”
도 수코님이 징 하다는 얼굴로 김영민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저도 느꼈어요.
저 녀석은 괴물이에요. 괴물.
뭐 그렇게 감각이 좋아?
“운영이 탄탄하더라. 운룡 견제에 너무 많은 걸 실었어.”
감독님의 날카로운 지적.
저도 딱 거기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다시 한번 그때 상황을 되짚어 봤다.
타이밍 좋게 나온 신기전.
그리고 본진에 주둔하고 있던 천자총통 3기.
그게 왜 거기에 있었을까?
분명 내가 트리플 지역을 한 번 뚫을 것처럼 연기를 했음에도 본진에 천자총통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려면 둘 중 하나지.
첫째, 병력을 흘렸다. 집결지 설정을 잘못했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병력이 본진에 배회하고 있던 거지. 그 타이밍에 딱 내 운룡이 들어간 거고. 솔직히 이럴 리는 없다고 본다. 이런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김영민은 아니다.
그랬다면 천왕랑으로 못 끝냈을 리가 없다.
바로 두 번째로 넘어가자.
2운룡이 들어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
여기에 무게가 심하게 실린다.
어떻게?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화차가 봤든 일꾼이 봤든 아니면 감으로 찍었든 김영민만 아는 무언가가 있었겠지.
아쉬워할 필요 없다.
이미 지난 일이다.
이제 머릿속에 채워야 하는 건 다가올 재경기였다.
****
“잘했어. 진짜 잘했어. 판단도 좋았고 버티는 것도 진짜 완벽했어.”
“천천히 심호흡하고. 마음 가라앉히고. 그렇지. 별다른 지시사항은 없어. 방금 경기처럼 네가 원하는 대로, 끌리는 대로 하면 돼.”
임주혁 감독과 최연규 코치가 김영민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앉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김영민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대견한 놈.’
최연규 코치가 흐뭇한 표정으로 김영민을 바라봤다. 정명혁에게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야 진정한 후계자를 찾은 기분이다.
2운룡을 막아 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최고의 판단을 했다.
마치 맵핵이라도 쓴 것처럼 이승우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경기가 끝난 후 물어봤다. 운룡 2기를 봤냐고.
김영민이 답했다.
못 봤다고.
그럼 왜 병력을 본진에 둔 것인지 재차 물었다.
김영민의 답이 걸작이었다.
왠지 2운룡이 올 것 같았다. 감이 왔다라고.
난 놈이다.
타고난 놈이다.
무시할 수 있는 감, 확실한 정보가 없는 감에 모든 걸 걸 패기.
이보다 더 놀라운 건 무승부를 어느 정도 계획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초반에 큰 피해를 받았다. 이기기 위해선 화차 견제부터 시작해서 미친 듯이 전투를 잘해야 한다.
상대는 이승우.
그게 통할 상대가 아니다.
이승우가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건 사과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1세트를 이기려면 너무 많은 운이 따라야 한다는 걸 김영민은 느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무승부를 하기로.
상대적으로 해야 할 것이 줄어든다.
공격을 갈 필요가 없어지니까. 모든 병력을 수비에 집중한다. 견제조차 가지 않는다. 무승부라는 목표를 잡은 이상 화차와 용안을 교환하는 건 손해다. 이런 건 공격 타이밍을 잡을 때나 하는 거다.
청풍은 2인용 전장 중에서도 수비를 하기 편한 전장에 속한다. 중앙이 이중 언덕 구조로 되어 있어 용혼이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동시에 용족의 병력이 앞뒤로 덮치는 상황을 만들 수 없는 전장이다.
지상 공격 방향은 오직 하나.
상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수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율이 일었다.
그림을 그려도 너무 큰 그림을 그렸다. 다른 선수에겐 보이지 않는 그림을.
다른 사람 눈엔 밑바탕도 그려져지지 않은 그림이지만 김영민의 머릿속엔 이미 완성된 그림이 들어 있었다.
이런 선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타고나야 한다.
“감독님, 코치님.”
“왜?”
“말해 봐.”
김영민의 말에 두 명이 즉각 반응했다.
“2세트에 전략 걸어 볼게요. 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임주혁 감독과 최연규 코치 얼굴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네 마음대로 해.”
이제 더 이상 이영우를 S1으로 데려오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S1에는 김영민이 있으니까.
****
10분간의 작전 타임이 모두 끝이 났다.
1세트를 했던 선수가 그대로 부스에 앉았다.
두 번째 경기지만 세트 역시 바뀌지 않았다.
그대로 1세트.
당연히 전장 역시 청풍이다.
지금 프로리그를 막 튼 사람은 무슨 사정이 생겨 경기가 미뤄진 것으로 알 것이다.
-아. 아주 멋진 승부였어요.
-올해 항상 승리만을 거뒀던 이승우 선수가 처음으로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무승부가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승부를 겨루지 못했다는 겁니다. 패배는 아니지만 승리밖에 모르는 이승우에게 처음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겁니다!
엄밀히 말해 승률 100%는 아니다.
하지만 에이스 결정전에서 다시 나와 승리를 거둔 것과 상위 라운드에 올라간 것, 우승을 차지한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현재 이승우의 승률은 100%다.
중간에 시련이 있긴 했지만 모두 이겨 내고 최후의 승자가 됐다는 말이다.
그런 이승우에게 제대로 태클을 거는 선수가 나타났다.
김영민.
처음엔 다른 선수와 같았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 줬지만 끝내 이기지는 못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또 패배했다.
넘어설 듯 말 듯,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이 이후 이승우에게 파악당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저 이승우의 승수를 채워 주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김영민은 달랐다.
최초로 이승우에게 무승부를 안긴 선수가 되었다.
-진짜 큰 그림 제대로 그릴 줄 아는 선수입니다. 생각하는 것조차 쉽지 않는 그림을 구상하는 것도 대단한데 그 그림을 완성 시켰습니다!
-자. 양 선수 모두 준비가 끝났다는 사인이 들어왔습니다. 과연 작전 시간 동안 어떤 전술을 짰을지!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시작 한 1세트.
이제는 멘탈 싸움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가진 선수가 이긴다. 같은 전장에서 방금 전 한차례 경기를 치렀다.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전략을 선보일 것인가?
이 자체가 심리전이다.
-다시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이번엔 7시가 김영민 선수의 진영이고 1시가 이승우 선수의 진영입니다.
-양 선수 눈빛이 아주 살아 있습니다. 지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거든요! 이들은 프로거든요! 부스에 들어서기 전까지 굉장히 피로해 보였는데 마우스와 키보드를 잡는 순간 표정이 싹 변했습니다.
-양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열화와 같은 박수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같은 전장이지만 아까와 조금 다른 양상의 경기가 나왔다. 일단 본진에 제단을 소환하는 이승우. 무난한 출발이다. 아무래도 2연속 생 더블을 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김영민도 그걸 염두에 두고 빠르게 정찰을 나올 수 있으니까.
김영민도 일단 입구를 막으며 경기를 시작했다. 궁병을 꾸준히 찍으면서 화통도감을 올렸다.
-김영민 선수 일꾼 쉬는데요? 이거 한 번 공격을 갈 셈입니다.
-아까 경기 길게 했다 이겁니다! 이번엔 그렇게 오래하고 싶지 않다! 빠르게 끝내고 다음 경기 하고 싶다!
중계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번째 화통도감이 올라갔다. 일반적인 2화통과는 다르다. 적어도 그건 뒤가 있다. 막혔을 때를 대비해 일꾼을 중간중간 찍어 줘 앞마당을 따라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김영민의 2화통엔 뒤가 없었다.
올인.
일꾼도 쉬고 있다.
본진 최적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마당을 먹을 생각 자체가 없어보였다. 2화통 러시로 끝내겠다는 의미. 김영민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뚫으면 이기고 막히면 진다.
적어도 이 경기는 전 경기처럼 길게 이어지지는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