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8 Game No. 188 칠룡(七龍) =========================================================================
Game No. 188
모든 무대가 끝난 후 난 숙소로 돌아오지 않고 가족들을 만났다.
하루간의 특별 휴가였다.
얼마든지 휴가를 즐기고 오라고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결승전이 한 번 더 남아 있었으니까.
MSL까지 우승한다면 조금 더 편하게 휴가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팀의 회식도 미뤄졌다.
어차피 내일 프로리그 경기가 있기도 해서 늦게까지 회식을 하는 것 자체도 무리가 있었다.
“고생했다, 아들. 고생했어. 정말 고생했어.”
경기가 끝난 지 2시간이 지났지만 엄마는 여전히 울고 계셨다.
“좋은 일인데 왜 울어? 웃어야지.”
“오빠도 아까 엄청 울었잖아?”
“……그러게.”
동생의 일격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울지 말라는 말을 누구한테 할 입장은 아니다.
평생 운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아까 흘린 것 같았다.
인터뷰 할 땐 꾹 참았지만 트로피를 들어 올린 순간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는 엄마도 눈물을 흘렸고.
“근데 진짜 오빠 멋있었어. 주인공 같더라.”
이거 왜 이래? 주인공 같은 게 아니라 주인공 맞거든?
“우승이라니. 꿈만 같아. 아, 과 사람들한테도 엄청 톡 왔어. 축하한다고. 오빠 완전 인기 스타던데?”
동생의 말에 조금씩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요즘 20대 최고의 콘텐츠는 그 무엇도 아닌 신들의 전쟁이다.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높은 게임성으로 사람들의 눈과 손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인 원하면 해 줄 테니까 언제든 말 만 해.”
난 으스대며 입을 열었다.
어깨에 힘이 풀릴 기미가 안 보이는구만!
“아. 진짜? 사인 해 줄 수 있어? 안 그래도 그런 부탁 많이 받았는데 오빠 힘들까 봐, 말 안 했었는데.”
엥? 진짜?
그냥 농담 삼아 해 본 말인데 정말 내 사인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나를 보며 동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 표정? 거짓말한 거야?”
그런 게 아니다.
그냥 놀라서 그런 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할 수 없지.
“아아. 언제든지 오케이지.”
해 주는 건 문제가 없다.
다만 아직 내 사인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도 저도 못 하는 날 구원해 준 건 엄마였다.
“네 오빠 힘들 텐데 그런 거 부탁하지 마.”
“오빠가 된다고 했는데?”
“그럼 안 된다고 하겠니? 네 오빠가 언제 부탁 거절하는 거 봤어? 귀찮게 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게 내비 둬.”
“쳇. 알겠어.”
입을 삐죽이며 뒤로 물러나는 동생.
감사합니다. 엄마!
그리고 미안하다. 동생아.
내가 사인 만들어서 꼭 해 줄게.
“내가 휴가 때 집 내려가면 꼭 해 줄게. 약속.”
앞으로 내민 새끼손가락에 동생도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나저나 상금 어떻게 할 거야?”
동생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조금 부담스럽구나.
1억.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연봉의 몇 배야 이게?
연봉도 조만간 협상에 들어간다고 했다.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기대해도 좋다고 살짝 언질을 주신 감독님이셨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까 말한 대로 해야지.”
“정말?”
“응. 일단 집 사는 데 보태야지.”
‘이참에 엄마도 일 그만두고’라는 말은 목구멍 뒤로 삼켰다.
여기까지 말 할 필요는 없었다.
“무슨 집? 그 돈 쓰지 말고 다 저금해서 너 장가갈 때 밑천으로 써라.”
왜냐하면 집 사는 것부터 설득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예상대로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돈 받기를 거부하셨다.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사모님.
제가 뭐 때문에 이렇게 악착같이 프로게이머 생활을 버텼는데요.
“내 장가 갈 돈은 또 모으면 돼. 일단 가족 함께 지낼 집부터 사자. 어차피 나 휴가도 내려가는데 집 괜찮은 거 봐 두면 좋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네가 번 돈 그렇게 쓰고 싶지는 않다.”
으. 아쉽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
“어차피 나 이번에 연봉도 많이 오를 거고 다음 주 결승에서 우승하면 1억 더 받고 우승 못 해도 5천 만원 받아. 지금 최소 확보된 돈이 1억 5천 만원이라니까? 공주에다가 집 하나 사 두자. 응?”
1억 5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말하고 살 떨리는 돈이다.
이런 돈을 평생 만져 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이렇게 큰돈을 불과 2달 만에 번 것이다.
잘하면 2억까지 벌 수 있다.
물론 세금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금액이긴 하지만 말이다.
세금에 대한 문제는 팀에서 알아서 해 준다고 했다.
난 엄마의 입만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알겠어, 엄마.”
예쓰! 반대하지 않고 생각해 보자는 대답만 받아도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렇게 화기애애한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엄마도 참고 있는데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때였다.
-우웅.
진동과 함께 문자가 하나 왔다.
나보다 빠르게 반응하는 동생.
휴대폰을 만진 건 아니었지만 위에 뜬 글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김채하 기자? 여자야?”
여자의 촉이 무섭다고 누가 말했던가?
정답이다.
“어? 어. 그냥 기자야. 기자!”
동생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냐? 그 눈빛은.
“흐음. 왜 그렇게 당황해?”
“응? 뭐가? 내가 뭐?”
“기자면 그냥 기자라고 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말도 버벅이고 그러냐고. 수상한데?”
“아닌데. 나 하나도 안 당황했는데?”
무언가 말리는 느낌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오빠가 좋아하는구나? 확실해.”
너 형사니?
“…….”
여자의 촉이 무섭다고 말했던 사람 정말 누군지 알고 싶다.
인생의 진리를 살아생전 깨닫다니.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잃고 싶어서 잃은 건 아니었다.
내 머리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맹렬히 회전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네?”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름칠을 안 한 경첩처럼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박! 오빠도 여자 좋아하는구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동생의 외침에 엄마도 흐뭇한 웃음……. 흐뭇한?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평소라면 동생에게 오빠 그만 놀리라고 말하셨을 엄마가 가만히 계신다.
내가 여자 친구가 생기길 바라시는 건가?
하긴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연애를 해 보지 못했으니 걱정하실 만도 하다.
집을 사 드리는 것 보다 연애를 하는 것이 더 효도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나저나 나 정말 김채하 기자를 좋아하는 건가?
왜 이렇게 당황했지?
“어? 오빠 얼굴 빨개졌다? 김채하 기자님 생각하나 보다!”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자.
***
OSL 결승전이 끝난 지 4일이 흘렀다.
가족과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웃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음날 내려가기 전에도 동생은 끊임없이 김채하 기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김채하 기자님의 기사가 참 좋다는 둥 신들의 전쟁에 많은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둥 김채하 기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말을 꺼냈다.
하하하.
옛날 같았으면 로켓 펀치라도 한 방 먹여 주는 건데.
다 커서 참는다.
로켓 펀치는 별거 아니다.
그냥 꿀밤이다. 핵꿀밤.
이름만 로켓펀치다.
동생이 간 후에야 김채하 기자의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내용은 별것 없었다.
그냥 우승 축하한다는 내용 정도?
이 문자에 내가 그렇게 시달렸다는 거야?
차라리 별것이었다면 더 좋았을……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이승우.
흠. 어쨌든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낸 것으로 더 이상 문자가 오지 않았다.
결승 다음 날 치러졌던 프로리그에서 우리 팀이 가볍게 승리하며 CT로부터 2위를 탈환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이번에도 진다면 거센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거다.
이승우 원맨팀이라는 꼬리표가 여전히 붙어 있었겠지.
숙소에 돌아온 순간 팀원들의 헹가래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모두가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간 인터뷰도 엄청 했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대우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슈퍼 루키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우승자의 대접을 확실히 받았다.
솔직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나를 향해 감독님께서 살짝 조언을 해 주셨다.
그럴 땐 그냥 즐기라고.
여태 내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부터 2군 생활을 6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우승을 했을 때의 소감에 대해 물었다.
진 로열로더.
그것도 이영우를 잡고 이룩한 업적.
정말 내가 했는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트로피는 팀에 잘 모셔 두었다.
아스트로 역사상 첫 번째 트로피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도 난리가 났었다.
단장부터 후원사 사장님까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만난 것 같았다.
다시 인터뷰 이야기를 하자면 최다 연승 기록에 대한 것도 여러 차례 언급이 되었다.
솔직히 결승을 준비하느라 거기까지 생각을 하진 못했었다.
연승이고 뭐고 우승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OSL 결승전 2세트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내가 쌓아 올린 연승의 수는 무려 18연승이었다.
기존의 기록보다 3연승이나 높은 수치였다.
저번에 14연승에서 멈췄을 때 언제 또 14연승을 찍나 생각했는데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14연승은 진작 찍고 18연승까지 오다니.
감회가 새롭다.
아.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MSL 결승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물어봤다.
솔직히 자신 있었다.
우승을 차지한 후 버프 [진 로열로더]를 얻었으니까.
효과는 모든 능력치 상승 40%.
지속 시간은 여전히 2주였다.
[양대 결승진출자의 위엄]은 상대도 안 됐다.
스탯 포인트나 스킬 포인트를 주진 않았다.
아쉬워하려는 찰나 [강철멘탈]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얻었다. 거기에 더해 멘탈 능력치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
거의 20씩 상승했다.
엄청난 수치다.
스탯 포인트가 아무리 많아도 찍을 수 없는 멘탈 능력치가, 그것도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이기에 헤벌쭉 웃음이 절로 나왔다.
[강철멘탈]은 [강심장]과 비슷한 스킬이었다.
그나저나 둘 다 멘탈과 관련 된 보상이네?
커뮤니티에 접속할 때도 입이 귀에 걸렸다.
모두 내 칭찬뿐이었으니까.
정신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육룡은 사라졌다.
대신 칠룡이 나타났다.
다행이었다.
만약 윤영태가 육룡에서 탈락하고 그 자리를 내가 차지했다면 조금 미안했을 것 같다.
삼족오라는 별명 대신 사람들은 나를 신룡이라 불렀다.
MSL에서 만든 별명을 사람들이 더 좋아했다.
이것도 다행이었다.
나 역시 삼족오보다 신룡이 끌렸으니까.
삼족오는 조금 뜬금없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용족을 잡고 결승에 오른 건 맞지만 한 시즌에 국한되는 별명이지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별명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용족이다 보니 육룡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
일단 최소 1회 우승 1회 준우승을 확정지었기에 사람들은 택뱅 바로 밑에 내 이름을 올려 두었다.
만약 MSL까지 우승하게 되면 송병호를 제치고 두 번째까지 올라가게 될 거다.
일부는 김택윤도 가지지 못한 양대 우승이니 1위 혹은 김택윤과 동일선상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의견은 생각보다 많은 동의를 받았다.
양대 우승을 한 용족 자체가 1명.
양대 동시 우승을 한 용족은 아예 없다.
그렇기에 양대 동시 우승을 한 나를 1위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에 점점 힘이 실리긴 했다.
<일단 우승하고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하지만 이 댓글 하나에 모두 정리되었다.
나도 공감한다.
아직 나도 1회 우승자다.
적어도 양대 우승을 한 후에야 서열을 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서열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는 거다. 재미로.
물론 1위를 한다면 기분이 굉장히 좋겠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다음 에피소드는 임형규와의 MSL 결승이군요.
이영우전보단 빠르게 마무리 짓겠습니다.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