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Game No. 183 혈투 =========================================================================
Game No. 183
적절히 들어간 빙룡의 숨결.
완벽한 타이밍에 덮친 병력.
동시에 화차를 싹 터트린 천벌.
마지막으로 추가 병력 소환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어느 것 하나 빠졌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공격이 잘 조화되었다.
그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상상으로만 생각하던 걸 이렇게 완벽하게 해낼 줄이야.
이 맛에 프로게이머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를 뻔했다.
솔직히 성공할 수 있을지 나 스스로도 의문이 들던 전투였다.
그만큼 말이 안 되는 전투였다.
하지만 이영우를 잡으려면 이 정도 상황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가슴이 떨려 미치는 줄 알았다.
시뮬레이션만 해 봤고 실제 경기에서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무리 [투신]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컨트롤은 내 손이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것이 아니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달려들었다.
순간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공간에 나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
유닛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전장에 내가 해야 할 것들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동시에 무얼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이영우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 빠르게 정리되었다.
마치 누가 정보를 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런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신들의 전쟁을 한 이후 처음이었다.
다행히 손이 어지러워지지 않고 차분히 컨트롤을 하는 데 성공했다.
환국의 한 방 병력을 모두 잡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병력 피해 정도로만 보면 내가 훨씬 크다.
하지만 먹는 자원이 워낙 많아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다시 계산하면 내가 훨씬 이득을 본 상황이었다.
금세 인구수 200을 맞출 수 있는 나와 달리 이영우는 천자총통을 이만큼 확보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진출하면서 먹은 추가 멀티가 풍전등화가 되었다.
지킬 수 있는 병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야 중앙을 환국이 장악했으니 상관없었지만 이번 전투 결과로 주인이 다시 바뀌었다.
추가 병력을 보내 어떻게든 빙룡의 숨결에 갇힌 병력을 살리려 하는 이영우였지만 이미 충원 속도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이번 경기는 잡았다.
질 수가 없는 경기다.
자만이나 오만이 아니다.
실제 상황이 그렇다. 내가 해야 할 건 오직 하나다.
이영우의 추가 확장을 밀어 버리는 것.
반면 이영우가 해야 할 건 많다.
천자총통도 다시 모아야 하지, 확장도 다시 확보해야 하지, 견제도 해야 하지.
이렇게 나열만 해도 머리가 아픈 걸 손으로 직접 다 해야 한다.
지금 자원으론 결코 천자총통을 다시 모을 수 없다.
본진과 앞마당의 자원이 거의 떨어졌을 테니까.
쉬운 경기는 아니었다.
시작부터 압박이 거셌다.
경기에 대한 압박이 아니다.
심리적인 압박이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가족들과 팀원들의 얼굴을 생각하며 버텼다.
점점 손에 가볍게 풀리고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모든 압박에서 온전히 벗어났다.
다시 1세트를 펼쳤을 때의 그 기분으로 돌아왔다.
페이스를 완벽히 회복했다는 말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
괜히 기회를 줄 수가 있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내는 것도 능력이다.
금세 인구수를 200을 채운 난 곧바로 병력을 이끌고 확장을 쳤다.
일꾼까지 동원해 항전해 보지만 결국 무기력하게 확장을 뺐기는 이영우.
천하의 이영우라도 지금 상황은 어쩔 수 없었다.
그 기세를 몰아 본진까지 입성했다.
천자총통의 포신이 불을 뿜었지만 업그레이드라는 말로 커버하기엔 내 병력이 지나치게 많았다.
우격다짐으로 병력을 계속 밀어 넣었다.
효율성 같은 건 따지지 않았다. 따질 필요가 없었다.
내 모든 병력이 다 죽어도 천자총통 5기만 잡아도 이득인 상황.
앞마당을 뚫고 화통도감을 장악하는 순간.
-이영우 : GG.
이영우의 GG가 나왔다.
그걸 보는 순간 입가에 씨익 미소가 그려졌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승부는 원점이다.
***
-이승우 선수 정말 대단합니다! 경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야. 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진짜 양 선수 짱입니다. 짱!
-상대가 이영우입니다. 이영우를 상대로 2:2를 만들며 풀세트 접전까지 가는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최근 이영우를 이렇게까지 고전하게 만든 용족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육룡 중 그 누구도 이영우를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육룡? 육룡은 무슨 얼어 죽을 육룡. 이영우 앞에선 다 도마뱀 아니냐! 이런 말까지 나왔거든요?
-육룡도 아닌 이제 막 데뷔한 선수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기 일보직전입니다!
-이번 4세트는 용족의 완성형을 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저 상황에서 저런 전투를 펼치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말은 쉽죠. 그냥 병력 달려들기 전에 빙룡의 숨결로 얼리고 달려들고 그 위에 천벌 뿌리고. 용아가 다 죽었다고? 그냥 천룡의 부름으로 소환하면 되잖아? 그럼 병력 조합 안 깨지잖아? 근데 손으로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아깝습니다. 말처럼 쉽게 될 것 같으면 모든 용족이 저런 식으로 전투를 했겠죠. 하지만 그런 용족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건 이승우 선수를 백번 칭찬해 주어도 모자랍니다. 누가 이걸 이렇게 합니까? 진짜. 굉장하지 않습니까?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직접 당한 이영우 선수는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입신전을 현실화 시켰어요. 단순히 날빌만, 전략적인 움직임만 뛰어난 선수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신들의 전쟁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선수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플레이가 나올 수 없거든요?
용족의 희망.
김태영 해설은 잔뜩 흥분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줄 알고 내심 섭섭하던 차 역대급 경기력으로 이승우가 4세트를 가져갔다.
그 정도로 마지막 전투 장면은 압권이었다.
교과서긴 한데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교과서라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이상에 가까운 용족의 모습이 나왔다.
당연히 신날 수밖에 없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편안한 표정으로 경기를 관람하던 이정훈 감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아스트로를 위시한 이승우를 응원하는 쪽엔 제대로 불이 붙었다.
그만큼 중요한 경기였다.
1세트는 전략으로 이겼다.
그리고 2, 3세트는 이영우의 강력한 공격에 내리 경기를 내주었다.
이대로 이승우의 멘탈이 무너져 경기가 끝나는 건 아닐까 모두 생각했다.
하지만 이승우의 멘탈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다.
과감한 빌드와 전투력으로 승리를 따냈다.
이영우답지 않은 패배.
이제 승부는 마지막 5세트에서 가려진다.
단 한 경기 명암이 갈린다.
영광을 차지할 자와 영광을 놓치는 자.
세상은 2등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다.
열 번의 준우승보다 값진 것이 우승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전장은 왕도입니다. 정말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왕도(王道).
그리고 그 왕도를 걷는 자.
로열로더(Royalroader).
만약 이승우가 우승을 하게 된다면 기가 막힌 스토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양 선수의 운명을 건 5세트와 함께 잠시 후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
<헐. 2:2 ㅅㅂ 지린닼ㅋㅋㅋㅋㅋ>
<3세트 끝나고 이승우 날빌밖에 못한다고 개소리 지꺼린놈 어디갔냐?ㅋㅋ 뒤졌냐?ㅋㅋㅋ>
<ㅋㅋㅋ이미 뒤져서 관 속에 누운듯 ㅋㅋ>
<ㅃㅂㅋㅌ.>
<시발 진짜 2:2넼ㅋㅋㅋ 3세트 끝나고 존나 허무하게 경기 끝날 것 같아서 밥 먹고 왔는뎈ㅋ>
<4세트 개 명경기였다 ㅇㅇ 꼭 봐라. 용족이 할 수 있는 거 다나옴.>
<신 이야기> 서버가 폭파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글이 빠르게 올라왔다. 방금 올린 글이 곧바로 2페이지로 넘어갈 정도였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이번 경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4세트가 끝난 순간 그 누구도 우승자 예측을 섣불리 하지 못했다.
결승에 오른 CT와 아스트로의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팀 감독에게 누가 우승할 것인지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8:2로 이영우가 우승할 것 같다는 전망이 나왔다.
실로 압도적인 결과였다.
이승우가 그간 엄청난 승률과 경기력으로 결승에 올라온 건 인정하지만 상대가 이영우기에 제 실력을 다 발휘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결승 무대 경험도 차이가 있었고 말이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제 이 자료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
마지막 5세트까지 온 지금 누가 우승을 한다고 예측했던 자료는 전부 무의미해졌다.
***
“마지막이니까 가진 걸 모두 쏟아붓는 거야. 알겠지? 이영우도 4세트 패배해서 기운이 좀 빠졌을 거다.”
감독님의 말을 들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4세트 승리로 많은 걸 얻었다.
이영우도 아예 무적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좋은 경기였다.
“조금 다른 운영을 써도 괜찮아. 네가 여태 그렇게 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 이영우의 머릿속에 천왕랑은 배제되어 있을 거다.”
감독님이 추천해 주신 운영은 천왕랑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끌렸다.
감독님의 말씀처럼 난 여태 천왕랑으로 경기에 승리한 적이 거의 없었다.
연습 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하늘 성소 계열의 유닛을 활용한 후 나가를 적극 사용하는 편이었다.
환국을 상대하는 용족의 운영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하늘성소 계열의 유닛을 적극 활용한 후 나가로 가거나 지룡으로 상대를 압박한 후 천왕랑을 가는 것.
모두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김택윤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송병호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에겐 전자가 맞았다.
공중 유닛 컨트롤이 많이 떨어졌지 때문이었다.
모든 유닛이 그렇지만 천왕랑은 컨트롤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송병호처럼 잘만 쓴다면 불리한 경기도 역전해 낼 수 있는 최종 병기이기도 했다.
최근 얻은 스탯 포인트를 통해 공중 유닛 컨트롤로 꾸준히 찍어 줬고 버프까지 있어 이제 그 수치가 꽤 높다.
예전처럼 사용을 꺼릴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전장도 왕도니 천왕랑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강요하는 건 아니고 한 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거야.”
“네. 알겠습니다.”
왕도는 언덕이 많다.
이 말은 천왕랑을 쓰기에 아주 적합하다는 뜻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천왕랑을 사용해 볼게요.”
“그래. 꼭 무리하게 천왕랑을 갈 필요는 없다. 굳이 천왕랑을 갈 상황이 아니면 가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경기를 운영해라. 경기의 주인은 너니까.”
마지막 말이 뇌리에 꽂혔다.
경기의 주인은 나라는 말.
“가 보겠습니다.”
“지든 이기든 상관없다! 절대 후회 남지 않을 경기를 하고 내려와라!”
후회 남지 않을 경기를 할 겁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말이니까요.
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길 겁니다.
여기까지 온 거 반드시 승리를 따내, 우승자가 되고 싶습니다.
시대의 지배자가 되고 싶습니다.
남들이 제대로 기억도 해 주지 못하는 준우승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