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1 Game No. 181 혈전 그리고 혈전. =========================================================================
Game No. 181
사람과 경기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무쇠 벽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느낌이었다.
아예 방어하기로 마음먹은 이영우는 무서웠다.
어떤 공격을 해도 웃으며 받아 넘겼다.
솔직히 상황 자체는 불리하지 않았다. 통하기만 한다면 가장 사기라는 생더블을 무난히 성공시켰다.
그럼에도 운영에서 패배했다.
초반에 어떻게든 피해를 줬어야 했다.
실패한 천룡의 부름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그때 제대로 된 타격을 입혔다면 경기가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이다.
실수를 교훈 삼아 앞으로 이런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
반대편 부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덤덤한 얼굴의 이영우가 보였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이영우가 경고를 보내고 있다는 걸.
어차피 넌 안 된다고.
더 이상 덤비지 말라고.
스킬도 무용지물이었다.
[투신]을 쓰고 싸웠음에도 전투에서 밀렸다.
먼저 진형을 갖추고 싸워도 이길까 말까 한 상황인데 오히려 상대가 원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하고 말았다.
그러니 [투신]을 쓰고도 진 것이겠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구도에서 이영우가 싸워 주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지는 건 나였다.
이영우를 선수 위의 선수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맞대결에서 패배한 후 내리 3연승을 거둬 잠시 잊고 있었다.
이영우가 누구인지.
흔들어야 한다.
무난히 진행되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경기가 끝난 후 만난 감독님도 그러한 점을 주문하셨다.
이영우를 편하게 만들지 마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그냥 당장의 상황만 생각하게 만들어라.
난 감독님의 주문을 계속 중얼거렸다.
****
―이영우 선수 대단합니다. 금세 스코어를 2:1로 만들어 냅니다!
―역대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투신, 파괴신, 사신. 하지만 앞에 다른 것들이 다 붙었거든요? 하지만 이영우 선수는 아무것도 붙지 않습니다. 그냥 신입니다. 신. 조건 자체가 필요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한 신! 1세트를 내줬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단숨에 2:1로 앞서갑니다!
3세트는 싱겁게 끝났다.
이영우의 5화통 타이밍 러시에 이승우가 GG를 선언했다.
시작은 1세트와 똑같았다.
앞마당 제단과 페이크 더블(FD).
다른 것이 있다면 본진에서 방어를 했던 1세트와 달리 3세트에선 궁병의 수를 적극 늘리며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여 줬다는 것이다.
빌드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모든 걸 좌우하는 건 아니다.
그림에 비유하자면 빌드는 밑그림이다.
앞으로 나아 가야 할 방향을 잡는 것이다.
운영은 채색이다.
아무리 좋은 밑그림이 있어도 엉망진창으로 색을 입히게 되면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없다.
다 이긴 경기를 역전당하는 선수가 나오는 이유였다.
물론 밑그림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훌륭하면 대충 색을 칠해도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지만 보통 상황에선 좋은 밑그림만큼 좋은 채색이 필요하다.
아예 극상성으로 빌드가 갈리면 운영이고 나발이고 그대로 경기가 끝나는 수도 있지만 운영으로 극복 가능한 빌드 차도 꽤 많다는 말이다.
불리한 빌드를 운영으로 가장 잘 극복하는 선수는 단연 이영우였다.
여기서 다시 한번 그 진가가 발휘되었다.
박수가 절로 나오는 컨트롤을 통해 초반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어찌나 뛰어난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막히긴 했지만 천자총통을 살리며 용혼의 숫자를 줄여 준 것이 컸다.
환국이 타이밍 러시를 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용족과 비슷한 타이밍이 확장을 가져가거나 용족의 지룡, 흑완 견제에 전혀 피해를 받지 않거나 초반 찌르기로 용족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이 셋 중 하나만 충족해도 타이밍 러시가 가능해진다.
지금 같은 경우는 가장 마지막 경우였다.
초반 피해를 입어서일까?
이승우의 물량이 초라했다.
운룡을 활용하며 어떻게든 환국의 병력을 밀어내려 했지만 5개의 화통도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갑병력의 화력은 무지막지 했다.
―초반 용혼이 제대로 빠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운 이승우겠습니다.
―그렇죠. 그 용혼이 무리 없이 뒤로 빠졌다면 FD병력을 더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을 거거든요?
―똑같은 빌드는 또 당하지 않는 이영우 선수네요.
결국 앞마당까지 조여졌다.
이젠 정말 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모은 병력을 가지고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 이승우.
그 수가 꽤 많긴 했지만 좁은 언덕을 한 번에 내려올 수 없었다.
집중포화에 마지막 용혼이 죽는 순간 이승우가 GG를 선언했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1시간 전만해도 이승우가 웃는 상황이었다면 이젠 이영우가 웃는 상황이 되었다.
4세트.
딱 한 세트만 더 잡아내면 우승 트로피는 이영우의 품에 안기고 이승우의 진 로열로더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
난 허탈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내리 2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이건 내가 그린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그래. 2세트는 전장의 특성 때문에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3세트, 우사의 정원은 그렇게 질 경기가 아니었다.
이미 [날빌러]를 통해 상대가 5화통 타이밍 러시를 기획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병력 위주의 전략을 선택했다.
그런데 졌다.
그래서 분했다.
알고 있음에도 당하다니.
초반 궁병―화차―천자총통 견제에 생각보다 용혼을 많이 잃었다.
핑계를 대는 것 같지만 운이 안 좋았다.
용혼은 신들의 전쟁 유닛 중 가장 지능이 떨어지는 유닛이다.
분명 이동이나 공격 명령을 내렸음에도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필 오늘이 그날이었다.
앞장 서 있는 궁병을 끊으며 뒤로 무빙 컨트롤을 해 주던 용혼이 다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속된 말로 껌 밟은 상황이었다.
몇 번이고 우 클릭을 했지만 용혼은 움직이지 않았다.
잃지 않아도 될 용혼을 그렇게 잃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꼬였다.
그 후 [엄대엄]과 [아직 모른다]까지 사용했지만 상황을 돌리기엔 늦었다.
[엄대엄]이 무조건 상황을 5:5로 만들어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미 환국의 병력이 턱 끝까지 치고 올라온 상황이었다.
5화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량은 어마어마했다.
앞마당 피해를 받은 내가 커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중앙에서 어떻게든 진출을 늦추고자 했지만 소용없었다.
진천형을 했다 풀었다 하게 만들며 시간을 끌려 했는데 이영우는 그런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렸는지 일명 퉁퉁포로 러시를 온 것이다.
그것만으로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다.
보통 타이밍이라면 결코 퉁퉁포로 러시를 오지 않았을 것이다.
초반에 내가 피해를 입었기에 물량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경기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남은 체력은 86%.
남은 경기는 두 경기.
두 경기에 사용하기에 그리 적은 체력은 아니다.
역전을 노리기엔 충분하다.
정신 차리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
“우씨. 왜 하필 저기서 용혼이 껌 밟고 난리냐?”
“제대로 똥 밟았다. 솔직히 저거 살아남았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는데.”
“이거 재경기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3세트 경기가 끝난 후 아스트로 선수들이 씩씩거리며 콧바람을 뿜어 댔다. 목소리가 많이 격해져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1기의 용혼이 얼마나 큰 차이를 낳는지 프로게이머라 잘 안다.
용혼이 그리 허무하게 잡히지만 않았어도 경기 양상이 달라졌을 거다.
“그래도 어쩌겠냐? 받아들이고 해야지.”
도 수코가 혀를 쯧 하고 찼다.
아쉬운 건 그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승우 정신력이 굉장히 뛰어난 아이라서 극복해 낼 겁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승우의 엄마까지 챙겼다.
여기서 가장 초조한 사람은 선수도, 감독도, 코치도, 팀원도 아닌 엄마일 것이다.
아직 부모가 아니라 그 입장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도 수코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자. 이제 4세트 시작합니다! 우리 승우가 이길 수 있도록 응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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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4세트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전장 이름부터 지금 상황과 어울리죠? 운명의 갈림길. 정말 이번 세트에서 우승이냐 5세트냐 양 선수의 운명이 갈리게 됩니다.
―1세트를 쉽게 잡은 만큼 2, 3세트를 너무나도 쉽게 내준 이승우 선수거든요? 이대로는 안 됩니다. 다시 한번 필살기를 꺼내들든가 해서 분위기를 바꿔야 합니다.
―3세트가 끝난 후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이승우 선수를 만났거든요?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아직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거든요?
―이 선수 정신력이 굉장히 강한 선수입니다. 양대 결승에 오른 선수인데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되죠!
―4강에서 김택윤을 맞이해서 패패승승승으로 결승에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4세트가 굉장히 치열할 것 같습니다. 이영우 선수도 굳이 5세트 가고 싶어 하지 않을 거거든요? 무조건 찍어 누르려고 할 겁니다.
―양 선수 모두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세트가 될지도 모르는 운명의 갈림길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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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세트가 비교적 싱겁게 끝났다면 4세트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승부.
빌드는 서로 무난했다.
이영우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도감 더블을 했고 이승우 역시 생더블을 하며 빠르게 확장을 가져갔다.
중계진들이 이승우의 대범함을 칭찬했다.
한 세트만 내주면 패배가 확정되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생더블을 시도한 것 자체가 대단했다.
만약 이영우가 초반에 찌를 요량으로 공격적인 빌드를 준비했다면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GG를 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빌드 자체는 이승우가 이겼다.
그것을 이영우도 알았기에 빠르게 트리플을 가져가며 후반을 준비했다.
이승우도 만만치 않았다.
이영우가 트리플을 가져가는 타이밍에 운룡과 함께 견제를 들어온 것이다.
운룡에 탄 4기의 용아가 무사히 떨어지는 순간 용혼이 천자총통을 덮쳤다.
군영을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천자총통의 수를 줄어주며 환국이 나올 수 있는 타이밍을 없애 버렸다.
용족으로선 마음 편히 확장과 테크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 박자 느리게 트리플을 돌리며 상황이 불리해졌지만 이영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화차를 돌리며 용안 견제를 해 줬다.
그야말로 신들의 전쟁이었다.
쓸모없는 컨트롤이 없다. 모두 상황에 맞는 움직임이었다.
결승전이란 무대에 걸맞은 경기력을 서로가 보여 주고 있었다.
숨이 멎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해서 나온다.
자연스레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양 선수 모든 걸 불사르고 있습니다. 정말 할 말이 없네요.
―마치 서로의 전장을 훤히 보고 경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운영을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창과 모든 걸 막아내는 방패가 만난 느낌입니다. 서로의 상대가 서로만 아니었다면 누가 이겨도 할 말이 없는, 그런 경기력입니다!
중계진들이 앞 다투어 양 선수를 칭찬했다.
경기가 재미있으면 중계진들도 당연히 신난다.
목이 터질 듯 외쳐댔다.
저러다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였다.