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9 Game No. 209 흑완아. 부탁해. =========================================================================
Game No. 209
무언가 감이 쎄 하다.
꼭 챙겨야 할 물건을 집에다 두고서 외출을 나선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순간 송병호도 나와 같은 빌드를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동시에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송병호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작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왜 송병호도 흑완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차 싶었다.
부랴부랴 용무관을 지었다.
본능적으로 알아 차렸다. 지금 지어도 늦다는 것을.
제단에서 흑완이 절반 이상 완성되었다.
송병호도 마찬가지인 상황일 것이다.
상대가 흑완이 아니라면 지금 걱정은 정말 쓸모없는 걱정이 된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만약 흑완이라면?
삐끗하는 순간 패배고 잘해야 무승부인 상황이 나올 수 있다.
***
-확실히 이승우 선수 감이 좋네요. 상대가 흑완을 뽑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송병호 선수는 용무관 안보입니다. 바로 앞마당 가져갈 것처럼 보이거든요?
-완벽히 흑완을 배제한 느낌입니다.
배제는 송병호가 자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안티들은 꽁으로 승을 먹으려 한다며 송병호를 조롱했지만 연습경기도 아닌 방송 경기에서 배제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웬만한 배포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게 작용할 때가 더 많았지만 가끔 본인을 위협할 때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승우는 용광포를 지을 수 있다.
전진해서 지은 건물에 용광포 2개를 짓고 거기에 용안이나 흑완을 가져다 놓으면 최소한 지지는 않는다.
송병호는 아예 용무관을 건설하지 않았기에 최악의 경우 승리를 내줄 수도 있었다.
-자. 양 선수 모두 흑완 생산되었습니다.
-분명 중간에 만날 텐데 그때 어떤 생각이 들까요?
-자. 갑니다, 갑니다!
이대로 간다면 서로 만나는 상황.
흑완의 모습이 보이진 않겠지만, 전장이 일그러지는 걸로 상대가 흑완을 생산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이승우의 흑완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조금 더 아래쪽까지 이동하며 길게 돌아가는 모습.
서로 흑완을 선택했다는 것을 아는 시기가 뒤로 늦춰 졌다.
-어? 어? 잠시만요. 이거.
-아. 송병호 선수 입장에선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차라리 중간에서 만나는 게, 송병호 선수한텐 도움이 되거든요? 뒤 늦게 라도 용무관 따라가면서 어떻게든 무승부 노려볼 수 있는데. 아, 본진에 흑완 난입하고 용무관 지으면 늦어요. 완성 안 됩니다.
-이 와중에 송병호 선수 앞마당으로 신전 소환하러 가죠.
빌드가 엇갈렸다.
이승우도 본진에 용광포를 지은 건 아니지만 용안을 한 기 몰래 빼, 전진 건물 근처에 용광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자. 들어갑니다!
흑완이 상대의 본진에 난입했다.
동시에 양 선수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둘의 동공이 동시에 흔들렸다. 더 당황한 건 송병호였다.
아예 용무관 자체가 없었으니까.
입술이 바짝 마르는지 연신 혀로 입술을 훑었다.
-아뿔싸. 이게 웬 흑완이냐!
-아. 송병호 선수 크게 당황합니다. 용무관 아예 없거든요!
-볼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어요!
-자. 이승우 선수 침착해야 합니다. 용안 몰래 한 기 빼서 용광포 지어야 해요. 하나는 부족합니다. 2개, 2개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승우 선수의 용광포가 2개 이상 지어지면 송병호 선수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무조건 무승부를 노려야 하거든요? 지금 양 선수 간의 자원이 궁금합니다.
김태영 해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 선수의 개인 화면이 잡혔다.
먼저 이승우의 자원 상황이 나왔다.
-자. 이승우 선수 자원 350있어요. 350! 신전은 지을 수 없지만 지금 용광포를 지을 수 있는 돈은 충분하거든요?
바로 송병호의 개인화면으로 바뀌었다. 철이 350 남아 있던 이승우는 양반이었다.
-아. 150밖에 없거든요? 어차피 용무관 못 짓습니다! 이승우 선수 경기 잡아내나요?
-송병호 선수 어차피 용무관 지을 시간이 없으니 솟대 하나 지을 돈 남기고 전부 병력을 찍어 버린 것 같습니다.
서로간의 가진 병력은 용안과 흑완뿐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흑완의 숫자는 똑같았다.
3기.
이것으로 상대를 끝내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아. 서로 본진 썰리는 건 마찬가지인데 용광포를 지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차이가 나거든요?
-어차피 다른 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엘리전입니다!!!
-엘리전!
올해 벌어진 용족간의 경기 중 가장 처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승리로 끝나기는커녕 무승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송병호의 센스 때문이었다.
본진에 있는 용무관을 본 순간, 다른 곳에 용광포가 지어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송병호. 그는 본진의 신전만 날리고 3기 중 2기의 흑완을 7시로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입구를 막기 위해서였다.
흑완이 홀드로 단단 입구를 막은 순간 미리 안에 숨에 있던 용안으로 솟대를 소환했다.
그리고 남은 1기의 흑완으로 부지런히 정찰을 보내 이승우의 신전이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서로가 서로를 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단 용광포가 2개나 있는 이승우는 엘리를 당할 위험이 전혀 없다.
송병호의 흑완은 입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1기의 흑완으로 2개의 용광포를 파괴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건 송병호가 아니라 송병호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정은 이승우도 마찬가지다.
입구를 흑완이 단단히 틀어막고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서로가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아. 경기가 이렇게 되네요. 송병호 선수 노련합니다. 확실히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은 선수답게 재빠른 판단을 내립니다.
-어차피 용무관이 없어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럼 지지는 말자. 무승부로 끌고 가자. 재경기로 가서 다시 승부를 보자! 그 급한 와중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이러면 이승우 선수 아쉽죠. 분위기 자체는 괜찮았거든요.
7시 안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이승우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일꾼으로 비비기를 하려면 안쪽의 시야가 확보되어야 했다.
당연히 지금은 시야가 확보되어 있지 않아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지나고 있을 때였다.
-협회 : PP
-아. 결국 나오네요.
-세상에서 가장 적절한 PP죠. 최고입니다.
-저희가 절실히 원했던 그 PP가 지금 나온 거죠. 잠시 선수들에게 시간이 주어지겠습니다.
협회가 PP를 걸었다고 바로 무승부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양 선수의 동의가 필요하다.
양 선수 중 한 명이라도 계속 경기를 하겠다는 의사를 보인다면 다시 경기는 재개된다.
-이제 경기는 미궁 속으로, 다른 차원으로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 이승우 선수와 송병호 선수. 서로 간의 똑같은 판단, 거의 비슷한 위치에다가 하늘성소를 숨겨 지으면서 경기가 이렇게 되어 버렸네요. 두 선수 모두다 이의가 없이 재경기가 이어질 것 같네요.
심판이 송병호의 부스에 먼저 들어갔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송병호는 재경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상황 자체를 가장 기다린 건 송병호였을 테니까.
송병호의 의사를 확인한 심판이 이번엔 이승우의 부스로 향했다.
-어? 말이 조금 길어지네요?
-그러게요.
빠르게 대답이 나왔던 송병호와 달리 이승우는 심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계속하려는 건가요?
-글쎄요. 아쉬운 건 알겠지만 방법이 따로 없을 텐데요.
김태영 해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병호와 달리 대화가 길어지고 있다.
심판이 경기에서 직접 PP를 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팬이나 감독들에게 항의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정말 개입이 필요한 상황에서만 PP를 쳤다.
지금 같은 경우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서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어디서 운룡이라도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송병호의 솟대를 파괴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잠시 후.
양선수의 의사를 확인한 심판이 중앙으로 나왔다.
-한국 이스포츠 협회 최덕환 심판입니다. 판정하겠습니다. 이승우 선수와 송병호 선수와의 경기 도중 더 이상 경기를 이어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와 관련되어 양 선수에게 무승부를 선언하고 재경기를 제안하였지만, 이승우 선수가 계속 경기를 이어갈 의사를 보여 중단했던 경기를 다시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의외의 상황.
중계진뿐만 아니라 관중들도, 심지어 양 팀의 감독들도 재경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승우의 선택에 경기장이 술렁거렸다.
“흠.”
이재명 감독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가 중앙 화면과 이승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표정이 밝다.
이미 경기를 이긴 것처럼 말이다.
‘따로 생각이 있는 건가?’
그는 이승우가 번뜩이는 센스를 가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생각 없이 경기를 연장한 것은 아닐 거다.
분명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 경기를 본인의 승리로 끝낼 수 있는 방법을.
***
처음 경기를 멈췄을 때만 해도 무승부를 받아들이고 재경기를 하려고 했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굉장히 아쉬웠다.
조금만 더 빨리 용무관을 지었다면 경기를 쉽게 가져갈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심판의 PP가 있었고 모든 걸 포기하려는 그 순간.
‘잠깐? 그게 되려나?’
어렸을 때의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친구들과 신들의 전쟁으로 각종 놀이를 했을 때 했던 일이 말이다.
‘될지도 몰라.’
그 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지만 그에 대해 추가 패치가 이뤄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긴. 애초에 버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꾼을 겹쳐 철광 뒤로 보내는 것 같은, 게임 내의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번개를 맞을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욕조 안에서 유레카를 외친 이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래, 이런 방법이 있었어. 난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
-자. 일단 이승우 선수가 무승부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기가 다시 재개됩니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기 때문에 재경기로 넘어가지 않은 것이거든요? 도대체 그 방법이 무엇일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도 계속 생각해 봤거든요? 근데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 위기를 타개할지.
경기가 다시 시작됨과 동시에 이승우의 흑완 3기가 7시로 향했다.
이미 모든 전장을 뒤진 터라 그곳에 송병호가 가진 최후의 건물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승우 같은 경우 용광포가 있기에 자리를 마음껏 비워도 상관없었다.
장점이라면 장점.
하지만 입구가 흑완으로 꽁꽁 막힌 터라 7시 본진으론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입구로 이승우의 흑완 3기가 옹기종기 모였다.
옵저버 화면으로 중계가 되기 때문에 관중들의 눈엔 송병호의 흑완이 보이지만 이승우 화면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벽이 언덕에 있는 것처럼 그곳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서 방황할 뿐이었다.
-저기는 못 지나가죠.
-자. 과연 어떤 걸 보여 줄지.
그때였다.
-어. 뭐죠?
뒤에 있던 2기의 흑완이 병예로 합체를 시도했다.
정말 쌩뚱 맞은 행동.
너무 긴장해 실수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는 건 정확히 2초 후에 드러났다.
-어? 어?
-저게 뭐죠?
-흑완이! 흑완이!
흑완이 병예로 합체하는 순간 앞에 있던 흑완이 튕겨지며 송병호의 흑완과 뒤엉켰다.
일꾼으로 밀치기를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승우가 준비한 마지막 수가 이것이었다.
흑완 넘기기.
사실 운도 따라야 한다.
일꾼 비비기를 할 때 무조건 성공하는 것이 아닌 듯, 상대 유닛을 넘어갈 수도 있고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설마! 설마!
-으윽!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송병호 선수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묻어 나옵니다! 으아!!
흑완들이 제대로 엉키며 관중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넘어가느냐?
마느냐?
거기에 이번 승부가 걸려 있었다.
모두 긴장 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넘어가면?
이승우가 이긴다.
넘어가지 못하면?
송병호가 원하는 재경기로 이어진다.
양 팀 입장에서 입이 바짝 마르는 순간이었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신난 건 중계진과 방송사였다. 금주의 화제가 될 게 뻔한 경기였으니까.
인터넷에서 흔히 하는 말로 꿀잼 경기!
-자자자자!
-흑완아. 힘을 내!!!
-송병호 선수 섣불리 못 움직입니다. 괜히 컨트롤 했다가 흑완 넘어오는 걸 도와주게 될 수도 있거든요!
-아니 무슨 경기가 이렇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 아니겠습니까?
중계진들의 얼굴이 다채롭게 변했다. 인상을 쓰기도 했고 입가를 실룩이기도 했다.
말 대신 표정으로 모든 걸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
저 1기의 흑완에 양 팀의 운명이 걸려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